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악녀 폭군 간신 탐구

충혜왕. 연산군 뺨 후려갈기는 고려시대 개막장 역대급 찐 폭군

by 사탐과탐 2021. 9. 9.
반응형
조선시대에 연산군이 있었으면 고려시대엔 찐 폭군 충혜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상대까지 건드렸다가 결국 자신의 명줄을 줄이는 계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죠.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폭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당연히 누구나 조선시대 연산군이 생각나실 텐데요.

그보다 앞서 고려시대에 희대의 개막장 사이코패스 폭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고려 28대 왕 충혜왕인데요.

 

충혜왕은 아버지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동생이 바로 그 유명한 공민왕이었죠.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똘끼를 보여주는데요.

세자 시절에 절 지붕 위에 있는 새를 잡는다고 절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 버리거나 동네 양아치들과 어울려 다니며 예쁜 여자가 보이면 시도 때도 없이 겁탈을 하기도 했고 술독에만 빠져 살면서 온갖 쓰레기 짓을 하며 살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오죽하면 아버지인 충숙왕이 "너는 어째 망나니 같은 행실만 하고 다니느냐!!" 라며 혼을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망나니 행적은 그치질 않았죠.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인 충숙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다음 왕이 되었는데요.

이때부터는 자신에게 뭐라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니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술과 여자 그리고 파티에만 온 정신을 쏟았습니다.

 

심지어 업무시간에 내시들과 씨름판을 벌이기도 하고 사냥왕이라 불렸을 정도로 자주 사냥을 하기도 했는데요.

거의 매달 1~3번씩은 사냥을 다녔을 정도였죠.

당시엔 왕이 사냥을 한번 갈라치면 호위병, 신하들, 병사들, 짐꾼, 경비병, 전문 사냥꾼, 몰이꾼 등과 이 모든 사람들의 식사를 만들어야 하는 요리사를 포함해 최소 수백 명에서 많게는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번에 움직여야 하는 큰 행사였고 그만큼 엄청난 돈이 들었었죠.

왕이 사냥을 자주 나갔다는 것은 그만큼 낭비가 심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그의 최대 문제는 바로 '여자는 신하의 아내이든 아버지의 아내이든 예쁘면 다 내꺼' 라는 식으로 심하게 여자를 밝혔다는 점이었죠.

그 누구든 그의 타깃이 되었는데요.

예쁜 여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즉시 그곳으로 직접 가서 겁탈을 했을 정도였죠.

또한 장사꾼의 딸이 예뻐서 그녀를 취하고 그 장사꾼은 대호군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충혜왕은 그의 장인의 첩, 아버지의 후궁, 신하의 아내, 유부녀, 처녀 등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끝 모를 성욕의 피해자가 되었죠.

또한 호화로운 궁궐을 지었는데 궁이 완성되기 전에 신하들에게 용모가 예쁜 여종을 두 명씩 바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여자가 선발되어 충혜왕 앞으로 끌려왔는데 그 둘이 눈물을 흘리자 분노한 그는 그 둘을 철퇴로 때려 죽이기까지 할 정도로 사악한 폭군이었죠.

충혜왕은 남의 부인이나 첩이 예쁘다는 소문이 있으면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조리 후궁으로 들이다 보니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는 역대급 개막장 폭군이었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충혜왕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여자를 건드리게 됩니다.

그 여인은 바로 아버지 충숙왕의 부인이자 자신의 새엄마이던 경화공주 였죠.

그녀는 바로 원나라의 공주였는데요.

 

그는 어느 날 경화공주를 위해 잔치를 열었습니다.

충혜왕이 열어준 연회에서 잘 먹고 잘 놀았던 경화공주는 답례로 충혜왕을 초대해 잔치를 열게 되었죠.

문제는 여기서 벌어지는데요.

시간이 지나 연회가 끝나자 충혜왕은 취한척하며 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충혜왕은 경화공주의 침실로 들어가 그녀를 겁탈하려고 했는데 경화공주가 맹렬히 저항을 하자 부하들을 시켜 그녀의 팔다리를 묶고 그녀를 겁탈해버린 것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일을 당한 경화공주는 원통해하며 원나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충혜왕의 계속된 방해에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원나라에서 온 두린이라는 사신이 경화공주를 알현하면서 충혜왕의 모든 악행이 들통나버린 것이었죠.

그렇게 사신 두린은 충혜왕을 원나라로 잡아갔고 그는 원나라의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명줄은 더 길게 이어져 있었는지 그를 고발한 환관이 실각하자 다시 충혜왕은 고려의 왕으로 복위하게 되었죠.

그러나 복위하자마자 또 백성들을 괴롭히고 술과 여자에만 빠져살며 온갖 호화로운 궁을 짓기도 하는 등 지독한 폭정을 일삼자 환관이던 고용보가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에게 일러바치게 되고 기철은 원나라 황제에게 모든 것을 고하자 그렇게 충혜왕은 또다시 원나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 한 점은 기철과 고용보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간신배들이지만 그들이 충혜왕을 고발했을 정도면 충혜왕은 쓰레기 간신배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개막장이었다는 것이죠.

아무튼 그는 자신을 시종 드는 사람 한 명 없이 자신의 짐을 직접 들고 먼 원나라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압송되는 도중에 옛 신하이던 고려의 관리에게 춥다며 이불을 좀 달라고 했는데 폐위된 주제에 자기의 잘못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이불을 달라고 하냐며 자신의 신하이던 자에게도 욕을 먹는 굴욕을 당하기까지 하죠.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그는 원나라에 도착을 하게 되고 원나라 황제 혜종은 충혜왕에게

그대의 죄는 너무 커서 그대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들에게 먹여도 부족하지만 짐은 살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하노라.

 

라고 말했고 그렇게 충혜왕은 원나라의 게양현으로 귀양을 가는 도중 3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죠.

 

(충혜왕 상상 어진)

그런데 그가 죽을 만큼 쇠약해 지지는 않았었는데 급사를 한 것을 보면 원나라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긴 합니다.

어쨌든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고려에 닿게 되자 백성들은 기쁨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고 하죠.

 

훗날 그의 유해는 고려로 송환되어 영릉에 안장 되었는데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당도하자 그에게 겁탈당했던 경화공주도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도착한 날이 정확하지 않아서 경화공주가 원수였던 충혜왕이 죽은 꼴을 보고 나서 눈을 감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죠.

 

어쨌든 충혜왕이 역대급 폭군이었던 만큼 죽을 때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 같네요.

 

연산군을 능가하는 한반도 최악의 폭군 고려 충혜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