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는 서태후, 여태후와 함께 중국 3대 악녀이자 당나라를 없애고 주나라를 세운 최초의 여황제 이기도 합니다.
황제가 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긴 했지만 백성들은 잘먹고 잘 살았다고 하는데요.
그녀는 과연 악녀일까요? 성군일까요?
중국에서는 수많은 황제가 있었지만 여자의 몸으로 황제가 된 인물은 오늘 소개할 이 인물이 최초이자 마지막 입니다.
그녀는 바로 당나라의 측천무후 인데요.
사실 측천무후 이전에도 중국에서는 여황제가 된 원고랑이나 진석진도 있었지만 원고랑의 제위기간은 단 1일 그리고 진석진은 1개월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최초의 여황제들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죠.
하지만 그들도 여황제로 인정하고 측천무후를 두번째나 세번째 여황제라고 하는 의견도 많습니다.
또한 이후 역사가들은 유교적인 관점으로 측천무후를 보다보니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이유로 인해 황제로 인정하지 못한다고 하는 등 참 논란거리가 많은 여황제 이기도 하죠.
그런데 30살에 황후가 되고 죽을때까지 무려 50여년동안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여성인 만큼 중국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여걸이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별다른 이견이 없을 정도 입니다.
그는 황제가 되기까지 정말 드라마틱한 일이 많이 벌어졌는데요.
과연 여황제 무측천, 측천무후는 어떻게 여성의 몸으로 황제의 위치까지 오를수 있었을까요?
그녀의 이름은 무조로 그녀의 아버지는 무사확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목재상이었는데요 수양제가 대규모 토목공사를 할때 엄청난 부자가 되었죠.
무사확과 양씨의 세 딸중 둘째가 '무조' 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무사확이 죽고난 후 가세가 기울어 그녀가 어릴적에는 굉장히 빈곤한 삶을 살게 되었죠.
636년, 당태종의 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무조가 예쁘다는 소문을 들은 당태종은 그녀를 궁으로 불러 들였고 당태종은 무조를 보고 '무미랑'이라는 칭호를 내렸습니다.
무조의 집안이 빈곤하다보니 그녀는 황제의 후궁 중에서 비교적 낮은 지위인 정5품 재인에 봉해졌고 다른 후궁들에게 핍박을 받으며 쉽지않은 궁중생활이 이어졌죠.
그렇게 힘든 생활을 보내던 어느날, 당태종이 병에걸려 앓아눕자 그녀는 당태종의 병간호를 하게 되었는데요.
그때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녀는 그남자에게 첫눈에 반하게 됩니다.
그는 바로 당태종의 아들 '이치' 였죠.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당태종의 후궁이었기 때문에 다른남자를 연모하는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수는 없었죠.
그러던 649년 7월. 당태종이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치는 황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습니다.
당시 황제가 죽으면 그의 후궁들은 비구니가 되어야 한다는 황실 법도에 따라 무조 역시 머리를 깎고 천조라는 법명으로 감업사에 들어가게 되었죠.
그렇게 감업사에서 비구니로 살던 어느날. 고종인 이치가 감업사에 들르게 되었는데요.
이때 이치와 무조는 또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예전에 당태종을 간호하던 무조를 보고 고종 역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던 것이었죠.
그렇게 그는 곧바로 무조를 궁으로 데려와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무조는 후궁이 되자 황후였던 왕씨의 비위를 잘 맞춰주고 바짝 엎드려 지내며 지극정성으로 모셨는데요.
이에 황후 왕씨 역시 무조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복종한다고 여기게 되었죠.
당시 고종이 가장 총애하던 후궁은 바로 소숙비 였는데요.
황후 왕씨는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던 소숙비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후 왕씨는 소숙비에게서 고종을 떼어놓기 위해 무조를 이용했고 결국 둘은 힘을 합쳐 소숙비를 폐출시키는데 성공하게 되었죠.
소숙비는 죽기전에 무조에게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고양이로 태어나겠다.
그래서 쥐로 다시 태어난 너를 물어 죽여주마!" 라는 저주의말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조가 살아있을때는 궁에서 고양이를 키우지 않았다고 하죠.
아무튼 그녀는 비가 되었고 654년에는 첫딸 안정공주 까지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황후 왕씨는 무조의 처소를 찾아 안정공주를 보고 돌아갔는데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이었던 안정공주를 목졸라 죽이고 황후가 죽였다고 모함했죠.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격노하며 황후를 내쫓아버렸고 그렇게 그녀는 황후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14살에 궁에 들어온 그녀는 16년만에 황후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것이죠.
정치적으로 큰 힘을 쓰지 못하던 고종은 무황후에게 많이 의존을 했는데요.
당시 최고의 권력가이던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 등과 정치적 대결을 벌여 모두 죽이거나 귀양보내며 그녀의 정치적 역량을 모두에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황태자였던 이충에게 여러 죄를 뒤집어 씌워 폐위시켜버렸고 그리고 황태자 자리에 자신의 아들이던 이홍을 앉혔죠.
하지만 아들 이홍은 황태자가 되자 소숙비의 딸이었던 의양공주와 선성공주를 시집 보내려 한것이 무황후의 심기를 건드렸고 675년 이홍은 식사를 하는 도중 독살 당해 세상을 떠났죠.
이후 이현이 황태자에 책봉되었지만 이현은 고종과 무황후의 언니이던 한국부인 사이의 불륜에 의해 태어난 아들이었고 결국 여색을 너무 밝힌다는 모함을 받아 황태자 자리에서 끌려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형들인 이홍, 이현과 달리 유약하고 자신의 말을 잘 따르던 이현을 새로운 황태자로 삼았죠.
그로부터 3년후인 683년, 고종 이치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황태자 이현은 황제에 오르며 중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황태후가 되었죠.
그런데 중중이 아내 위황후의 아버지를 시중으로 삼으려고 하자 신하들이 극구 반대하며 나섰는데 이에 중종은 홧김에 "내가 황제인데 내가 내맘대로 황제 자리를 준다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라는 희대의 개소리를 해버렸고 이에 황태후 무조는 멍청한 아들이 나라를 통째로 위씨에게 갖다 바치겠다고 하며 이현을 여릉왕으로 강등시켜버리고 막내아들 이단을 황제로 올렸는데 그가 바로 예종이었죠.
이때부터 황태후 무조는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모든 국가의 대소사를 직접 관장했는데요.
하지만 이에대한 대신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고 684년 9월에는 서경업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황태후 무조는 40일만에 모든 반란을 평정해버리며 이 반란에 동조했던 모든 대신들을 처형시켰고 정부 주요 요직에 자신의 사람들을 채워 넣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자신의 반대파 마저 싹다 숙청을 하자 드디어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없어진것이죠.
그러자 조정 대신들은 황태후 무조의 황제 즉위를 계속해서 예종에게 주청했고 이에 엄청난 압박을 느낀 예종도 스스로 제위를 어머니 무조에게 넘기며 황태후 무조는 690년 황위를 넘겨받아 67세의 나이로 최초의 여황제가 되었죠.
그녀는 황제가 되고 국호를 '주(周)'로 고쳤으며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시대를 무주시대라고 부르기도 했고 그녀가 세운 국호인 주를, 서주, 동주와 구분하기 위해서 그녀의 성을 따 '무주(武周)' 라고도 불렀죠.
그녀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혹독하고 무자비한 관리들을 동원해 당나라 황실 종친과 대신들을 대거 숙청해버렸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세력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많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황제에 지위에 올랐지만 정치적 역량은 대단한 인물이었는데요.
국법을 엄격히 해 사회 안정을 이루어 나갔고 과거제도를 개편하여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두루 등용을 했으며 부정하거나 부패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거나 심지어 사형을 내리기도 했죠.
그러다보니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당태종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갈 정도로 태평성대 였고 백성들은 배부르고 등따시며 생활은 풍족했습니다.
그렇다보니 50여년동안 당나라에서 민란이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죠.
이정도로 정치적 능력이 뛰어나다보니 일부 역사가들은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武周之治)'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노쇠해진 측천무후는 여릉왕으로 강등되어 있던 이현을 다시 태자로 책봉했죠.
그러던 705년 어느날, 측천무후는 병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요.
재상이던 장간지가 군사를 이끌고 측천무후에게 찾아가 당나라의 복원을 요청했고 노쇠해진 측천무후가 이를 승락하자 당나라 황실은 15년만에 다시 복권 되었죠.
그리고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로 즉위하였고 측천무후는 최초의 여성 태상황이 되었습니다.
그해 11월 중종 이현과 예종 이단, 그리고 막내딸이던 태평공주 등을 불러 무씨 일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자신이 죽으면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고 했으며 자신의 묘비에는 아무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82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죠.
훗날 역사가들 사이에서 측천무후는 여성으로써 황제보다 더 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당나라 황위를 찬탈하였고 자신의 일족을 조정에 등용해 정치를 좌지우지 한것에 대해서 혹평하는 부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 그녀가 나라를 통치하던 시기에 농민 반란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백성들의 생활도 풍족했으며 그녀의 인재 등용 능력과 정치적 능력은 측천무후에 대해 혹평해 마지않았던 역사가들도 인정하는 것으로 많은 역사가들은 측천무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하죠.
하지만 자신이 황후가 되고 황제가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올라갔던것 만큼 중국 3대 악녀로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역대 황제들이 황제가 될때까지 피의 숙청을 거치고 그 자리까지 올라간걸 보면 그녀의 행동은 그렇게 비난할수만은 없는것 같습니다.
측천무후는 권력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악녀 였을까요?
백성들을 잘먹고 잘살게 만들어준 성군이었을까요?
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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