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 무모하고 능력없는 거란 장수 정도가 아닌 문무를 겸비했던 거란 최강의 명장이었던 인물 소배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3차에 걸친 고려와 거란의 전쟁에서 강감찬에 대패해 무기며 갑옷이며 다 버려버린채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친 거란의 장군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다들 잘 알고있는 소배압이죠
그래서 우리나라의 교과서에서 소배압은 굉장히 무능한 적장이 병력만 믿고 무식하게 돌격만 하다가 귀주대첩에서 제대로 박살난 인물 정도로 묘사되어 왔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는 요나라(거란)의 명장 중 한명이었는데요
심지어 정치력도 뛰어났으며 백성들에게는 칭송받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죠
오늘은 이 소배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소배압의 가문은 거란 황실의 외척이었죠
거란의 황실은 특이하게도 황후를 술률씨에서만 배출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황제는 야율씨였고 모든 황후는 술률씨였던 것이죠
거란을 세웠던 야율아보기는 한나라의 황제였던 유방을 굉장히 흠모했는데 자신에게도 소하 같은 명재상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술률씨를 소씨로 개성했고 이후부터 술률씨는 소씨가 된것입니다.
소배압의 정확한 출생연도는 기록이 없어서 알수는 없다고 하는데요
다만 소배압 딸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 딸의 출생연도가 970년으로 기록된것으로 보아 소배압은 950년쯤에 태어났을것으로 추측하고 있죠
또한 그가 <요사>에 등장한 것도 968년으로 어릴적부터 여러 전장에 출진해 많은 공적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또 독특한 점은, 소배압은 자신의 첫째딸을 요성종과 결혼을 시켜서 성종의 장인이 되었는데 성종의 여동생과 소배압이 결혼하면서 성종의 매제가 되기도 했으며 서로 이종사촌간이기도 했던 것이죠
그리고 1차 고려 거란 전쟁때 고려에 쳐들어온 소손녕의 형이 바로 이 소배압 입니다
어쨌든 소배압은 거란에서 굉장한 권력가였으며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을것으로 보이죠
이후 983년 거란의 성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거란은 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요성종은 직접 토벌군을 이끌고 몽골의 조복(케레이트부로 추정)을 공격했는데 이때 소배압도 함께 출전했죠
그리고 소배압은 막대한 전공을 세울수 있었고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기여하면서 이후 성종의 신임도 받기 시작했습니다
거기다가 986년, 북송의 태종은 20만의 대군을 동원해 군대를 세갈래로 나눠 거란을 공격했는데 이때도 소배압은 거란의 명장인 야율사진 야율휴가 등과 함께 출전해 조빈과 미신이 이끄는 북송군과 피튀기는 혈전끝에 승리를 거머쥐며 북송의 북벌을 저지하기도 했죠
이때 쌓은 군공으로 인해 또 진급할수 있었고 이후 수많은 병력을 이끄는 부대장이 되어 여러 지역에 원정을 다니기도 했으며 야율사진과 함께 북송에게 빼앗겼던 산서지역 땅까지 다시 탈환하는 등 요나라 서쪽지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요성종의 신임을 받은 소배압은 이후 송나라 공격의 선봉장으로 남경통군사까지 되었죠
이후 송나라는 거란에 대해 수비적인 모습만을 보여왔고 전장이 고착화 되자 거란은 동쪽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미 예전부터 거란은 동쪽의 여진 부족들을 공격해나가면서 점차 한반도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는데요
당시 고려는 압록강 일대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라 거란이 먼저 압록강 하류에 고려 침략을 위한 군사 기지를 세워버렸죠
이후 요성종은 소배압에게 고려 침략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993년, 마침내 고려에 침략을 개시하게 되었죠
1차 침공때는 소배압의 동생인 소손녕(원래 이름은 항덕이고, 자가 손녕)이 선봉장이되어 봉산전투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 신나게 고려 수도로 진격하다가 안융진 전투에서 고려군에 패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후 서희는 소손녕과 협상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거란은 고려에게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을수 있었고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면서 실리를 얻으며 1차 고려거란 전쟁은 끝이 났죠
이때 소배압도 다시 거란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요성종에게 부역법이나 여러 정치적 의견을 내놓았고 요성종 역시 그의 의견을 많이 받아 들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는 정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으며 외교적인 감각 역시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죠
한편 1차 고려 침공으로 고려가 송과의 교류를 끊고 거란과 사대관계를 맺자 거란은 다시 북송을 침공하기 시작했는데요
소배압 역시 일군을 통솔해 북송에 쳐들어갔는데 당시 남경통군사였던 거란의 명장인 소달름이 정찰중에 화살에 맞아 전사해버리자 소배압은 소달름을 대신해 남면의 행정을 전담하게 되었는데 요사에 따르면 그의 관대한 통치 덕분에 백성들이 그를 칭송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죠
이후 전연의 맹이 체결되고 송나라는 거란에 매년 막대한 금액을 세폐로 보내게 되었고 소배압은 또 이때의 공을 인정받아 북부재상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야말로 소배압은 거칠것 없이 승승장구했던 것이죠
거란은 송과의 형제의 맹약을 맺고나서 다시 고려로 눈을 돌리는데요
거란은 고려에 내어준 강동 6주의 가치가 굉장히 크다는 사실을 알아챘고 다시 고려를 침략해 그곳을 빼앗아 올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고려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나는데 바로 고려 목종의 어머니였던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관계를 맺고 낳은 아들을 목종의 뒤를 잇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이에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천추태후와 김치양 세력을 없애고 목종까지 폐위한뒤 대량원군 왕순을 옹립한일이 벌어진 것이죠
이에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삼아 강조의 죄를 묻는다며 40만 대군을 동원해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하지만 거란의 숨겨진 의도는 고려와 송나라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고 강동 6주를 다시 되찾으려는 목적이었죠
그렇게 1010년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때 소배압은 총사령관이 되어 고려군을 격파해 나갔는데요
마침내 고려의 개경까지 함락시키기는 했지만 고려의 명장 양규는 끊임없이 거란군의 후방을 공격해댔고 빼앗긴 곽주를 다시 재탈환 하면서 거란군의 보급까지 끊어버렸죠
그러자 당시 서경을 공격중이던 소배압과 요성종은 그 소식을 듣고 얼른 개경을 함락시켜 고려왕 현종을 사로잡아버릴 생각에 모든 병력을 이끌고 개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11년 1월에 마침내 개경을 함락시켰지만 이미 고려의 현종은 남쪽으로 몸을 피한 뒤였죠
하지만 거란군은 계속해서 양규, 김숙흥, 보량 등의 공격을 받아 피로도가 극에 달해 있었으며 이미 고려왕은 수만리나 떨어진 곳으로 피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성종은 결국 고려왕의 추격을 포기하고 퇴각을 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렇게 거란군은 큰 피해만 입고 별 소득없이 철군하고 말았죠
비록 패한 전쟁이었지만 소배압은 이때의 전공을 인정받아 난릉군왕에 봉해졌으며 1013년에는 재상직까지 맡았고 3년후에는 동평왕에 봉해지기 까지 했습니다
어릴적부터 전장을 누빈 소배압은 어떤 위기도 없이 승진을 거듭해 마침내 왕의 위치까지 오르게 된것이죠
하지만 고려를 가만히 둘수 없었던 거란군은 또 다시 10만대군을 만들어 고려를 침공하는데 이것이 바로 '3차 고려거란전쟁' 입니다
이때도 소배압은 총사령관이 되어 고려로 침공했는데 이미 70살 정도나 되던 고령이었다고 하죠
2차 침입때 실패한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뛰어난 기동성을 가진 거란군의 기병을 이용해 곧바로 수도 개경까지 신속하게 진격한뒤 고려왕이 도망치기전에 잡아버리고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직도전략을 구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 경험으로 봤을때 고려군을 이끄는 강감찬이 고려의 주력부대는 북쪽에 모두 배치했을것이다 라고 생각해 고려 안쪽은 텅텅 비어있을거라고 생각했죠
이후 흥화진전투에서 고려군에 대패하긴 했지만 소배압은 기세를 잃지 않고 계속해서 개경을 향해 빠르게 진격했습니다
고려군이 기를 쓰고 추격한다고 해도 소배압은 현종만 잡으면 된다는 생각만 했던 것이죠
흥화진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는데도 기세가 줄지 않고 빠르게 남하하자 강감찬 역시 당황하며 김종현에게 1만의 군사를 주고 얼른 거란군을 추격하라 명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군에 연락해 거란군을 정신없도록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으라는 명령을 보냈죠
소배압이 현종을 잡기전에 따라잡기 위해서 필사의 추격전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현종은 2차 침입때 개경이 불타버린 아픈 기억을 바탕으로 또다시 쳐들어온다면 도망치지 않고 항전하겠다는 생각에 과거보다 성문과 성벽 등을 더욱 강하게 보강했던 것이죠
그리고 백성들을 다 개경안으로 불러들인 뒤 적들이 식수와 군량, 그리고 편히 쉴 집을 확보할수 없도록 청야전술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현종이 도망치지 않고 결사항전 하겠다는 뜻을 보이자 고려군 뿐만아니라 백성들까지 감격해 거란군을 무찌르자며 사기가 하늘을 찔렀던 것이죠
그렇게 개경에 도착한 소배압군 앞에 펼쳐진것은 보급도 없고 고려의 별동대가 계속해서 두들겨 대는데다가 심지어 수도 개경의 함락까지 어려워진 것입니다
이에 소배압은 수하장수인 야율호덕을 시켜 개경을 수비하던 고려군에 자신들은 이만 철수한다고 뻥을 치게 했고 자신도 병력을 철수시키는 척 하면서 300여명의 병사를 개경에 잠입시켰죠
이후 개경의 방비가 소홀해지면 척후병에게 성문을 열게하고 그렇게 개경으로 몰려들어가 함락시키려는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안가 이 작전은 고려군에 간파되었고 미리 보낸 300명의 척후병들 역시 고려 기병대에 붙잡혀 죽고말았죠
이에 소배압은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 꼴이 되었는데 처음부터 그냥 개경으로 무작정 달렸기 때문에 보급도 이어지지 않았으며 병사들 말고는 아무것도없이 고려의 영토 한가운데 덩그러니 고립 되어버린것 입니다
1019년 2월, 결국 소배압은 개경 공격을 포기하면서 퇴각하기로 결심했죠
그런데 거란군이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귀주를 거쳐야만 했는데요
그리고 그곳에서 고려의 운명을 둔 마지막 대회전을 벌이게 되죠
소배압은 이 대회전을 예상이라도 한듯 고려군을 보자마자 주저없이 그대로 달려들었고 치열한 혈전끝에 거란군은 참패하고 말았죠
거란군은 겨우 수천명만 도망칠수 있었으며 소배압 역시 갑옷과 무기도 다 버리고 겨우 목숨만 건진채 요나라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십년간 이어온 그의 권세는 하루아침에 날라가버리는데 겨우 목숨만 부지한채 돌아온 소배압을 본 요성종은 격분해 '무슨 낯짝으로 자신을 만나러 왔냐'며 '소배압의 얼굴가죽을 벗겨 죽여버리고 싶다'고 소리쳤죠
하지만 실제로 소배압을 죽이지는 않고 모든 관직을 빼앗아 버리고 근신을 명했습니다
이후 1023년에 소배압은 다시 빈왕에 임명되지만 그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그렇게 평생을 승승장구하던 소배압은 고려와 강감찬에 의해 모든걸 잃어버린채 쓸쓸히 사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배압이 당시 거란의 명장이었던것처럼 요성종 역시 요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끈 요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었는데요
요성종도 그렇고 소배압도 그렇고 둘다 고려외에는 모든곳을 휩쓸고다녔던 그런 대단한 인물들이었던 것이죠
다만 상대가 고려였던 탓에 요성종과 소배압은 고려를 3번이나 침공하고도 오히려 극심한 피해를 입고 물러났던 것입니다
소배압이 고려를 침공할때 총사령관이 아니었다면 그는 평생 명예도 지키며 잘먹고 잘살았을텐데 소배압 입장에서 고려는 철천지 원수일것 같네요
반대로 우리 고려군의 용맹함과 위대함에 국뽕에 차오르는것 같습니다
사탐과탐 다른 포스팅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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