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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폭군 간신 탐구

서태후. 권력 욕구와 사치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했던 악녀의 화신

by 사탐과탐 2021.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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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기울어져가던 청나라를 더 빨리 멸망에 이르게 만들었던 서태후 그녀는 역대 폭군들 못지않게 나쁜 짓은 빠짐없이 다했는데요.
욕망과 탐욕의 화신 서태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청나라의 말의 최악의 악녀, 서태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4명의 황제를 거치며 황제보다 훨씬 더 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온갖 사악한 짓을 일삼던 여자였는데요.

그녀는 그 긴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던 것일까요?

 

청나라 말기, 그녀는 정부 관리의 딸로 태어나 유복한 삶을 살다가 가문이 쫄딱 망하며 17세에 궁녀로 입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문이 망하기 전에 서태후에게는 '영록' 이라는 애인도 있었지만 가문이 몰락한 이후로는 사치스럽고 권력욕이 강했던 그녀는 지독한 가난이 너무나도 싫어 스스로 입궁하게 된 것이죠.

 

궁녀로서의 삶을 살던 어느 날.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꾀꼬리 같은 노랫소리에 이끌린 함풍제의 눈에 띄게 되어 의귀비라는 직첩을 받으며 황제의 후궁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까지 낳아버리며 신분이 갑자기 수직 상승해 버렸죠.

그 후 1861년 함풍제가 사망하면서 그녀의 아들이 6세의 나이로 황제인 동치제로 즉위하자 함풍제의 황후였던 동태후와 같이 섭정을 하면서 권력을 잡았습니다.

 

(서태후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시간이 지나 동치제가 친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어머니 서태후로부터 권력을 가져오려 했지만 한번 손아귀에 잡은 권력을 다시 놓고 싶지 않았던 서태후는 정치에서 동치제를 철저히 배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야사에 의하면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환관에게 밀명을 내려 환관들이 동치제를 매춘굴로 계속 데리고 가서 흥청망청 놀도록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죠.

 

정치에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동치제는 홍등가나 매춘굴을 찾아다니고 향락과 주색에 빠져버려 결국 매독에 걸려 19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택동의 주치의 였던 '리즈수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자서전에 밝힌 내용인데요.

리즈수이의 조상이 동치제를 모셨던 황실의 어의 였는데 동치제가 매춘부들과 잠자리를 가지다 매독에 걸렸다고 서태후에게 보고하자 서태후는 격분하며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동치제의 사인은 천연두 때문이라고 기록 되었죠.

 

그렇게 동치제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자 서태후는 쥐고 있던 권력을 놓치기 싫었기에 또다시 3살짜리 조카였던 아이를 양자로 삼아 황제로 올렸고 그녀는 계속해서 섭정을 이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된 인물이 바로 광서제 였죠.

 

(서태후와 광서제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한 가지 어이없는 점은 광서제의 아버지는 함풍제의 이복동생이던 순친왕 혁현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자신의 아들이 양자로 입적이 되어 황제인 광서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게 되었고 서태후의 끝을 모르는 권력욕과 아들을 빼앗겼다는 점에서 치를 떨며 통곡했다고 하죠.

 

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이화원에서 살 때도 그곳에 전화기를 설치하지 않았는데요.

이유가 바로 자신과 통화하는 상대방이 혹시나 누워서 통화한다든지, 건방진 자세로 통화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무릎은 꿇고 전화를 받고 있는게 맞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죠.

하지만 그녀가 단지 권력욕 때문에 이런 욕을 듣는 건 아닌데요.

서태후는 청나라 황실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던 인물로도 유명하기 때문이죠.

 

그녀는 청나라의 1년 예산의 30%나 되는 은 3천만 냥을 사용해 아편전쟁 때 불타 소실된 이화원을 더 화려하게 재건했는데요.

당시 서구 열강과 일본의 위협이 점점 격화되고 있던 시기에 청나라를 지키려면 이런 큰돈은 국방비로 사용을 했어야 맞는 것인데 그녀는 청나라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이화원을 재건 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한 끼에 100냥이나 되는 거금을 들여 128가지나 되는 음식을 먹었다고 하는데요.

이는 당시 청나라 농민의 약 1년 치 끼니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고 하죠.

거기다가 같은 음식을 3번 이상 먹지를 않았는데 이는 독살을 당할까봐 자신이 선호하는 음식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오리고기, 돼지고기 등 육식을 좋아했으며 진귀한 음식에 굉장히 관심도 많았고 식탐 또한 너무나 강해서 서태후가 전용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날이면 16칸 중 4칸이 주방이었다고 하죠.

그리고 서태후의 식사를 만드는 요리사만 100여 명이 따라갔다고 합니다.

 

게다가 자신의 미용을 위해서 젖이 나오는 여자들을 날마다 자신의 처소로 불러 신선한 모유를 매일같이 마셨고 비취와 진주가 달려있는 화려한 옷이 3천 상자가 넘었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옷을 갈아 입었다고 하죠.

또한 자신의 피부미용을 위해서 스스로 화장품을 만들기도 하고 진주가루를 복용하기도 했으며 흐트러진 헤어스타일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탈모가 심했기 때문에 머리를 손질할 때 엄청나게 신경 썼다고 하는데요.

궁녀들이 그녀의 머리를 빗겨줄 때 머리카락이 빠지기라도 한다면 목이 달아났기 때문에 궁녀들은 일부러 소매가 넓은 옷을 입어 그녀의 머리카락이 빠졌을 땐 소매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고 하죠.

거기다가 성깔은 얼마나 더러운지 자신의 앞에서 궁녀들이나 환관들이 기침을 하거나 실수를 하면 자신의 인분을 먹였을 정도로 성격 또한 개차반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태후는 특히 비취와 진주에 대한 애착이 굉장했는데요.

비취로 만든 팔찌와 반지뿐만 아니라 머리장식에도 비취와 진주를 사용했으며 손톱 끝에는 7cm가 넘는 비취 장식을 달기도 했고 식탁이나 식기들 심지어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도 비취로 만들게 했죠.

그녀의 비취 사랑이 이렇게 심하다 보니 서양에서 온 특사가 최상급 다이아몬드를 바쳤는데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냥 돌려보낸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버선과 신발도 한번 신고 나면 버려버렸는데 그녀의 신발과 버선을 만드는 사람만 매년 3천 명 이상이 동원되었고 비용 또한 1만 냥 정도가 들었다고 하죠.

그녀의 남성편력 또한 여느 권력자들 못지않았는데요.

 

서태후는 자신의 끓어오르는 성욕을 채우기 위해 청나라 전역에서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은밀히 궁내로 데려와 밤마다 남자들과 잠자리를 즐겼습니다.

하룻밤을 보낸 남자들은 모조리 서태후에 의해 살해를 당했는데요.

이유는 서태후가 젊은 남자들과 밤마다 그 짓거리를 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죠.

 

(서태후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런 잔인한 성격에 엄청난 사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청나라의 개혁을 앞장서기도 했고 청나라의 최후의 보루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녀가 집권한 후 남편이던 함풍제와는 달리 서양문물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는데요.

여러 외국인들을 등용해서 청나라의 경제나 여러 가지 상황들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근대식 군대와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외국 장교들을 등용해 무기 제조법과 병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했죠.

또한 외국의 엔지니어들을 고용해 기술과 장비들의 발전도 이루어 냈습니다.

 

그 외에도 교육, 경제, 산업, 외교, 농업, 상업, 기술, 의학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서양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 개혁이 단행되었고 전족 금지, 과거제도 폐지, 아편 수입 중단과 같은 과거의 악습도 없앴죠.

거기다가 전기, 수도, 전화 등의 보급도 이루어 냈습니다.

 

그리고 광서제 또한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과 함께 변법자강운동을 통해 근대적 개혁을 꿈꾸기도 했지만 광서제가 단행한 너무나도 급진적인 개혁은 보수파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처음에는 광서제를 지지하던 서태후 역시 지지를 철회하게 되었죠.

 

그러자 궁지에 몰린 광서제는 강력한 군벌이던 원세계를 끌어들여 서태후를 제거하고 보수파를 싹 쓸어버리려고 했지만 원세계의 배신으로 변법자강운동은 좌절되었고 서태후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광서제를 유폐했고 변법파들을 모조리 숙청했습니다.

이후 광서제는 10년 동안 계속 유폐되어 있었는데요.

서태후는 그동안 실질적인 황제 행세를 하며 권력의 정점에서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인물이 되었죠.

 

하지만 청나라는 이미 서구 열강들에 의해 점점 끝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899년 11월에 벌어진 반외세 운동 단체인 의화단 운동이 벌어지자 이에 열받은 8개국 연합군의 침략으로 인해 그녀는 서안으로 피난까지 가게 되었고 1901년 신축조약을 맺은 다음 해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오게 되었죠.

 

(서태후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908년 11월 14일. 10년간 유폐되어 있던 광서제는 누군가에 의해 독살 당했는데요.

서태후는 조카인 광서제의 죽음을 보고받고도 담담했다고 하죠.

그러고 나서 또다시 불과 3살밖에 안된 푸이를 다음 황제로 지목했습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푸이였죠.

서태후는 광서제가 사망하기 전날에 이미 푸이를 궁으로 데려왔고 광서제가 죽을걸 미리 알았다는 듯 푸이를 다음 황제로 세울 준비를 전부 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과식으로 인해 이질에 걸렸고 푸이를 다음 황제로 세우라는 말을 한 뒤 광서제가 죽은 다음 날인 1908년 11월 15일에 72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죠.

서태후는 죽기 직전까지 나이 어린 황제를 옹립해 자신이 섭정을 계속 이어나갈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데요.

그녀가 얼마나 권력욕이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되었습니다.

 

또한 굉장히 어이가 없는 점은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 같은 불행한 여인이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라는 어처구니 없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죠.

그녀가 죽고 나서 4년 후인 1912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청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막강했던 청나라가 이렇게 멸망하게 된 이유는 48년간 서태후가 청나라를 통치하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져 엄청난 국고를 낭비하게 된 것이 아주 큰 이유가 되었기도 하죠.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3살 정도 밖에 안된 아이들을 황제로 옹립했고 권력 유지에 방해되는 세력이나 인물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숙청해 버린 것 또한 그녀가 여태껏 그토록 욕먹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중국의 역대 폭군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 같네요.

여태후, 측천무후, 혹은 가남풍과 함께 중국 3대 악녀로 불리는 서태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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