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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폭군 간신 탐구

레오폴드 2세. 콩고를 무자비하게 유린했던 추악한 벨기에 독재자

by 사탐과탐 2021.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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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개척시대 뒤늦게 식민지 개척에 뛰어든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콩고를 식민지로 삼는데요.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악독한 인물 레오폴드 2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군주로써 대규모 학살을 가장 많이 한 인물은 쿠빌라이 칸 입니다.

그는 약 1,90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죠.

그리고 지도자 로써 가장 많은 사람을 학살한 사람은 다들 잘 아시는 히틀러, 스탈린이 약 2,000만 명 그리고 모택동이 약 7,00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방금 언급된 인물들은 모두들 들어본 적 있는 이름 일 텐데요.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군주로써는 두 번째로 지도자로써는 다섯 번째로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입니다.

그는 바로 벨기에의 국왕이었던 '레오폴드 2세' 이죠.

 

레오폴드 2세는 콩고 사람을 무려 1,500만 명이나 잔인하게 학살한 인물인데요

당시 인구수가 정확하지 않아 규모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적게는 수십만 명에서 많게는 천만 명 이상 학살 당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레오폴드 2세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요?

 

(레오폴드 2세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865년 12월 17일. 그는 벨기에의 국왕인 레오폴드 1세와 루이즈 마리 왕비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에게는 원래 형이었던 루이 필리프가 있었지만,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렇게 그는 아버지인 레오폴드 1세의 후계자가 되었죠.

그렇게 18세가 되자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아 헨리에타와 결혼을 했고 20살 성인이 된 그는 벨기에의 상원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의원이 되고 나서 벨기에도 식민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장했습니다.

그러던 중 1865년 12월 10일. 아버지 레오폴드 1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벨기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죠.

 

그는 왕이 되자마자 식민지를 만들고 싶다는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벨기에는 식민지 개척에서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식민지를 만들만한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돈을 주고 식민지를 구입하려 했죠.

처음엔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구입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 이후로도 여러 나라에 식민지를 팔라며 찔러봤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식민지에서 수탈하는 모든 것들이 워낙 짭짤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입장에서 보아도 식민지를 판매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번번이 식민지 구매를 실패하던 중에 미개척지이던 아프리카의 콩고가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레오폴드 2세는 콩고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우는데요.

 

1876년 9월 14일 브뤼셀에서 지리학 회담을 개최하여 '미개척지인 콩고를 탐험하고 고통받고 있는 흑인들을 도와주겠다' 라며 참가한 사람들을 설득했고 '국제 콩고 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하고 스스로 회장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뛰어난 외교 수완을 발휘해 여러 국가들 또한 설득하기 시작했죠.

 

그러자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여러 강대국들을 설득하는데 성공을 했고 그는 콩고의 법과 질서를 확립하고 문명화 시키는데 이 한 몸 바치겠다며 많은 나라를 속이면서 결국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속에 콩고의 지배권을 확정 지었습니다.

 

그렇게 콩고의 지배권을 인정받은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의 개인 사유령인 '콩고 독립국'을 만들었고 당시 유명한 미국인 탐험가였던 헨리 모턴 스탠리에게 콩고를 식민지로 만들자고 제안했고 스탠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죠.

그렇게 콩고로 간 스탠리는 도착 후 콩고의 지방을 돌면서 원주민 추장에게 구슬이나 옷감 등을 선물하며 자신이 가지고 간 종이 위에 그 종족을 표시하는 기호를 그리거나 X자로 표시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추장들은 벨기에 사람들이 "우리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선물도 주고 사인까지 받아 가는가 보다" 싶어서 해달라는 대로 종이에 흔쾌히 사인을 해줬는데요.

이 종이가 자신들을 노예로 전락하게 만드는 문서인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서명한 종이에 내용을 요약하면 '콩고 땅의 모든 소유권과 통치권을 영원히 포기하고

노동력 또한 언제든지 징발 가능하며 도로나 수로, 수렵, 어업, 광산, 삼림 개발권 등 모든 것을 레오폴드 2세가 만든 국제 아프리카 협회에 양도한다'라는 얼토당토 안한 내용의 문서였죠.

500여 명에 달하는 원주민 추장들이 그 문서에 사인을 하며 그렇게 벨기에의 75배에 달하는 콩고가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사유지가 되어버렸죠.

 

훗날 콩고 독립국의 국왕 칭호를 부여받은 레오폴드 2세는 콩고에는 가지도 않고 손가락질이나 말 한마디로 그야말로 강력한 철권통치를 시작하는데요.

처음에는 산과 정글을 통과하는 철도를 깔기도 하며 콩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좋은 국왕처럼 연기했지만 얼마 안 가 그의 사악한 본모습이 드러나게 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원래 레오폴드 2세는 장식품으로 잘 팔리던 상아를 주 수입원으로 삼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원주민들을 강제 동원해서 코끼리를 마구잡이로 사냥했고 상아를 수출하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수입이 변변치 않았던 것이죠.

그러자 그는 주 수입원을 다시 생각했는데요.

그렇게 생각한 것이 바로 고무였습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고무 붐이 일어나고 있었는데요.

고무로 타이어를 만들면서 자전거가 발명되자 전 유럽에서는 자전거 열풍이 불기도 했고 게다가 당시 규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자동차 산업으로 인해 전 세계의 고무를 필요로 하는 산업이 폭증했는데 기존의 고무 생산량은 수요에 비해서는 너무나 부족했고 고무의 가격은 끝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런데 콩고에는 '검은 황금'이라고 불리는 고무나무가 국토의 절반에 달하는 엄청난 면적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에 레오폴드 2세는 고무 생산에 원주민들을 강제로 모두 투입시켜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는데요.

1893년에 250톤도 되지 않았던 콩고의 고무 수출량은 고작 8년 만인 1901년에 6000톤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레오폴드 2세의 원주민들 착취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당연하게도 콩고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모두 그의 개인 금고에 차곡차곡 쌓였고 콩고의 발전에는 조금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마을 근처에 있던 고무나무는 모두 씨가 말라 버렸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고무를 더 채취하기 위해서 마을에서 거리가 먼 곳까지 갔어야 했고 또한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서 일을 해야 했으며 점점 작업환경이 열악해지고 있었죠.

 

그러자 원주민들이 나무에서 떨어져 부상이 속출하기도 했고 고무나무가 자라는 지역은 굉장히 습하거나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기 때문에 아무리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너무나 고된 작업이었고 슬슬 원주민들이 고무 채취 작업을 기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레오폴드 2세는 원주민들의 고무 생산을 강제하기 위해 끔찍한 방법들을 동원했는데요.

 

흑인 마을에 가서 여자들을 잡아 감금한 후 가족들에게 고무를 가져오면 여자를 풀어준다고 협박했습니다.

만약 그 여자의 가족들이 고무 채취를 거부하면 그 자리에서 여자를 강간하거나 살해했죠.

 

더 열받는 건 가족들이 정해준 양의 고무를 가져와도 풀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자 1명당 염소 2마리를 추가로 주어야 풀어줬던 것이죠.

그러나 더 잔인한 행위는 이제부터 시작인데요.

원주민들에게 하루 고무 채취의 할당량을 정해주었고 이를 맞추지 못한 자들은 손을 잘라 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거기다가 한 번은 손만 자르고 살려주었지만 또다시 할당량을 못 채우면 팔을 잘라버렸고

한 번 더 할당량을 못 채우게 되면 목을 잘랐습니다.

그런데 원주민 한 사람이 할당량을 못 채워 죽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죠 죽은 사람의 할당량은 가족이나 주변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원주민 한 사람에게 죽은 사람 여러 명의 할당량이 주어지자 점점 더 할당량을 못 채우고 살아남기 힘들어졌으며 결국 전부 처형당할 수밖에 없었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할당량 때문에 주민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일이 빈번해졌고 나중에는 연좌제를 적용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마을 주민을 모두 처형하기도 했으며 반항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군대를 투입해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그가 콩고를 통치한 약 25년의 기간 동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원주민들이 죽어나갔죠.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각종 건물이나 기념물 등을 마구마구 지어댔고 영국의 고급 매음굴에서 10세~15세 가량의 소녀들을 꾸준히 공급받는다는 조건으로 돈을 써댔습니다.

 

또한 프랑스 빈민 출신의 매춘부 카롤린 라크루아에게 엄청난 돈을 썼는데요.

그녀는 레오폴드 2세가 65세 때 사귄, 49살 연하의 애인이었죠.

부인이 사망한 뒤부터 레오폴드 2세의 정부가 되는데요.

카롤린이 임신하자 친정을 오갈 때 편하게 왕래하라고 파리와 브뤼셀을 잇는 철도를 만들어 주었고 카롤린과 함께 프랑스 파리의 명품거리를 돌며 엄청난 돈을 쓰고 다녔죠.

이후 레오폴드 2세는 카롤린과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다시 콩고의 상황으로 돌아와서 당시에 정확한 콩고의 인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레오폴드 2세에 의해 학살당한 콩고인이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다고도 하고 최소 800만 명에서 최대 3천만 명까지 죽었다고 하는 추정치도 있죠.

 

어쨌든 엄청나게 많은 콩고인이 학살당했다는 것이 사실이고 1000만을 죽였든 10만을 죽였든 콩고의 대학살은 세계사의 다른 사례들과 비교해도 한치의 뒤처짐도 없는 너무나도 경악스러운 일이니 굳이 숫자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의 극악 무도한 행위는 여러 번에 걸쳐 폭로가 있기도 했지만 모두 묻혀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나 당시 카메라가 발명되며 콩고에 머물던 선교사들에 의해 콩고 원주민들이 잔인하게 학대와 학살을 당하는 여러 증거사진들이 찍혔고 이 사진들은 미국과 유럽의 신문에 실리게 되면서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모렐이라는 사람이 레오폴드 2세가 콩고에서 나온 이익을 빼돌리고 있다는 자료를 얻게 되었고 그 진상을 파악하기 시작했죠.

 

모렐은 콩고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사진을 제공받아 기사를 내면서 콩고에서 자행된 잔혹한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영국에서는 로저 캐즈먼트를 파견해 콩고에 대한 공식 조사를 벌였는데 콩고에 도착한 캐즈먼트는 불과 6개월 만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보고서를 올렸죠.

그렇게 일찍 돌아온 이유는 더 볼 것도 없겠다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 유명 인사들과 각국 정부에서 레오폴드 2세를 비판하고 나섰는데 레오폴드 2세는 세계 각국 언론사에 막대한 돈을 뿌려대며 여론을 바꿔보려고 시도했지만 그의 변호사가 레오폴드 2세가 뇌물을 뿌리며 로비질 한 것을 폭로해 버렸고 그의 말은 모두 거짓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죠.

그러자 미국과 영국 같은 국가들에서는 벨기에 정부에 콩고를 사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고 결국 콩고는 벨기에 정부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1906년 12월 14일. 콩고는 드디어 레오폴드 2세의 극악한 폭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그러나 콩고를 관리하는 것만 레오폴드 2세에서 벨기에 정부로 바뀌었을 뿐 원주민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가족들과 여자들을 인질로 잡는 것도 여전했으며 손목 절단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그전보다 더 가혹한 채찍질이 돌아왔고 강제노동이 사라졌지만 그 대신 막대한 세금을 거두었기 때문에 세금 낼 돈을 마련하느라 고무와 상아를 채취해야 했죠.

어쨌든 레오폴드 2세는 콩고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잃었고 그가 행한 쓰레기짓에 가족과 친척들에게도 외면을 받았으며 벨기에 정부 관료들과 국민들은 그를 혐오했습니다.

 

다만 그의 편에 섰던 단 한 명의 사람이 있었는데요.

그 사람은 바로 카롤린이었습니다.

1909년 12월이 되자 그는 창자까지 막혀버리는 중병에 걸려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고 어떠한 치료법이나 약도 없었죠.

 

(레오폴드 2세와 카롤린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자신이 얼마 안 가 죽을 거라 예감한 레오폴드 2세는 카롤린과 정식으로 결혼을 했고 그녀에게 남작부인이라는 작위를 내려주었으며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카롤린에게 물려주었죠.

그리고 12월 17일에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카롤린은 그의 임종을 지키며 그가 죽을 때 대성통곡하기도 했지만 그가 죽은 지 1년 만에 재혼해 버렸고 그와 함께 낳은 아들들도 그냥 내팽개쳐 뒀다고 하죠.

 

그는 죽기 전 민중들에게 무슨 화를 입을지 몰라 장례를 조촐하게 치러 달라고 당부했지만 조카 알베르와 벨기에 정부는 그가 죽어서라도 국민들에게 쌍욕을 먹도록 성대하고 화려한 장례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 국민들은 크게 분노하며 추모 행렬을 기다렸다가 그의 관이 지나갈 때 온갖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으며 심지어 관에다가 침을 뱉고 돌을 던지기도 했죠.

그렇게 레오폴드 2세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쌍욕을 들으며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레오폴드 2세와 어깨를 대등이 하는 학살자는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정도가 있는데요.

인류 역사에 남을만한 어마어마한 학살을 자행한 것치고 그와 비견되는 인물들과는 다르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죠.

그 이유는 레오폴드 2세가 학살을 자행한 곳이 유럽이 아닌 식민지 콩고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또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 너무나도 임팩트가 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이 묻혔다고 합니다.

 

현재 콩고에서는 그를 인간 취급도 하지 않고 '지옥에서 온 악마'나 원수로 취급하고 있죠.

콩고 국민들은 우리가 일본을 싫어하는 것만큼 벨기에와 레오폴드 2세를 증오한다고 합니다.

역사에 이름을 올렸던 수많은 학살자들과 폭군 그리고 악마에 비견될 정도로 쓰레기 같은 인물들은 많지만 레오폴드 2세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던거 같네요.

 

히틀러에 버금가는 벨기에의 학살자, 레오폴드 2세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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