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의 변 이후 송나라 황후와 공주들이 처해진
비참한 삶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세차례에 걸친 고려거란 전쟁 이후
점점 거란은 쇠퇴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진족이던 완안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를 작살내버렸고
이후 송나라에도 쳐들어가
당시 황제이던 흠종과 전황제 휘종을 사로잡아 버렸죠
이 한족 최대의 치욕 사건을 '정강의 변'이라고 부릅니다
이후 이 흠종과 휘종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데요
그렇게 송나라는 멸망하고 휘종의 9번째 아들이던 조구는
가까스로 남쪽으로 도망쳐 남송을 세웠고
이로인해 송나라는 정강의변 이전의 송나라를 북송
이후의 송나라를 남송으로 부르게 된것이죠
한편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로 잡혀갈때
수많은 황족들과 송나라의 고관대작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까지 모조리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궁녀들과 내시, 무희, 의원들까지 모조리 잡혀갔는데
모두 합쳐 3천여명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하죠
그런데 그 이후부터 여성 포로들은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되는데요
오늘은 북송이 망한 이후 포로로 간 여인들의
비참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조선시대때 계유정난 이후 세조는 자신의 반대파 대신들의 아내와 딸들을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도와줬던 일등공신들에게 모두 포상으로 나누어 주었었죠
금나라 역시 수많은 황족들과 궁녀들, 그리고 송나라 귀족들의 여인들을
금나라 고위층에게 분배 되어져 그들의 성ㄴ리개가 되어버렸습니다
평생을 잘먹고 잘살다가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것인데요
송휘종의 딸인 공주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송휘종의 공주들은 총 21명이 있었는데
모두가 굉장히 비참한 삶을 살게 되죠
21명 중 3명은 금나라로 끌려가다가
고된 여정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8명은 금나라 황족이나 귀족들의 첩이 되어 버리기도 하고
10명은 세의원이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죠
세의원은 금군 병사들이 즐길수 있는 기방이었는데
한마디로 첩으로 들어가지 못한 송나라 공주들은
모두 창기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수많은 송나라 귀족들의 아내와 딸들 역시
세의원의 창기가 되었는데
세의원에서 남자들을 상대할때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여인들은
대부분 송나라에서 포로로 잡혀와 억지로 기생이 된 여인들이었다고 하죠
첩이 된 공주들 역시 창기가 되는것보다는 그나마 나았지만
이는 자신이 원해서 된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 역시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공주이던 가덕제희 조옥반은 이미 결혼을 해서 딸까지 있었지만
정난의 변이 일어나고 자신과 딸까지 모두
금나라로 잡혀가게 되었죠
그리고 금나라 송왕 완안종반의 첩이 되었는데
얼마안가 완안종반이 반역죄로 사형을 당하자
이후 금나라 희종의 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옥반의 딸 역시 완안올실의 아들에게 첩으로 보내졌죠
또한 휘종의 10번째 공주인 유복제희 조현현은
16살의 어린나이로 금나라에 끌려왔는데요
그리고 완안종망의 첩이 되었다가 이후 완안종망이 죽자
세의원에 들어가 창기로 전락하고 말았죠
그런데 더 충격적인 일은
훗날 개천대왕 완안종현은 자신의 부하장수이던 서환과
내기를 하게 되었는데
내기 상품이 바로 유복제희 조현현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서환이 내기에서 이겼고 조현현은 서환의 첩이 되었다고 하죠
이는 자기네들 노는데 송나라 공주들이 제물로 바쳐진 셈이었습니다
또한 21번째 공주인 순복제희 조금령은
정강의 변 당시 나이가 고작 5살밖에 되지 않았었지만
이후 세의원에 들어가 창기 생활을 하게 되는데
훗날 완안설야마의 눈에 들어 그의 첩이 되기도 했죠
그리고 이후 통역관이던 왕성체에게 하사되어
그의 아내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금나라 태종도 송나라의 휘종에게 엄청난 모욕을 하는데요
송나라 공주들을 임신 시킨뒤 아들을 낳은후에
송희종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선물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바로 "너의 딸이 내 아이를 낳았으니
옷 두벌을 선물로 보내주마" 라며 조롱섞인 말을 해댄것이죠
그런데 더 열받는건 송휘종이 한 말인데
송휘종은 금태종에게
"저 같이 쓸모없는 놈과는 달리 제 딸들이 폐하에게 도움이 되니 정말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아이들을 생산하시길 기원합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살기위해서는 어쩔수 없긴 했겠지만
송휘종은 자신의 딸들이 온갖 치욕을 당했는데도
눈하나 깜빡 안했던 반면
자신이 열심히 모으던 서화 컬렉션이
훼손되고 약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는
눈물 흘리며 굉장히 슬퍼했다고 하죠
또한 그는 포로생활에도 나름 풍족하게 살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딸들이 금나라 황족이나 귀족의 첩이 되거나
창기가 된 이후 송휘종에게 계속 돈을 보내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나름 풍족하게 살다가 1135년 오국성이라는곳에서 사망했다고 하죠
그런데 송흠종의 아내인 인회황후 주씨의 삶은 더욱 기구한데요
정강의 변이 일어나고 1년후인 1128년 8월
휘종과 흠종 그리고 정태후와 주황후는 마침내 금나라 회령에 도착을 했는데요
이후 휘종 흠종을 비롯한 정태후와 주태후에게
견양례라는 항복의식을 치르도록 했습니다
이 견양례라는것이 좀 골때리는데
승리자는 충분히 기쁨을 누리고 업적을 과시하게 해주지만
패배자에게는 끝없는 굴욕을 느끼게 해주는것이었죠
바로 사람의 윗옷을 다 벗긴후
양의 생가죽을 뒤집어 쓴채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하던 의식이었고
그것을 여성인 태후와 황후에게도 시켰던 것이죠
그리고 이후 강제로 금나라 옷을 입게했고
금태종은 그녀들을 데리고 가 목욕을 시키라 명령했는데
주황후는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구출되었지만
이후 그녀는 다시 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고 하죠
이 인회황후 주씨의 죽음에 대한 다른 내용의 야사도 전해지고 있는데요
주황후는 포로로 끌려오는 도중에 참을수 없는 치욕을 당하는데
금나라 장수 택리는 술자리에
굉장히 외모가 출중했던 주황후를 부른뒤 노래를 불러보라고 시킨것이죠
그러자 주황후는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중국말을 알아들을수 없었던 금나라 장수들은 더욱 신나하며
그녀에게 다른 노래도 불러보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또 다시 노래를 부를수밖에 없었으며
노래가 끝나자 택리는 주황후를 끌어당기며
술 시중을 들라고까지 하는것이었죠
이에 주황후는 술자리 시중을 들기 싫다며 격렬히 거부를 하자
격분한 택리는 그녀가 기절할때까지 두들겨 패버린 것입니다
이때 흠종이 분노를 참지못하고 화를 내자
택리는 흠종을 죽여버릴려고 했는데
금나라 현령이 "폐하께서는 저놈을 생포해오라 하셨으니
그를 죽이면 장군만 손해입니다" 라고 말해서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고 하죠
그리고 이후 그녀는 치욕과 폭행으로 인해 몸져누웠는데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금나라 군은 송나라의 황후였던 그녀의 시신을
대충 멍석에 둘둘 말아 길가 아무곳에나 묻어버렸다고 합니다
송나라에서 금나라까지 끌려간 3천명의 포로들 중
2천여명이나 되는 수가 풍토병과 추위, 그리고 굶주림으로 인해
도착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데요
전쟁 이후 패전국의 여성들은 정말 치욕적이고
비참한 삶을 사는건 예나 지금이나 어느나라나 다른점이 없는것 같습니다
사탐과탐 다른 포스팅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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