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지으며 살다가 단 한번의 원정으로
당나라 최고 선봉장이 된 인물 설인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도망친 당나라 황제로 한국에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이 당시 당나라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한명의 무장이 있습니다
당태종이 그를 보자마자 전투에서 승리한것보다
이 인물을 얻은것이 더 기쁘다 할 정도로
그를 총애 했는데
그는 당태종이 죽고나서 당고종때 더욱 많은 활약을 하면서
당고종에게는 더욱 큰 사랑을 받게 되는 인물이죠
이 인물의 이름은 설례 인데
한국에서는 자를 붙여 설인귀로 훨씬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설인귀는 삼국지 여포의 부하였던 설란의 15대손이라고 하죠
그의 아버지가 수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이 몰락해버렸고 이후 설인귀는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자 조상의 묫자리 라도 바꾸면
삶이 더 나아질려나 생각하고 있던 와중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을 위해 병사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온것이었죠
그러자 설인귀의 아내였던 유씨가
"조상들 묘 이장은 나중에 하고 당신은 무예도 출중하니
고구려 원정에 참전해 기회를 잡아라" 라고 말했고
이 말이 맞다고 여긴 설인귀는
그렇게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주필산 전투에서 그야말로 맹활약을 하게 되는데요
고구려의 포위를 뚫고 위험에 빠진 유군앙을 구해냈고
고구려의 장군 고연수 군을 상대할땐
일부러 눈에 띄는 흰옷을 입은뒤 신들린듯 창을 휘둘렀으며
활까지 두개를 가지고 다니면서
선봉에 서서 종횡무진 고구려군 사이를 휘젓고 다닌것이죠
그때 멀리서 흰옷을 입은채 혼자서 고구려군을 몰살시키는 모습을 본 당태종은
전투가 승리로 끝난뒤 그를 불렀고
금백을 하사 한뒤 유격장군으로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태종은 "오늘 승리한것보다 용맹한 장수를 얻은것이 더 기쁘다!!"
라고 말하며 그를 칭찬했죠
부인 유씨의 말대로 설인귀는
이번 고구려 원정으로 두번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를 잡아버린것 이었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전장에서 맹활약을 하게 되는데
그는 혼자 적진을 파고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어버린뒤
말안장에 적장의 수급을 건채 유유히 빠져 나왔다던가
당나라 장수 10여명의 목숨을 빼앗은 고구려의 한 장수를 보고
그대로 달려가 결투끝에 생포해버렸다는 이야기도 있죠
하지만 결국 안시성을 넘지 못하고 당나라군은 퇴각을 하고 마는데
이후 설인귀는 장안 궁성의 북문 수비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당고종이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는데요
그러던 어느날 한밤중에 뒷산에서 일어난 홍수가
황궁을 덮쳐버린 일이 벌어지게 되죠
그러자 궁안에 있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홍수에 놀라 달아나기 바쁠때
설인귀는 "천자께서 위급한데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할까" 라며
문위에 올라가 큰소리로 위험을 알렸고
그렇게 당고종이 잠에서 깨 몸을 피했던 덕에
목숨을 구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당고종은 설인귀를 충신이라며 칭찬했고
설인귀를 총애하기 시작해 그가 저지르는 크고 작은 실책들을
모두 비호해주기 시작했다고 하죠
이후에도 설인귀는 고구려를 다시 침략할때도 종군해 많은 공을 세웠고
거란과의 전투에서는 거란의 왕이던 아복고를 사로잡아
낙양으로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설인귀는 흰 전포를 입고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보니
백포장군이라는 별명이 있기도 했고
방천화극을 잘 썼다고 전해지고 있죠
그리고 그는 활도 굉장히 잘 쐈다고 하는데요
어느날 설인귀는 당고종이 보는앞에서 궁술 시범을 보여준적이 있다고 하죠
그런데 그가 쓰던 활이 어찌나 강궁이었는지
화살이 다섯벌이나 되는 갑옷을 꿰뚫었고
이 모습을 본 당고종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661년, 철륵이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난을 일으켜 당나라를 공격하자
(철륵 : 고대 중앙아시아에 존재하던 돌궐을 제외한 여러 튀르크 계열의 부족들을 통칭)
그는 철륵도행군부총관으로 임명되어 난을 평정하기 위해 출진하게 되었죠
이때 그는 철륵의 선봉장 세명을 단 세발의 화살로 쏘아 죽였고
이후 사기가 떨어진 철륵군에 돌격해 난을 평정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당나라 군중에서는 "장군이 세 화살로 천산을 평정하니 장사들은
노래를 부르며 관문으로 되돌아오네"
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하죠
그러던 666년,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장남 연남생이
동생들에게 쫓겨 당나라로 망명해오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에 당고종은 방동선을 보내 그를 맞아 들였고
이 천금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은 당나라는
5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해왔죠
이때 방동선이 고구려군과 격돌 후 강력한 고구려군의 기세에 눌려
당나라군 사기가 꺾여 버렸는데
설인귀가 2천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군을 향해 돌격해
고구려군을 반으로 갈라놓았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본 당나라군은 다시 사기를 회복해
설인귀를 따라 고구려 군에 돌격했고
놀란 고구려군은 5천여명이나 죽는 대패를 당했다고 하죠
이후 설인귀는 남소성, 목조성, 창암성 등을 점령했으며
약 2년간 고구려와의 사투 끝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설인귀를 도호로 임명해 고구려 영토를 다스리게 했죠
하지만 이후 고구려 부흥군의 거센 저항과
이들을 지원하는 신라의 공격으로 인해
설인귀는 다시 당나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후 670년 티베트에 멸망당한 토욕혼을 부흥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토번을 정벌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때 토번 정벌을 위해 설인귀가 약 10만의 병사들을 이끌고
곽대봉, 아사나도진 등의 장수들과 함께 토번을 공격해 들어갔죠
그리고 대비천에서 토번군을 기습해 승리를 거두었고
토번군이 오해성에 주둔중 이라는 것을 알게된 설인귀는
곽대봉에게 산위에 요새를 만들어 군대보급품 등을 보관하도록 명한뒤
자신은 병력을 이끌고 오해성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그런데 곽대봉이 혼자 후방에 남아있는것이 두려웠는지
설인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보급부대를 이끌고 설인귀의 본대 뒤를 따라 군을 이동시켰던 것이죠
그러다 결국 토번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군량을 포함한 모든 군보급품을
토번군에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설인귀는 어쩔수없이 대비천까지 물러났지만
토번군 명장 가르친링이 이끄는 군대에 포위되어서
10만명의 당나라군은 전멸하다시피 했고
설인귀를 비롯한 당나라 지휘관들도 포로로 붙잡혀 버렸죠
하지만 더이상 당나라를 자극하기엔 부담이 컸던 가르친링은
설인귀를 풀어주었고 그렇게 살아남아 당나라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르친링은 기세를 몰아 4개의 도시를 더 차지해
토번의 영토를 더 늘려버렸죠
그렇게 불패장군이던 설인귀의 명성은 땅으로 곤두박질 치고 말았고
이 패배로 인해 관직을 잃고 서인으로 강등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설인귀는 몰락하나 싶었지만
이듬해인 671년 나당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를 총애하던 당고종에 의해 다시 전장으로 복귀할수 있었죠
이때 설인귀는 신라 문무왕에게
"당나라에 병사를 청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놓고
왜 이제 와서 백제땅을 점거하고 고구려 유민을 지원해
당에 맞서려 드느냐"며 편지를 보내자
문무왕은 "당군이 신라를 도와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뒤에
대동강 이남은 모두 신라의 영토로 인정하기로 해놓고
당군은 백제땅에 머무르며 웅진도독부를 내세워
먼저 신라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느냐"며
당나라의 태도를 지적하는 답서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설인귀는 이후 675년엔 신라의 천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당나라 수군을 이끌고 기벌포를 공격했지만
결국 당나라 수군 4천여명이 죽는 패배를 맛보게 되죠
대비천에 이어 기벌포 전투에서도 대패하자
당고종 조차도 설인귀를 감싸주기 어려웠고
그렇게 그는 유배 생활을 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의 총애 덕분에
그는 다시 복귀할수 있었고
이후로도 여러 전선에서 활약을 하게 되죠
682년에 돌궐이 당나라 북쪽지역을 공격해 오자
이미 69세의 노장이었던 설인귀는 이를 격퇴했는데
이때 설인귀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 돌궐군의 장수는 당군의 총사령관이 설인귀라는 소식을 듣고는
'설인귀는 이미 죽었을텐데 그럴리가 있냐'며 의아해 했다고 하죠
이후 양군이 대치하고 있을때 설인귀가 모습을 드러내자
깜짝 놀란 돌궐군 장수와 돌궐군은 설인귀가 등장한것 만으로 사기가 꺾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당시 당나라와 싸우고 있던 여러 나라에서
설인귀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런 대단한 장수도 나이는 속이지 못했는지
1년후인 683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죽은 이후 좌효위 대장군, 유주 도독의 직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일생을 보면 그야말로 평생 전장에서 살았다고 할수 있겠네요
평생을 당나라군의 선두에서서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며
적군을 두려움에 벌벌 떨게 만들었던 설인귀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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