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3대 악녀든 5대 요녀든 어디든 이름을 올리는 장희빈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름이 올랐을 정도로 예뻤다고 합니다.
역대급 미모를 가졌지만 동시에 성질도 고약한 악녀였던 장희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 역사상 궁녀 출신으로 정실왕비까지 올라간 유일한 인물이 있습니다.
궁녀 출신 왕비는 이 인물 외에는 전무후무한데요.
그 이유는 숙종의 명으로 이 여인이 죽고 나서부터는 후궁이 왕비가 되는 것이 금지됐기 때문이죠.
오늘 이야기할 이 대단한 여인은 바로, 조선 3대 악녀로 일컬어지는 '장희빈' 입니다.
그녀의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이죠.
고작 궁녀 출신이 후궁이 되는 것도 엄청난 신분 상승이었는데 무려 중전의 자리에 오른 장옥정은 어떤 삶을 살았길래 조선 3대 악녀로 악명을 떨쳤을까요?
그녀는 통역관이던 아버지 장형과 천민인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납니다.
하지만 그녀가 10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는 옆집에 살던 조사석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며 살았죠.
그러다 장옥정은 숙부이던 장현에 추천에 의해 어린 나이로 궁에 입궐하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여성의 외모에 대해서 기록이 별로 없는 편인데 장희빈은 외모가 예뻤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출중한 미모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렇게 궁녀가 되어 궁으로 들어온 장옥정은 대왕대비전의 궁녀로 일하게 되었는데 나이가 점점 들면서 그녀가 22살이 되었을 때 자의대비에게 문안을 다니던 숙종이 그녀를 보고 반하게 되고 그렇게 온 나라를 뒤흔들 그 둘의 만남이 시작되었죠.
하지만 그녀의 신분 탓인지 아니면 남인이던 조사석이 장옥정의 뒤를 봐주던 탓인지 남인 출신 궁녀에게 숙종이 완전 푹 빠졌다는 소리를 들은 현렬대비는 그녀를 궁에서 내쫓아버렸습니다.
하지만 숙종은 장옥정을 잊지 못하고 있었고 2번째 부인이던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맞이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장옥정 밖에 없었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머니 현렬대비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숙종은 다시 장옥정을 궁으로 불렀습니다.
그렇게 숙종은 장옥정을 굉장히 총애하기 시작했는데 종4품 숙원으로 봉하고 나서 얼마 안 가 또 정2품 소의로 승급시켜주었죠.
또한 숙종은 밤마다 장옥정만 찾아댔는데 그 결과 그녀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1688년 10월, 무려 왕자를 출산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숙종은 나이가 28살이나 되었지만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 한 명 없었는데 드디어 아들을 얻게 된 것이었죠.
그게 너무나 기쁜 일이었던 것일까요.
1689년 1월이 되자 숙종은 중대 발표를 했습니다.
바로 장옥정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삼겠다는 것이었죠.
원자는 왕위 계승권을 가진 왕의 첫째 아들을 뜻 했습니다.
당시 첫째 아들이라 할지라도 2~3살이 되어야 원자가 되고 7~8살이 되면 세자로 봉해졌었는데 장옥정이 낳은 아이는 태어난 지 두세 달 밖에 지나지 않은 갓난아기이기도 했고 심지어 신분이 천했던 궁녀 출신 후궁의 아들을 원자로 삼겠다고 한 것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로 큰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당시 인현왕후의 나이는 고작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라서 얼마든지 자식을 가질 수 있는 나이였기도 했기에 서인이든 남인이든 모든 신하들이 만류했을 정도였죠.
그리고 예전에 비슷한 일도 있었는데 서자였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나서 선조의 계비였던 인목왕후가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았는데 이는 훗날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 전례도 있고 하니 신하들조차도 이 일을 언급하며 반대를 하고 나선 것입니다.
서인이던 송시열, 김수흥 등은 남인 출신의 후궁에게서 나온 왕자의 탄생을 축하조차 하지 않았고 원자 책봉은 이르다며 강력히 반대했죠.
하지만 장옥정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남달랐고 결국 숙종은 자신의 의지대로 장옥정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했습니다.
그리고 원자의 생모인 장옥정을 희빈으로 삼았죠.
그래서 장희빈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조정에 피바람을 부는 사건으로 번지게 되는데요.
모든 상황이 종료된 상황에서 서인의 정신적 지주이던 송시열은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들어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올리는걸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에 숙종은 "정하기 전에 하면 모르겠는데 이미 다 끝난 일을 반대하는 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다" 라고 하면서 송시열을 귀양 보내버렸고 귀양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약을 내려서 죽여버리죠.
그리고 숙종은 조정 대신들의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하는데 원자책봉을 반대하던 서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빈자리는 남인들로 채워버렸습니다.
1689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부르죠.
그리고나서 숙종은 남인들 앞에서 갑자기 중전인 인현왕후가 투기를 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인현왕후를 폐서인해야 하는 까닭으로 인성이 마치 한나라의 여태후와 같다며 맹비난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서인과 남인 가리지 않고 인현왕후를 폐서인 시키는걸 반대했는데 오죽하면 인현왕후의 반대편이던 남인인 권대운은 숙종에게 "투기하지 않는 여자는 드무니 살다 보면 좋아질 것이다"라며 숙종을 달래기까지 했죠.
하지만 장희빈을 왕비로 삼겠다는 숙종의 뜻은 확고했고 결국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현왕후는 폐서인 되어 궁 밖으로 쫓겨나면서 1689년 5월, 장희빈은 결국 왕비가 되기에 이르렀죠.
천민 출신의 궁녀에서 한나라의 국모의 자리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죽으면서 만들어진 증오는 전부 장희빈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죠.
어쨌든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에 오르고 자신이 낳은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기까지 하면서 장희빈의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친인척들도 고위 관료에 임명되어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남인 세력 또한 강력한 권력을 누리게 되었죠.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는데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나 남인들의 부정부패가 점점 심해지며 숙종의 비위를 거스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서인들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왕권을 위협하자 인현왕후를 이용해 그들을 조정에서 쓸어 버린 것이었는데 이제는 남인들이 예전 서인들과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자 숙종은 장희빈에 대한 총애마저 사그라 들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숙종은 궁에서 무수리로 일하던 최씨를 가까이 했었고 인현왕후를 폐출한 것에 대한 민심이 나날이 나빠짐에 따라 숙종은 다시 인현왕후를 궁으로 데리고와 민심을 회복하는 동시에 기세등등한 남인 세력을 또 쓸어버리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1694년, 숙종은 또다시 대대적인 조정 개편에 들어가는데 인현왕후를 쫓아내는데 일조한 신하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인현왕후를 지키려다 조정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던 것이죠.
이 일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왕비였던 장희빈을 다시 희빈으로 강등 시켰습니다.
그리고 권력은 남인에서 서인으로 다시 넘어가게 되었죠.
거기다가 당시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장희빈의 가문도 풍비박산이 나버렸고 당시 엄청난 부자였던 숙부 장현과 장찬도 유배를 가게 되었으며 부원군의 지위까지 올라갔던 아버지의 교지는 불태워졌습니다.
숙종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처결에 분통이 터진 장희빈은 그때부터 처소 한켠에 신당을 차려 놓고 굿에 몰두했는데요.
인형에 바늘을 꽂기도 하고 인현왕후 초상화에 화살을 쏘기도 하는 등 온갖 저주를 퍼부은 것이었습니다.
또한 숙종과 인현왕후에게 문안도 가지 않았고 인현왕후를 중전마마라 부르지 않고 민씨라 부르기까지 했죠.
그리고 꼴도 보기 싫었던 무수리 출신의 숙의 최씨가 숙종의 아들까지 낳게 되고 숙빈까지 오르게 되는 등 최악의 나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인현왕후는 종기로 고생하다 결국 1701년,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장희빈의 운명은 마치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는데요.
숙빈최씨가 "인현왕후가 죽은 이유는 장희빈이 저주 굿을 해서 그렇다" 라고 고변했고 이에 장희빈은 굿을 한 것은 세자를 위해 치성을 드린 것이라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인현왕후가 거처하던 곳에서 동물의 사체가 발견되기도 하고 장희빈이 만들었던 신당에서 여성의 옷을 입은 인형이 발견되기도 하는 등 점점 더 죽음의 구렁텅이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죠.
그러자 장희빈을 모시던 궁녀들도 모조리 잡혀와 고문을 당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세자를 위한 치성을 드린 것이다 말했지만 가혹한 고문을 버티지 못한 궁녀들은 결국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했다고 자백하게 되면서 장희빈은 처벌을 피하지 못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에 숙종은 희빈에게 자진하라고 명을 내렸고 장희빈 편이었던 소론은 재조사를 요구했지만 워낙 완고한 숙종에 의해 장희빈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죠.
장희빈이 죽기 약 10일 전에 오빠였던 장희재 역시 사형을 당해 죽임을 당했는데 그렇게 결국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사실 숙종이 장희빈에게 자진하라고 명을 내린 것 까지는 맞지만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고 합니다.
야사에서는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지 않으려고 난리를 쳐서 군사들이 힘으로 붙잡은 뒤 억지로 먹였다고 하죠.
또 다른 야사로는 이씨왕조를 망하게 하겠다며 경종의 고환을 꽉 잡으면서 저주를 퍼부었다는 이야기도 있기도 합니다.
다음 왕이 될 세자를 낳은 여인이었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은 장희빈이 죽고 난 뒤 숙종의 지시로 종친부에서 직접 왕비에 준하는 장례를 치러주었고 후궁의 아들이던 세자의 공식적인 어머니는 왕비였기 때문에 설사 생모가 죽더라도 곡을 해서도 슬피 울어서도 안됐지만 숙종이 특별히 장희빈의 장례에 세자부부도 참석하게 해주고 슬퍼하며 곡도 할 수 있게 해주었죠.
이러한 숙종의 조치는 아들인 세자에게 미안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장차 왕이 될 세자의 힘을 길러주기 위한 나름대로의 대책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장희빈이 죽고 난 후 숙종은 후궁이 왕비가 되는 걸 금지시켰죠.
꽤나 보수적인 조선왕조실록에까지 외모가 아름답다고 기록돼있을 정도로 예뻤던 장옥정은 숙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결국 숙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여인이었습니다.
해석에 따라 숙종은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인현왕후를 끌어들였고 나중에는 또다시 장희빈까지 이용했다는 이야기도 있죠.
어쨌든 현재는 조선의 3대 악녀의 대표급으로 악독하고 표독스러운 여인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장희빈은 정말 표독스러운 악녀였을까요? 아니면 정치싸움에 휘말린 비운의 여인이었을까요?
조선시대 3대 악녀, 숙종의 신데렐라 장희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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