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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문천상. 죽음을 무릅쓰고 원나라에 굴복하지 않은 송나라의 충신

by 사탐과탐 2023.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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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무릅쓰고 원나라에 굴복하지 않은 송나라의 충신 문천상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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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했음에도 나라에 끝까지 충성하며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인물들이 남송에 있었으니

그들을 '송말삼걸' 이라고 불렀습니다

 

송말삼걸에는 문천상과 육수부, 그리고 장세걸이 있는데요

 

오늘은 천재로 태어났지만 재능을 다 펼치지도 못하고

나라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충신, 문천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문천상은 태어날때부터 영험한 기운을 타고났는데

아기가 보라색 구름을 밟고 지나가는 묘한 태몽을 꾼뒤

태어난게 문천상이었고 그래서 운손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가

훗날 천상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하죠

 

이후 그는 30~40대에 겨우 합격하는 과거 시험에

고작 21살의 나이로 장원급제 해버렸는데

이때 과거를 감독하던 왕응린이 당시 황제였던 송이종에게

대단한 인재가 들어온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고나서 4일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삼년상을 치르고나서 관직에 오를수 있었죠

 

하지만 당시 송나라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는데요

 

1234년 몽골군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화북지방을 장악했고

남쪽에 있던 송나라로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천상이 관직생활을 시작하고 얼마안가 몽골의 침략을 받게 되었죠

 

그러자 송나라 조정에서는 몽골을 피해

다른곳으로 천도를 하는쪽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었는데요

 

이에 문천상은 몽골과 싸워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며 천도를 반대했는데

이런 강직한 성품 덕분에 그는 관직생활을 얼마 하지도 못하고 파직되고 말았죠

 

하지만 몽골의 칸이던 몽케칸이 갑자기 죽어버리자

몽골군은 급히 퇴각을 하게 되면서 천도는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능력이 출중했던 문천상은 다시 조정에 복귀할수는 있었지만

이후 권력을 잡고있었던 간신 가사도와 의견충돌이 벌어져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다보니 그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송나라 조정에서 관리로 일한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송나라 관리로써 대단한 업적을 남기거나 하지는 못했던 것이죠

 

어쨌든 가사도가 전횡을 일삼자 그러지않아도 점점 무너져가던 송나라는

결국 다시 일으키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는데요

 

다시 몽골군의 침략이 시작되자

최후의 방어선이던 양양마저 무너져 버렸고

이후 장강 상류 지역까지 모두 빼앗겨 버렸죠

 

거기다가 1275년 바얀이 이끄는 원나라군을 막기위해

가사도가 13만 대군을 이끌고 출진했지만 바로 대패해버리자

그렇게 송나라의 멸망은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때 문천상은 고향으로 내려가 결혼도 하고

잘먹고 잘살고 있었는데요

 

송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문천상은 전재산을 처분해

1만명에 달하는 의병을 모았습니다

 

원래부터 집안이 잘살았기 때문에

그는 평생 안락한 삶을 살수 있었지만

그 모든것을 포기하고 원나라에 저항하는 삶을 택했던 것이죠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송나라는 가망이 없다며

부질없는 짓이라고 그를 설득했는데요

 

이때 문천상은 "나도 가망이 없다는걸 알지만

나라가 위급해서 군사를 모집하고 있는데 한사람도 응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 얼마나 통탄한 일인가.

무모한 짓임을 알지만 내가 먼저 함으로써

천하에 있는 충신들과 의사들을 일어나게 할수 있다면

목숨을 잃어도 여한이 없겠네.

이는 나라를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네"

라고 말했다고 하죠

 

그리고 몽골에 대항해 처절한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다시 복직되어

당시 5살밖에 되지 않았던 송공제를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던

태황태후 사씨로부터

우승상 겸 추밀사 겸 도독제로군마로 임명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는 재상직과 군권을 가진 관직을 모두 꿰찬것으로

모든 권한을 다 가지게 된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남송은 기울대로 기울어져 침몰만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가 모든 권력을 가졌다 해도 큰 의미는 없었죠

 

원나라가 수도인 임안으로 빠른속도로 진격해오자

송나라 조정은 앞으로 어떻게 할것인가를 두고

두파로 나뉘게 되었는데요

 

바로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문천상, 장세걸, 육수부 등 몇몇 신하들과

화의를 주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신하들로 나뉘어져 버렸고

그렇게 매일을 싸워야한다와 화친을 맺어야 한다고 팽팽하게 맞섰죠

 

그러면서 많은수의 신하들은 이미 겁을 먹고 도망쳐버리기도 했으며

조정에 남은 신하들 대부분은 원나라와 화의를 원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어쩔수없이 장세걸, 육수부 등은 끝까지 싸우기위해 임안을 떠나버렸습니다

 

마침내 1276년 원나라군에 의해 송나라 수도 임안이 포위되고 말았고

결국 문천상은 화의를 맺기위해 원나라 진영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죠

 

하지만 화친을 맺을 생각이 없었던 문천상은

원나라군 총사령관인 바얀 앞에서

원나라군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심지어 만약 철수하지 않는다면

원나라군은 재앙을 맞이하게 될것이라고 했죠

 

그러자 문천상이 돌아간다면 다 항복한 송나라가

다시 저항을 할수도 있을거라 생각한 바얀은

바로 문천상을 체포해 버렸고

따로 사신을 송나라로 보내 항복하라며 협박을 했습니다

 

그러자 결국 태황태후와 신하들은 항복하는것으로 의견을 맞췄고

모두 성문을 열고 나와 원나라에 항복하고 말았죠

 

그렇게 남송마저 멸망한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장세걸과 육수부는 도망쳐

다시 저항을 이어나가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이때 남송 황족들과 수많은 귀족들은

원나라 수도인 대도로 압송되었고

문천상 역시 북으로 끌려가는 중이었죠

 

하지만 문천상은 포기하지 않았고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타 원나라군 진영을 탈출해

복주에서 장세걸, 육수부와 만나

익왕 조하를 황제로 옹립했는데 그가 바로 송단종 입니다

 

이렇게 문천상은 송나라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남송 부흥군이 되어

원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게 되었죠

 

하지만 집요하게 추격해오는 원나라군에 의해

장세걸과 육수부는 해로를 이용해 남쪽으로 도망쳤고

문천상은 육지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게릴라전을 펼치며

원나라군을 끝없이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278년 오파령 전투에서

원나라에 항복했던 한족 장수인 장홍범에게 패배해버렸고

문천상은 포로신세가 되어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한편 장세걸과 육수부는 송단종과 함께 애산으로 도주하던 중

결국 풍랑을 만나 송단종이 죽고 말았는데

그 이후 송소제가 다시 황제로 등극했지만

결국 애산전투에서 패배해 모두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송나라도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원나라 진영에 포로로 잡혀있던 문천상은

송나라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고 하죠

 

이 참담한 모습을 본 문천상은 이 비통함을

<육희가> 라는 시를 지어 표현했다고 합니다

 

<육희가(六噫歌)>

폭풍이 일어나자 바닷물이 나는구나, 아!(颶風起兮海水飛噫)

문무(文武)가 다 없어지니 화덕(火德)이 쇠하는구나, 아!(文武盡兮火德微噫)

새매는 공격하지만 베풀 곳이 없구나, 아!(鷹鸇相擊兮靡所施噫)

홍곡은 날고자 하나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아!(鴻鵠欲擧兮將安歸噫)

강물에서 노를 치며 노래하고 가는 대로 내버려 둠이여, 아!(櫂歌中流兮任所之噫)

홀로 《춘추(春秋)》를 안았거늘 날 알아주는 이 없네, 아!(獨抱春秋兮莫我知噫)

 

이후 그는 원나라 수도인 대도로 끌려가게 되었는데요

원나라 내에서도 그의 명성은 자자했었기 때문에

쿠빌라이 칸은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했죠

 

그래서 송나라의 좌승상이었던 유몽염을 문천상에게 보내 그를 설득했지만

오히려 돌아오는 대답은 항복한 유몽염을 꾸짖는 소리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엔 송공제를 보내 그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문천상은 송공제에게 돌아가라는 대답만 할뿐이었죠

 

이에 쿠빌라이 칸은 이번엔 문천상의 형인 문비를 보냈지만

그마저 문전박대를 당했으며

이후 문천상의 가족들과 딸이 포로로 잡혀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딸이 보낸 편지를 받게 되자 그는 매우 고통스러워 하며

이러한 상황에서도 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죽음만을 선택할수 밖에없는 자신에 대해 한탄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쿠빌라이 칸은 그를 직접 설득하기 위해 그를 데려오라 명했죠

 

문천상은 쿠빌라이 칸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않고 당당히 서있었는데

여럿이 달려들어 간신히 그를 무릎 꿇렸고

그 자리에서 문천상은 쿠빌라이 칸을향해

"나라에 충성하다 죽는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더이상 나를 욕보이지 말라"며 외쳤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그의 재능을 아꼈던 쿠빌라이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를 설득했지만

문천상은 정기가(正氣歌) 라는 시를 지어

나라를 향한 자신의 충심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것임을 강하게 표현했죠

 

이 정기가는 명문장으로 제갈량의 출사표와 비견되기도 할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그의 처형을 주저하며 시일을 끌었는데

이후 남송의 잔당들이 문천상을 구출하기 위해 대도를 공격한다고 선언하고

문천상이 살아있음으로해서 여러 크고 작은 반란들이 계속 일어나자

어쩔수없이 처형을 명하게 되었죠

 

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쿠빌라이는

처형 당일까지 혹시 그의 마음이 바뀌면 처형을 하지 말라고도 말했다고하고

안되겠다 싶었는지 처형을 중지하라고 명령했지만

쿠빌라이의 명을 받은 신하가 처형장에 도착했을때

이미 문천상의 처형은 끝나있었습니다

 

그렇게 감옥에 갇힌지 5년만인 1283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처형당할 당시 문천상은 "내가 할일은 이제 다 끝났다" 라고 말했는데

이 말이 바로 사자성어 '오사필의(吾事畢矣)' 입니다

 

그가 자신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죽음으로써 나라에 충성을 바친것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 칭송을 받고 있다고 하죠

 

지금까지 '송말삼걸' 중 한명인 문천상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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