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건국의 특등공신이자 홍타이지의 오른팔
청나라 보급을 책임졌던 홍타이지의 소하 용골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뛰어난 용병술과 계책으로 항우를 죽이고
유방에게 천하를 선물한 한신은 없어서는 안될 정말 큰 역할을 하긴했지만
뒤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있죠
바로 한나라가 세워지고나서 일등공신으로 책봉된 소하 입니다
소하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보급을 담당했었는데요
끊임없이 병사들과 군수물자 그리고 식량을 보내줬던 덕에
마침내 유방이 천하를 통일할수 있었던 것이죠
자칫 잘못했다간 군대의 전멸을 야기할수도 있을만큼 중요한것이 보급이다보니
왠만큼 뛰어난 인물이 아닌 이상 보급은 굉장히 어려운 임무이기도 합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대륙을 평정하는데 있어서
보급과 물자의 확보 등, 그 어려운 일을 해낸
특등공신이라 할수 있는 인물이 청나라에도 한명있는데요
그는 바로 타타라 잉굴다이라는 인물입니다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는 잉굴다이를 두고
"모든 업무에 능하고 명쾌히 처리하여 짐을 매우 기쁘게 한다
나머지 신하들은 그의 일처리 솜씨에 미치지 못한다" 라고
극찬했을 정도였죠
이 인물은 한국에서는 '용골대'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에게
항복을 받아낸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오늘은 이 잉굴다이, 용골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는 만주족의 타타라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가 누르하치에게 귀순하면서 자신도 팔기 중 정백기에 속하게 되었죠
어릴적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용맹했던 용골대는
누르하치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비고 다니다보니
니루이어전까지 빠르게 승진할수 있었습니다
1616년 누르하치를 따라 톄링시를 공격했을때도 참전해
수많은 명나라와 몽골 장수들을 죽여 공을 세웠고
사르후 전투 이후 후금이 패권을 차지하고나서
1621년 묵던 (현재 선양시) 전투때에도 참전해
큰 공을 세워 참장까지 오르게 되었죠
그리고나서도 뛰어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나중에는 '죽을 죄를 지어도 한번은 면제받을수 있는 특권'
까지 받을 정도였습니다
한편 광해군이 조선의 왕이었을때는 중립외교 정책으로
후금과 큰 마찰이 없었지만
1623년 인조반정에 성공해 인조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는
후금과의 관계를 끊어버렸죠
그러자 홍타이지는 명나라를 치기위해서는
배후에 있는 조선을 먼저 손봐놔야겠다 생각하고
정묘호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홍타이지 생각은 1차 고려거란전쟁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오래끌 생각없이 적당히 화친을 맺고 빠져서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렇게 후금은 조선의 성을 하나를 함락시킬때마다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고
결국 양국은 형제국이 되면서 강화를 맺게 됩니다
이때 용골대는 형제의 맹약을 맺기위해 조선에 파견되었죠
그리고 용골대는 이때부터 외교관으로써
뻔질나게 조선과 후금 사이를 왔다갔다하게 됩니다
후금은 당시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양의 물자가 계속해서 필요했는데
이 물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용골대는 조선에 파견되어
양국의 무역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후금에 필요한 식량과 전쟁물자를 공급하는데에도 막대한 기여를 할수 있었죠
뿐만아니라 산해관을 뚫을수 없었던 홍타이지는
위로 빙 돌아가 명나라의 북쪽을 공격한 적이 있는데
이때는 장군으로써 참전한 용골대는
한 성에 머물면서 고작 800명의 병력으로
명나라 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막아내기까지 했고
심지어 반격을 가할수 있었을 정도로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습니다
이후 홍타이지의 신임을 얻게 된 용골대는 호부승정으로 임명되어
청나라의 재정과 물자에 대한일을 하는 중책을 맡게 되는데요
1632년 4월 홍타이지가 내몽골에 차하르 부족을 정벌하러 떠났을때
묵던에서 내몽골까지 무사히 군량을 운송하는 공을 세웠으며
이를 위해 여러번 조선을 드나들며 식량과 무역을 요구하기도 했죠
그렇게 홍타이지로부터 무한 신임을 받게된 용골대는
조선과의 협상에 있어서 전권을 부여 받았고
이후 무역상들을 직접 데리고 조선으로가 무역을 하기도 하고
변경 호시를 열어 후금은 조선에서 대량의 물자를 얻을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후금의 변경 병사들의 식량 문제도 해결되었으며
남는 물자는 몽골에서 말과 교환해
강력한 후금의 기병과 군대가 만들어지는데 큰 기여를 하기까지 했죠
1636년 2월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고
황제의 칭호를 쓰기 시작하는데요
그리고 용골대에게 이제 명나라는 버리고
청나라와 홍타이지를 황제로 섬기라는 서신을 가지고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오라는 명을 내리게 되었죠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주전파가 득세해
'청나라 오랑캐의 사신을 죽이고 서신을 불태워버리자' 라며
청나라를 강하게 배척하려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후 한양에 도착한 용골대는 계속해서 감시를 받았고
무기를 든 병사들이 용골대가 머무는 관사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죠
심지어 인조는 용골대를 만나주지도 않았고
서신도 받지 않은채 청나라 사신단을 개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걸 느낀 용골대는
전체 사신단을 이끌고 말을 훔쳐 도망쳐버렸죠
가는 도중에 평안도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병사들이
용골대의 앞을 막아섰지만 그는 가차없이 이를 뚫고 청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겪은 모든일을 홍타이지에게 보고했고
1636년 12월 마침내 병자호란이 발발하게 되었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급히 몸을 피했지만
얼마안가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용골대는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써 참전해 군사적인 공세를 하면서
정치공세도 함께 펼치며 조선을 압박했고
청나라와 조선 사이를 오가며 협상을 성사시키는데 힘썼죠
그렇게 결국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기로하고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관계를 맺기로 하는데요
최명길은 용골대에게 찾아가
항복의 의식을 치를때 곤룡포를 입게 해줄것과
삼배구고두례 말고 절을 하는것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했지만
용골대는 인조는 죄인이라고 말하며 아무것도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하죠
이후 용골대는 명나라 정벌에 참전하게 됩니다
1641년 8월 명나라의 홍승주가 이끄는 13만명의 대군과 벌인 전투인
송산전투에 참전했던 것이죠
이때 홍타이지도 친히 전선에 나와 직접 지휘를 할정도로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당시 홍타이지는 명나라와 신속하게 결전을 벌이려고 했는데
용골대는 명나라군을 포위한 채 기다렸다가
명군의 식량이 떨어지고 사기도 떨어지면
그때 승부를 보자고 건의했던 것이죠
이에 홍타이지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결국 홍승주의 부장이던 하승덕이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송산전투를 승리로 이끌수 있었습니다
송산전투 이후로 명나라는 다시 대군을 모집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고
그로부터 2년후 이자성의 반란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죠
그리고 홍타이지는 황실에 대한 충성과 공로를 인정해
용골대의 부하 중 100명까지 인삼을 채굴할수 있는 허가를 내렸는데
이는 수많은 공신들 중에서도 허가받은 인원이 두번째로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파격대우를 받았을 만큼 용골대는 홍타이지의 총애를 받았죠
이후 홍타이지가 죽고 권력을 잡은 섭정왕 도르곤도
용골대의 능력을 인정해 계속해서 중요한 임무를 맡겼는데요
이후 용골대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토지를 다시 정비해
농업과 잠업의 발전에 힘썼고
만주족 귀족들이 강제로 한족들을 노비로 삼거나
재산을 빼앗는 등의 행위를 금지시키는 등
한족들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청나라의 통치를 강화하는데
필요한 정책들을 펼쳐나갔죠
그리고 얼마후인 1648년 2월 24일,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여담으로 그가 죽기 2년전인 1646년,
민회빈 강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용골대는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데려와서 키우고 싶다고 인조에게 말했다고 하죠
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있을때 그를 존경하고 호감을 느꼈기 때문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안타까운 마음에 데려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말이 안된다며
용골대에게는 숨은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조는 셋중에 두명은 이미 죽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이 일을 무마시켰다고 하죠
여진족이라는 이미지는 사나운 맹수같은 사람들이며
짐승의 가죽을 덮어쓰고 다니는 오랑캐의 모습이 상상이 되는데요
용골대는 TV나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못되처먹은 청나라 사신인 모습과는 달리
실제로는 굉장히 예의 바른, 젠틀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고 하죠
심양에서 볼모로 지내던 소현세자와 강빈을 청나라 관리들이 개무시 했을때도
용골대는 예의를 갖춰서 소현세자를 대했고
김상헌과 최명길을 심문할때도 그들이 이치에 맞는 옳은 말을 하면
수긍하고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군사, 정치, 외교 모든면에 있어서 굉장한 능력을 보여준
청나라 건국의 일등공신 용골대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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