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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폭군 간신 탐구

배정자. 일제에 빌붙은 여성 매국노 1호

by 사탐과탐 2021.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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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된 배정자는 일본을 위한 충실한 개가 되는데요.
조선인 여성 매국노 1호 배정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요화, 즉 요망한 꽃이라고 불리던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조선후기에 태어난 조선 사람인데요.

그녀는 '세 번 웃고 세 번 울었다' 라는 말이 있는 인물이죠.

 

민비가 시해당했을때,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때 그리고 고종황제가 돌아가셨을때 웃었다고 하고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을때,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독립했을때 그리고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에 의해 여자 친일 1호로 체포되었을때 울었다고 합니다.

 

조선 사람치고는 울고 웃는 타이밍이 정반대인데요.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였던 '배정자' 입니다.

 

그녀는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 일본인보다 더 일본에 충성하던 인물이었죠.

배정자는 어쩌다 이런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되었을까요?

 

(배정자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배정자의 원래 이름은 '배분남' 입니다.

그녀는 1870년 밀양부의 아전이던 '배지홍'의 딸로 태어났죠.

아버지 배지홍이 민씨 일파를 반대하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에서 멀어지면서 민씨 일파가 권력을 잡자 그 또한 역적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서 처형을 당하며 집안이 몰락해버렸습니다.

 

어머니는 그녀를 데리고 도망쳐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살기 시작했는데요.

1882년 그녀가 12세가 되던 해에 통도사로 들어가 여승이 되었죠.

하지만 승려 수업을 받다가 자신의 체질에 전혀 맞지 않다는걸 느낀 배분남은 결국 1년도 버티지 못하고 절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역적의 딸이었기 때문에 얼마 안 가 체포되어 밀양 관청에 끌려가게 되었죠.

그러나 아버지 배지홍과 친분이 있던 밀양부사 '정병하'는 그녀를 풀어 주며 당시 무역상인으로 위장한 일본인 밀정, '마쓰오'에게 그녀를 소개시켜준 뒤 조선에서는 살기가 힘들 테니 일본으로 몸을 피해 살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일본에 도착한 배분남은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물인 안경수를 만나게 되었죠.

안경수의 도움으로 그녀는 도쿄 소쓰나(尙綱) 여자중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안경수는 역시 일본으로 망명 중이던 김옥균에게 그녀를 소개 시켜주었고 그녀의 총명함을 높게 산 김옥균은 그녀를 정성껏 돌봐주었죠.

그러던 중 그녀는 김옥균의 소개로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게 되었는데요.

배분남의 뛰어난 미모가 마음에 들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그녀를 하녀 겸 양녀로 삼아 자신의 집에서 살게 하고 다야마 사다코(田山貞子) 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죠.

배정자(貞子)라는 이름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배정자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토는 그녀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그녀를 밀정으로 키워 이용하기 위한 교육을 철저히 시킵니다.

17세가 되던 1887년부터 그녀는 승마, 수영, 사격술, 변장술, 매복술 등 첩자 활동에 필요한 여러 훈련들을 했고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사상적으로도 완벽한 세뇌를 받았죠.

 

그렇게 일제의 충견이 된 배정자는 1894년 일제의 밀정 임무를 받아 조선 공사 하야시의 통역관이라는 신분으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고종에게 접근했고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정보를 빼내는 스파이 활동을 시작했죠.

 

그렇게 조선의 기밀정보라든지 고종의 의중 등의 정보를 빼네 일본에 알렸고 을사늑약 체결 등에도 많은 관여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토히로부미의 싸가지 없고 오만방자한 밀서를 그녀가 고종에게 전달한 일이 있는데 이 밀서를 본 고종은 불같이 화내며 그런 불충한 밀서를 건넸다는 죄를 물어 그녀를 부산의 절영도에 유배를 보내버렸죠.

 

그러나 1906년 3월. 이토히로부미가 초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해 오면서 그녀는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다시 밀정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세상이 된 것 마냥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 했죠.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아래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밀정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하며 '흑치마' 라는 별명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오빠인 배국태는 현재로 따지면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으로 승진하기도 했고 동생은 경무 감독관으로 승진할 정도로 엄청난 파워를 자랑했죠.

또한 그녀 역시 일본군 헌병대와, 일본제국 외무부 공무원 등으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나고, 일제가 고종에게 퇴위를 요구할 때도 배정자는 밀정으로써 일제에 많은 정보를 가져다주며 고종을 쫓아내는데 일조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던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죽임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배정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눕게 되었죠.

자신이 그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는 이유도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였기 때문이었고 그렇다 보니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앓아누운 상태에서도 한일병탄 소식을 듣자 누워서 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쳤다고 하죠.

이대로 권력을 잃고 망해버릴 줄 알았던 배정자의 구세주가 된 사람이 있었는데요.

그는 바로 조선 주둔군 헌병사령관 '아카시' 였습니다.

 

아카시는 배정자의 과거 밀정 경력을 높이사 헌병대에 채용을 했고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일본도 시베리아 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하게 되자 그녀 역시 일본군과 함께 그곳으로 떠났죠.

그곳에서 그녀는 포로가 되기도 하고 마적단에 납치되기도 했는데 그런 와중에 마적단 두목과 동거를 하면서 정보를 빼내어 일본군에 넘겨주기도 하는 등 정말 목숨 걸고 일본제국을 위해 밀정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그러던 중 1918년에 하얼빈 주재 일본 총 영사관에서 근무하며 남만주 일대의 조선인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고 만주에서의 독립운동가들 탄압에도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당시 독립신문에는 요녀 배정자가 서간도 각지를 순찰하며 조선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녀는 조선총독부가 만주 지역에 설립한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파괴하기 위한 무장 첩보단체, '보민회'라는 조직에 가입해 독립군 장기정을 잡는데 일조하고 독립군의 무기와 서류 등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또한 간도와 상하이 등지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다가 독립군이 배정자를 처단 대상자로 지목하자 다시 국내로 도망 오게 되었죠.

 

1922년부터는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기치의 지령을 받아 독립투사를 잡아들이는데 그 누구보다 앞장섰으며 그런 그녀의 공로를 인정해 조선총독부에서는 그녀에게 600여 평의 토지를 주었습니다.

그 뒤로도 배정자는 총독부로부터 계속해서 봉급을 받아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죠.

 

그러던 중 배정자는 대한통의부 비밀암살단의 멤버인 박희광에 의해 죽을뻔 하자 1927년에 비로소 은퇴를 했습니다.

은퇴한 후에도 총독부가 주는 돈을 받아먹으며 잘 먹고 잘 살았죠.

하지만 그녀의 악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1940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미 그녀는 70이 넘는 나이였지만 전선에서 대일본제국의 장병들이 고생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며 조선인 여성 100여 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까지 끌고 가 일본군의 성노예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했죠.

그러나 1945년 드디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에 배정자는 야산에 숨어 살다가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발효되고 1949년 반민특위가 구성되자 결국 그녀도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여성 반민족행위자로 총 6명이 구속되었는데 배정자가 이들 중 1등으로 구속되었다고 하죠.

 

(배정자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녀는 체포되고 나서 의외로 쿨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이제 와서 변명해서 뭘 하겠냐, 나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 다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게 소원이다."

라고 진술했다고 하죠.

 

그러나 반민특위가 정치적인 이유로 해산하면서 배정자는 풀려났고 서울 성북구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2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죠.

어릴 적부터 이토 히로부미에게 교육을 받고 이후로 일제를 위해서만 삶을 살았던 조선인 배정자는 할머니가 된 70세 이후까지도 평생을 일본을 위해서 그 한 몸 다 바친 것 같네요.

 

심지어 정치적인 이유로 반민특위가 해산된 것 역시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독립을 위해 힘쓰신 독립투사들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이런 민족반역자들 역시 잊지 말아야 하는 우리 역사의 한 조각인듯 싶네요.

 

일본에 의해 길러진 조선인 밀정 다야마 사다코, 배정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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