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건들면 확 물어버린다" 라며 자신을 개X끼로 칭했으며 두려움 따윈 개나 줘버리고 거침없었던 독립투사 일본이 두려워한 독립투사 박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할 인물인 박열은 정말 거침없었는데요
일본으로 건너가 '적의 심장부에서 공격을 감행하겠다'라는 생각으로 일본 도쿄로 가 독립 활동을 했던 강심장의 상남자였죠
심지어 박열은 스스로를 개새끼라고 칭하며 니가 나를 건들면 나도 물어버린다는 마음으로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인물입니다
오늘은 독립운동가 박열의 정말 치열하고 파란만장했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박열은 1902년 지금의 경북 문경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요
그의 본명은 박준식이었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다니고 있을때인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이때 박준식은 독립선언서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3.1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적의 심장부에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리고 스스로 이름도 바꿨는데 그때부터 이름을 '맵다, 사납다, 세차다' 라는 뜻의 '열(烈)자'를 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의 성격은 굉장히 불 같았고 마음 먹은 것이 있다면 무조건 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불도저 같은 인물이었죠
고작 18살에 일본으로 건너간 박열은 신문배달을 하면서 학업도 계속 이어나가는 동시에 많은 조직을 만들며 독립운동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의로운 피라는 뜻의 '의혈단', 검은파도 라는 뜻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 여러 동지들과 함께 만든 비밀결사 단체인 '불령사'등을 만들어 반일 독립 활동을 적극적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불령사를 조직할때쯤 그에게는 일본인 연인이 생기는데요
그녀는 바로 가네코 후미코라는 여인이었죠
후미코는 3.1운동 당시 충북 청원군에서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모습을 보고 일본인이 느낄수도 있었던 두려움은 커녕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울림을 받았고 일본군의 무자비한 위협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조선인들을 보고 가슴 속 깊은곳에서는 피가 끓는 감동을 느꼈던 것이죠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온 후미코는 자연스레 조선인들과 가깝게 지내다가 어느날 누군가가 쓴 시를 보게 되는데요
그 시를 보고 첫눈에 그 시인에게 반해버렸던 것입니다
그 시인이 바로 박열이었고 그가 쓴 시는 '개새끼' 라는 시였던 것이죠
개새끼 - 박열 -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이후 둘은 동지이자 연인이 되어 함께 반일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박열은 의열단을 통해서 일본으로 폭탄을 몰래 반입해 폭탄테러를 하려고 준비했지만 일본군의 삼엄한 감시로 인해 결국 실패하고 말았죠
그러던 1923년 9월 1일, 10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사건인 관동 대지진이 발생했는데요
그때 일본에서는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들이 독이 든 만두를 나눠주고 있다' '지진을 이용해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을 공격하고 다닌다' 라는 괴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만들어 무리 지어 다니며 조선인들을 솎아 내기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잡은뒤 "쥬고엔 고쥬센(15원 50전)"이라고 말해보라 했는데 이는 조선인이 하기엔 조금 어려운 발음이었기 때문에 발음이 이상하다 싶으면 가차없이 들고있던 죽창, 몽둥이, 도끼, 갈고리, 일본도 등으로 무참히 살해했던 것이죠
박열은 학살을 피해 기타 잇키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피신할수 있었지만 특별 감시 대상이었던 그는 결국 연인 후미코와 함께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후 박열은 이상한 죄를 뒤집어 쓰기 시작했는데요
박열이 대지진의 혼란을 이용해 일본의 왕세자에게 폭탄을 던져 암살하려 했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뉴스가 보도되었던 것이죠
대지진때 보호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된것이 갑자기 대역죄로 바뀌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취조가 시작되었고 일본검사가 누구에게 폭탄을 던지려 했냐라는 질문에 박열은 예상치못한 대답을 하는데요
바로 "황태자를 죽이려했다" 라고 대답한 것이었죠
심지어 박열은 검사의 물음에도 두려워 하지않고 여유있는 태도를 취하며 조선어로 대답했던 것입니다
어차피 아니라고 해봤자 빠져나갈수 없을거라 생각한 박열은 이렇게 된 김에 이 재판을 항일 독립운동에 이용하자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대역죄를 인정해 버린것이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관동대지진때 수많은 조선인 학살 사건 때문에 일본에는 세계 여러나라에서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고 재판이 시작되면 많은 외신들이 보는 앞에서 일본 제국의 악랄한 모습들을 모두 낱낱이 까발려 주겠다라는 의도였던 것이죠
그런데 취조가 계속되던 와중 박열은 뜬금없이 이상한 부탁을 하는데요
바로 조선에 계신 부모님께 후미코의 얼굴을 보여드리고 싶다며 사진을 한장 찍어달라고 한것이었죠
결국 판사 타테마스 카이세이는 그들을 전향시킬 목적으로 그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고 박열과 후미코는 독특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던 것입니다
이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은 지금도 굉장히 유명한데 누가봐도 현재 목숨을 건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을정도로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고 장난끼 넘치며 여유있는 모습이었죠
그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1년이 지난 1926년 8월부터 조선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는데요
이후 일본 내에서도 말이 많아지자 이 사진을 찍게해준 타테마스 판사는 해임되고 말았고 당시 와카츠키 레이지로 내각의 총사퇴를 부를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박열은 판사에게 4가지 요구조건을 말했는데요
첫번째는 법정에서 조선의 예복을 입겠다는것
두번째는 일본이 조선을 강탈한 행위를 규탄하기 위해 법정에 서는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취지를 재판장에서 먼저 선언할것
세번째는 조선말로 재판을 할것이니 통역관을 배치할것
네번째는 재판관과 나는 동등한 대표 입장이니 재판관과 자리가 같아야 할것
이 네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요구였지만 당시 관동대학살 문제도 있었고 국제사회의 비난을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미개한 조선과는 달리 합법적이고 민주적이라는걸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고 그래서 세번째와 네번째 조건만 빼고 나머지는 들어줄수 밖에 없었죠
그렇게 1926년 2월, 재판이 시작되었고 후미코는 한복을 입고 재판장에 들어섰는데 3.1운동을 연상시키는 흰색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었습니다
또한 박열은 조선 관료의 예복인 사모관대 차림을 하고 부채를 든채 당당하게 재판장으로 들어왔죠
그리고 이후 박열은 조선말로 "일본인들이 신처럼 생각하는 천황은 강도단의 두목이고 약탈회사의 우상이다" 라고 말했으며 후미코는 "나를 박열과 같이 단두대에 세워 줘라 그와 함께 죽을수 있다면 나는 만족한다" 라고 죽음앞에서도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또한 얼마후 열린 마지막 선고 공판때 반성하는 마음이 없는가 라는 판사의 물음에 박열은 "그말은 내가 해야할 말이다. 진정으로 반성해야할 사람은 당신들이다" 라고 했다고 하죠
이후 판사가 사형을 선고하자 박열은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할수 있겠지만 내 정신은 어찌할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후미코는 큰 목소리로 "만세!!" 하고 외쳤다고 하죠
재판 처음부터 끝까지 박열과 후미코는 거침없고 기개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1926년 3월 23일에는 변호사였던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박열과 후미코는 도쿄 우시고메구청에 혼인신고를 제출하여 옥중 결혼도 하게 되었죠
정말 유쾌하기 그지 없는것 같은데요
그렇게 사형만을 기다리고 있던 박열에게 한장의 안내장이 도착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는 감형장이었죠
바로 '일본 정부의 자비와 일본 왕실의 은덕으로 너를 한번 용서해 주겠다' 라는 의미였는데 박열은 그 자리에서 감형장을 찢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밖에서 나온 신문 기사에는 '박열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 웃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후미코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라는 어이없는 기사가 내보내졌죠
그리고 이후 박열과 후미코는 서로 다른 형무소로 옮겨져 생사도 확인할 길이 없었는데 약 4개월 후에 후미코가 죽었다는 소식이 박열에게 전해졌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지만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달려갔을때는 이미 매장도 완료된 상태였죠
그렇게 기개가 넘치던 후미코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건 믿을수 없었지만 이미 사인을 확인할수 없도록 모든 조치를 취해버린 일본이었기에 '일본이 암살한것이다' 라는 설이 있기도 합니다
이후 1945년 8월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고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죠
그리고 박열도 감옥에 갇힌지 22년 2개월만인 1945년 10월 27일에 비로소 석방될수 있었고 그가 석방될 당시 형무소 앞에는 만오천명이나되는 인파가 몰려 박열의 석방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는 석방 이후 재일 동포 단체를 만들기도 했고 장학사업을 벌이기도 했는데 김구의 부탁을 받아 일본에 묻혀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찾아 조국으로 송환을 맡기도 했죠
그가 한국으로 송환한 유해들 중 한분이 바로 윤봉길 의사의 유해였는데요
당시 윤봉길의 유해가 어느 공동묘지에 묻혀있다 라는것까지는 겨우 알아낼수 있었지만 일본인들은 유해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는것을 꺼려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자 열받은 박열은 그러면 공동묘지를 다 파내서라도 찾아내겠다고 하자 결국 유해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낼수 있었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묻혀있는 장소였는데요
그 장소는 다름아닌 쓰레기하치장 계단 바로 앞, 사람들이 항상 지나다니는 길 아래에 묻어버렸던 것이죠
그곳은 봉분도 없이 그냥 평평한 길바닥이었으며 사람들이 그의 유해를 밟고 다니게 하게위해 일부러 그곳에 묻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돌아가시고 14년만에 드디어 조국으로 돌아올수 있었던 것이죠
이후 박열은 1949년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장의숙이라는 여인과 재혼도 했으며 아들과 딸도 낳고 살고 있던 중 또 다시 큰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6.25 전쟁이었습니다
다들 피난길에 올랐지만 박열은 "국민이 모두 서울에 남아 있는데 독립투사인 내가 그 사람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 라고하며 서울에 남았고 아내인 장의숙은 어쩔수없이 어린 남매만 데리고 피난을 떠났죠
이후 박열은 북한군에 의해 강제로 북한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박열 가족은 서로 생사도 확인할수 없이 떨어져 살게 되었죠
박열의 북한에서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으며 훗날 알려진 바로는 북한에서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장을 맡고 있다가 1974년 1월 17일, 71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6.25전쟁 당시 먹고 살길이 어려웠던 아내 장의숙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살게 되었는데 그때 알고 지내던 지인 중 한명이 적십자 일때문에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고 혹시 박열이 살아있다면 전해줄게 있냐고 묻길래 편지 한장을 써서 보냈다고 하죠
그 편지에는 아들의 장래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적어놓았다고 하는데요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박열의 답장이 도착했는데 도착한 답장에는 한장의 사진과 함께 사진 뒤에는 '아들을 나라에 바쳐라'라는 말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으며 이를 본 장의숙은 아들 박영일을 군인으로 만드는것이 나라에 바치는 일이다라고 생각했고 이후 박영일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육군사관에 임관해 준장으로 전역을 했다고 하죠
가끔씩 내가 과거에 태어났다면 독립운동을 할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기 때문에 못했을것 같은데요
박열이 보여준 용기와 기개는 그 누구도 따라하지못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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