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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폭군 간신 탐구

기황후. 원나라에 공녀로 팔려가 오직 자신의 힘으로 황후 자리에 오른 고려 여인

by 사탐과탐 2021.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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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는 고려 말 원나라에 공녀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정치 공작을 펼치며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말단 궁녀에서 황후의 자리에 오른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고국인 고려에는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었는데요...

 

 

예전에 공녀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 시켜드린적이 있는데요.

고려시대 때 원나라에서는 고려에 해마다 공녀를 요구했었습니다.

고려 말 학자인 이색은 "공녀로 뽑힌 여자는 끌려가기가 싫어서 우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목을 메 죽는 여인도 있었다" 라고 말할 정도로 모든 여성이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싫어했었죠.

 

그런데 오늘 이야기 할 인물이 공녀로 차출된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고려의 공녀로 차출되어 원나라로 끌려갔다가 원나라의 황후가 되었고 황제보다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던 '기황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황후의 고려식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요.

현재 전해지는 이름은 몽골식 이름인 '기 설렁거 올제이 후투그' 이죠.

 

(드라마 기황후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녀는 행주기씨로 기자오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기씨는 총명했고 성품도 침착했으며 심기가 곧은 여성이었죠.

그러다 그녀가 19세가 된 1333년 공녀로 차출이 되었는데요.

보통의 여성이 공녀로 차출이 되었으면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텐데 기씨는 달랐죠.

오히려 그녀는 침착했고 걱정하는 마음에 슬퍼하는 부모님을 위로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이왕 공녀로 뽑힌 이상 이것을 발판으로 삼아 원나라로 가서 더 많은 기회를 잡아야겠다고 판단했죠.

 

이때부터 이미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원나라 수도 대도의 황궁에 도착한 그녀는 고려인 출신의 환관 고용보를 만나게 되죠.

고용보는 공녀로 온 기씨와 대화를 해보니 말도 잘하고 학식도 갖추어져 있었으며 얼굴까지 이쁘다 보니 기씨 정도면 혜종을 마음대로 주무릴수 있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기씨를 앞세워 권력을 잡아볼 생각을 갖고 그녀를 적극 추천하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혜종의 차와 다과를 담당하는 시녀로 만드는데 성공했죠.

 

(드라마 기황후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원나라의 혜종은 황실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해 고려에 있던 섬인 대청도로 유배를 온 적이 있는데요.

그때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던 기억 덕분인지 고려 공녀로 온 기씨에게 호감을 가지며 홀딱 반하게 되어 즉시 후궁으로 삼았죠.

그 이후부터 기씨는 혜종에게 총애를 받게 되자 혜종의 제1황후인 다나시리의 심한 시기와 질투도 동시에 받게 되는데요.

 

다나시리는 기씨에게 채찍질을 가해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기도 했고 인두로 몸을 지질 정도로 그녀에게 온갖 학대를 가했습니다.

하지만 기씨는 전혀 기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혜종의 총애를 기회로 삼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생각이 강해졌죠.

그녀는 원나라 혜종을 등에 업고 다나시리와 맞붙게 되었는데요.

 

다나시리의 친정에 불만이 있던 혜종은 다나시리의 남매였던 텡기스와 다르카이 일파가 혜종을 폐위시키려고 반란을 일으키다 진압되어 집안 전체가 멸문을 당하게 되면서 제1황후였던 다나시리 역시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폐위되었죠.

그리고 다나시리 또한 유배를 가는 도중에 승상이었던 바얀에 의해 독살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제1황후 자리가 비게 되자 원혜종은 기씨를 제1황후로 삼으려 했지만 승상이던 바얀이 '몽골족이 아닌 여성을 제1황후로 삼을 수 없다' 라며 강하게 반대하자 결국 혜종은 뜻을 꺾어 바얀 후투그가 제1황후가 되었죠.

 

그러나 1338년에 기씨는 혜종의 아들이던 '아유시리다라'를 출산하면서 자신이 제1황후가 되지 못하게 반대했던 바얀이 그의 심복들과 함께 자신을 무고하고 괴롭힌다며 혜종을 찾아가 울고 불며 하소연하자 혜종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사라판과 뜻을 맞춰 바얀을 조정에서 내쫓아버리는데 성공합니다.

 

(드라마 기황후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나서 혜종은 기씨를 제2황후로 책봉하게 되었죠.

혜종의 아들을 낳고 제2황후까지 되었지만 기황후에게는 자신을 뒷받침해 줄 정치세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정치세력을 만들지 하고 고민하던 그때 때마침 혜종이 태황태후 부다시리를 폐위하고 추방하면서 부다시리가 관리하던 휘정원(徽政院)을 기황후에게 맡기게 되었죠.

 

휘정원은 황후의 직속 기관으로 원래는 황후의 토지, 재물 등의 재산을 관리했던 기관이었지만 황후들의 권력이 커지면서 황후가 중앙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준 기관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기황후는 휘정원을 맡은 것이 하늘이 내린 기회라 여겨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했고 고려 출신의 최측근이던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아 황실의 재정과 재산을 장악했죠.

 

또한 자정원에서는 고려 출신의 환관과 고려인 유학생들과 고려 유민들을 등용하고 자신을 추종하는 몽골 출신 고위 관리들도 가담시켜 자정원당 이라는 자신만의 강력한 정치적 친위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기황후는 독특한 행동을 하며 원나라 황실 친족들에게 환심을 사는데요.

어쩌다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칭기즈칸을 모신 태묘에 음식을 바치고 난 후에 자신이 먹는 모습을 황실 친족들에게 보이며 원나라의 황실도 서서히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라마 기황후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게다가 혜종을 압박해 자신이 낳은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도록 했고 역시 고려 출신의 권씨와 김씨를 황태자비로 삼았습니다.

또한 고용보가 추천한 고려 출신의 환관 박불화를 군사 책임자인 동지추밀원사로 삼으며 군권 또한 장악하게 되면서 기황후가 원나라의 최고의 권력가로 우뚝 서게 되었죠.

기황후가 원나라에서 매우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자 고려에도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요.

 

기황후는 과도한 권력욕에 매관매직을 일삼았으며 고려에 요구하는 공물의 양을 오히려 더 늘렸습니다.

그리고 당시 원나라의 높은 관리들은 고려 여자들을 아내나 첩으로 삼는 것이 유행이었기에 고려의 미인을 거느려야 명가(名家)라고 했을 정도였죠.

이에 기황후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려 공녀들을 권력자들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기황후의 오빠이던 기철은 원나라의 관직도 받는 동시에 고려의 정승으로도 임명되었습니다.

거기다가 기철은 덕성부원군, 동생 기원은 덕양군에 봉해졌죠.

또한 기황후는 고려의 정치에 많은 간섭을 하면서 기씨 가문의 잇속만을 챙기기 시작했는데요.

여동생 덕분에 권력을 쥐게 된 기철과 형제들은 날이 갈수록 교만해지고 포악해졌으며 권력 남용에다가 백성들의 토지를 무단으로 빼앗는 등의 횡포를 일삼았습니다.

 

(드라마 신의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원나라에 요청해 '폐위되어 마땅했던 왕'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충혜왕을 폐위시키기도 했고 친척들과 측근들을 고려 요직에 앉혀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했죠.

어느 날 원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기철을 요양성 평장으로 임명을 했는데요.

이에 기고만장해진 기철은 공민왕에게 시를 지을 때도 자신을 신하라고 칭하지도 않았고 공민왕이 죄를 지은 누군가를 벌하려고 할 때 기철이 말려 처벌이 멈춘 적도 있었으며 공민왕과 거의 동등한 위치에 있는 듯 행동했습니다.

 

그러던 1356년 3월. 누군가가 공민왕에게 기철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밀서를 보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죠.

기철은 각지에서 무기를 모으면서 반란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결국 공민왕의 기습으로 죽고 말았고 그렇게 기씨 가문은 멸문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기씨가문의 멸족 소식을 들은 기황후는 격분하며 혜종을 찾아가 공민왕에게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했죠.

이에 혜종은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했지만 원나라가 예전 같지 않고 맛탱이가 간걸 느낀 공민왕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기황후는 원나라 군사 1만을 동원해 고려를 침공했지만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대패하여 물러가게 되었죠.

 

그만큼 원나라는 힘을 많이 잃고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요.

원나라에서는 승상이던 메르키트 바얀이 실각하고 난 뒤 잠깐 평화가 도래하는듯 했지만 혜종이 사치와 향락에 빠지며 이곳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1358년에는 북경에 대기근이 들어 엄청난 아사자가 발생했을 만큼 원나라는 큰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이에 기황후는 죽을 쒀 백성들에게 나눠주라는 명을 내렸고 자정원에서는 십여 만 명의 아사자의 장례를 치뤄주기도 했죠.

 

시간이 지나 1365년 9월 제1황후였던 바얀 후투그가 사망하며 신하들은 혜종에게 기황후를 제1황후로 책봉하라고 청하였지만 그동안 기황후에게 많이 실망을 한 혜종은 그녀를 제1황후로 책봉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죠.

이에 기황후는 자정원의 이름을 숭정원으로 바꾸고 바얀 후투그가 관리했던 중정원을 숭정원에 흡수해 더욱 세력을 키웠고 혜종을 또다시 압박하니 결국 혜종은 압박에 못 이겨 1365년 12월 기황후를 제1황후로 책봉했습니다.

 

(드라마 기황후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는 몽골족이 아닌 여자가 제1황후가 된 첫 사례였죠.

제1황후였던 바얀 후투그는 매우 어진 성격에 검소하고 예의가 바르던 인물이었는데요.

기황후는 바얀 후투그가 입었던 남루한 옷을 보고는 "제1황후가 어찌 이런 거지 같은 옷을 입었단 말인가" 라면서 크게 웃었다고 하죠.

 

하지만 이미 국운이 쇠한 원나라는 주원장의 25만 명나라 대군이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를 쳐들어 왔을 때 막지 못하고 결국 응창부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때 기황후는 어이없게도 고려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 것에 대해 매우 분노했다고 하죠.

그리고 응창부 조차 명나라군에게 위협을 받기 시작하자 결국에는 원나라의 예전 수도였던 카라코룸으로 또다시 천도를 했는데 혜종은 결국 1370년 5월, 병에 걸려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이후 아들이었던 아유시리다라가 황제로 즉위했는데요.

그 이후로 기황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기황후는 고려 땅에서 장사를 지내달라는 유언을 남겼는데요.

그녀가 죽고 난 후 시신은 고려로 옮겨져와 경기도 연천에 안장되었다고 하죠.

그러나 그녀의 시신이 언제 고려로 운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드라마 기황후, 신의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기황후는 고려 출신이었지만 고려에 엄청난 해만 끼쳤을 뿐 이득을 준 것은 조금도 없었죠.

기황후 입장에서 고려는 자신을 공녀로 팔아버린 쓰레기 같은 나라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기철, 기원의 무지막지한 횡포와 고려의 친원 세력들의 배후이자 중심인물이 되었기에 우리나라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기황후가 모델이되어 원나라의 높은 관직의 관리들은 고려의 여자를 아내나 첩으로 삼는 것이 유행이 되었을 정도였고 그러다보니 기황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려고 박불화를 시켜 고려에서 공녀를 계속 데려오라고 독촉해 권력자들에게 뇌물로 바쳤다고 하죠.

나중에는 고려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을 데려와 길러 권세가들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원나라에서는 크게 욕을 많이 먹지 않았다고 하지만 고려에서는 쌍욕을 먹을만 하긴 한 것 같네요.

고려에서 태어나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 결국에는 원나라와 고려를 뒤흔드는 권력자가 된 기황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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