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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베트남전쟁. 엄청난 병력과 화력을 쏟아 부었지만 결국 북베트남에게 패배하고 철수한 미국

by 사탐과탐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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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뼈아픈 패전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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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은 이미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 을때부터 세계 최강이라고 볼수 있었는데요

그들이 보유한 무기들도 모두 최첨단으로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구석기 시대로 보내버릴만큼의 화력을 자랑하죠

그런데 그런 미국이 작은 동남아시아 나라와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해버린 일이 있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베트남이죠

베트남전쟁은 미국이 참전한 전쟁 중 '가장 그늘이 많이 진 전쟁',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댄 전쟁' 이라고도 불립니다

어떻게 최첨단 무기를 가지고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을까요?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오랜기간동안 외세의 침략과 수탈을 겪었던 나라였죠

19세기말 베트남을 식민지배했던 나라는 바로 프랑스였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면서 베트남에서도 철수할수 밖에 없었는데 그 빈자리를 독일과 동맹관계였던 일본이 베트남을 침략해 차지해버렸죠

그렇게 또다시 일본에 의해 엄청난 수탈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은 여러 지역에 걸쳐서 대규모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니 엄청나게 많은 양의 군량이 필요했고 그렇게 베트남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식량을 수탈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 베트남 국민의 10%인 200만명이 아사하기도 했죠

그렇게 베트남 사람들의 독립을 향한 열망은 계속 커져만 갔고 1941년 호치민은 베트남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단체인 베트민을 결성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호치민은 이때까지만해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독립운동가 였는데요

호치민을 중심으로한 베트민은 치열하게 독립을 위해 싸웠는데 그러던 1945년, 일본이 항복을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버렸습니다

이에 호치민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완전한 독립을 선포했죠

그런데 과거 자신들을 식민지로 만들었던 프랑스가 다시 식민지배를 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베트남으로 오게 됩니다

 

이에 베트남 사람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 결국 1946년 11월, 결국 프랑스와 베트남은 전쟁에 돌입하게 되죠

그렇게 약 8년의 기간동안 치열한 전쟁을 벌인 결과 결국 베트남은 독립전쟁에서 승리할수 있었습니다

이후 베트남은 독립국이 되는게 마땅했지만 어이없게도 베트남의 독립 문제를 제네바 협정을 통해 논의를 하게 되는데 이때 베트남은 프랑스의 철군과 독립 정부 수립을 요구했지만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그리고 제네바 협정에서 나온 협상안에 따라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북베트남에는 공산주의 진영이 들어갔고 남베트남에는 민주주의 진영이 자리잡았습니다

그렇게 베트남은 베트남 사람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대국들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지게 된것이죠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호치민이 공산주의 세력을 통합해 북베트남의 초대 주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민주주의 세력의 가장 큰 축이던 미국은 상당히 골치가 아팠는데요

바로 제네바 협정 협상안에 따라 2년안에 총선거를 실시해 베트남을 통일국가로 만들어야 하는데 문제는 만약 선거에서 지면 얄짤없이 베트남 전체가 공산화 되어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베트남이 공산화가 된다면 인접국인 라오스나 캄보디아, 태국 등도 도미노처럼 공산화가 될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진다는 것이었죠 (*도미노이론)

 

그래서 미국은 결국 베트남의 통일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남베트남에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한 인물을 내세워 안정화를 도모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미국은 공산주의를 너무나도 싫어하던 '응오딘지엠' 이라는 인물을 지원하기로 했죠

그렇게 열린 국민투표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응오딘지엠은 98.2%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런 압도적인 득표율은 사실 그의 동생이 조작했던 것이죠

어쨌든 그렇게 남베트남에서도 베트남 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하지만 남베트남의 안정화를 꾀하려던 미국의 계획은 산산히 무너지는데요

응오딘지엠이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독재자의 길로 접어든것입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반정부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모조리 잡아들였는데 정치범으로 잡혀 들어온 사람만 약 4만명에 달했고 그중 12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무참히 사형당했죠

그런데 당시 남베트남에는 무시못할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은 남베트남 내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게릴라 세력 베트콩이었습니다 (베트 = 베트남, 콩 = 공산주의)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응오딘지엠의 공포정치로 인해 반정부를 외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자 베트콩 세력은 점점 세력을 확장해 나갔던 것이죠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미국은 자칫 잘못하면 남베트남도 공산화가 될것 같아서 비밀리에 남베트남에 미군을 파견했습니다

그렇게 파견된 미군의 목적은 남베트남 내에서 강한 대항군을 육성하는것이었죠

 

하지만 미군이 투입된 이후에도 남베트남의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응오딘지엠의 폭정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기에 민심은 극에 달해 있었고 베트콩 세력에 가담하는 국민들도 많아졌던 것입니다

또한 카톨릭 신자였던 응오딘지엠은 노골적으로 불교를 탄압했는데 불교 마을이나 사찰들을 폭파 시키고 없애버리기까지 했던 것이죠

 

이에 승려들이나 불교도들이 저항하기라도 하면 바로 공산주의로 몰아 잡아들였고 처형까지 해버렸습니다

그러자 1963년 6월, 틱광득이라는 스님이 응오딘지엠의 폭정과 불교탄압에 저항해 분신하는 사건이 벌어졌죠

그런데 이 사건을 들은 응오딘지엠의 아내이자 영부인이던 마담 누가 '스님 한명이 바베큐가 되었을 뿐인데 왜 다들 난리냐'는 식으로 말해버렸고 이는 정부에 대한 민중들의 극렬한 분노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1963년 11월 2일, 쿠데타가 일어났고 대통령궁을 급습한 군부가 응오딘지엠을 체포한뒤 그는 호송중에 처형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남베트남은 거의 매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극심한 혼란에 휩쌓이고 말았죠

그러다 미국이 남베트남에 군사적으로 개입을 하게 된 결정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1964년 9월 2일, 북베트남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통킹만을 순찰하던 미해군의 구축함이 북베트남 함정으로 부터 공격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죠 (통킹만 사건)

그리고 2일후인 8월 4일, 또다시 북베트남은 미 해군을 공격했고 더이상 두고볼수 없었던 미국은 군사적 대응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것입니다

그렇게 베트남 참전의 명분을 얻게된 미국이었죠

 

하지만 이 통킹만 사건은 조작되었다고 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첫번째 공격은 실제로 있었다고 양측 모두 인정했지만 북베트남은 이틀후 있었던 두번째 공격은 없었고 미국이 조작한것이라고 주장한것이죠

그런데 미 국방부의 기밀문서가 뉴욕타임즈에 공개되면서 난리가 나고 말았는데 그 기밀문서의 내용 중에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북베트남을 선제 공격할것' 이라는 내용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없다고 하죠

어쨌든 그렇게 공식적으로 미국과 북베트남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이 약 6개월만에 끝날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이 전쟁이 10년이나 이어질것이라는것은, 이땐 아무도 몰랐죠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할수있는건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17도선 위로 북베트남을 공격하면 소련과 중국 등 공산주의 진영과의 전쟁으로 확대 될것이 우려되었던 것이죠

그렇게 미군의 목적은 남베트남에 있는 베트콩 척결이었습니다

그렇게 1965년 11월 14일. 미국과 북베트남은 이아드랑 이라는 지역에서 첫전투가 벌어지는데요

 

이때 미국은 헬기를 이용해 공중 강습 부대를 투입했고 15대의 폭격기도 폭격을 준비하고 있었죠

그런데 미군이 예측하지 못한것이 있었는데 바로 미군은 400명에 불과했지만 북베트남의 병력은 2천명이나 되어 미군을 완전히 포위한채 서서히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탈출할 방법도 없던 미군의 무어 중령은 이러나 저러나 죽을수 밖에 없었기에 우리는 걱정말고 이아드랑 지역에 폭격을 가하라는 무전을 날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자 결국 그곳에는 네이팜탄을 이용해 폭격이 가해졌고 그렇게 미군은 300여명이 전사, 북베트남은 1800여명이 전사하면서 미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양측다 느낀점이 있었는데 미국은 북베트남 애들이 장난이 아니구나 라고 느꼈고 북베트남군은 미국과의 전면전은 안되겠다고 느낀것이죠

이후 베트콩들은 베트남의 울창한 정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미군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전쟁이 시작되었죠

무더운 여름날 정글에서 밤낮없이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는 베트콩들에게 엄청나게 시달렸고 또한 베트콩들의 복장은 민간인들과 구별이 되지 않았기에 민간인 인줄알고 돌아선 순간 등에 총알을 맞기 일수였습니다

그렇다고 민간인들을 모조리 다 죽일수 없었기에 베트콩만 색출하는것은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던 것이죠

 

또한 베트콩들이 미군의 눈에 띄지 않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지하에 만들어놓은 꾸찌 터널 덕분이었습니다

꾸찌 터널안에는 생활할수 있는 모든것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베트콩들은 그곳을 이용해 게릴라 공격과 휴식을 다 할수 있었던 것이죠

사실 이 꾸찌터널은 프랑스와의 독립전쟁때 만들었던 것인데 독립 전쟁 당시 48km였던 꾸찌터널은 미국과의 전쟁에서는 250km로 늘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꾸찌터널은 사이공에서 캄보디아까지 연결되어있었다고 하죠

이에 미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는데요

미군은 본국으로 부터 꾸찌터널 수색을 위해 탐지견 4000여마리를 공수해 왔죠

하지만 베트콩은 매운 고춧가루를 터널 입구에 뿌리거나 미군들이 사용하는 비누를 구해 자기들 옷에 바르는 등 개의 후각을 교란시켰던 덕에 탐지견 작전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또한 베트콩들은 펀지스틱 트랩, 더메이스 트랩, 카트리지 트랩 등 수많은 부비트랩을 설치해 계속해서 미군을 괴롭혔죠

그러다보니 미군들은 밤에 잠도 잘 못자고 심리적으로도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호치민 루트라는것이 있었는데요

이것은 북베트남에서 남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연결하는 산이나 정글의 작은 길들로

이곳을 통해 북베트남이 베트콩들에게 무기와 사람 등을 지원했던 보급로였죠

 

미군도 이 호치민 루트를 알고 있었지만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국경을 넘어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중립국들을 침범할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호치민 루트에 의한 피해가 극에 달하자 결국 공습을 강행했고 그렇게 미국이 라오스에만 쏟아 부은 폭탄의 양은 200만톤에 달했으며 지금도 라오스에는 이때 터지지 않은 불발탄이 약 8000만개나 어딘가에 뭍혀 있다고 하죠

 

거기다가 미국은 울창한 정글이 베트콩을 색출하는데 방해가 되고 베트콩의 군량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농촌을 황폐화 시킬려고 했는데요

그때 미국은 초목을 고사시키는 제초제인 고엽제 약 416만 리터를 베트남 정글과 농촌에 살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엽제에는 독성물질인 다이옥신이 포함되어 있었고 정글의 초목들이 모조리 말라 비틀어져 죽긴했지만 이 고엽제에 노출된 사람들마저 치명적인 후유증을 겪게 되죠

 

게다가 고엽제 후유증은 유전을 통해 후세에도 이어져 지금도 고통받는 사람들이 400만여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간에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중 1968년 1월 30일, 베트남의 음력설 테트날이 되었는데요

당시 테트기간에는 암묵적으로 휴전을 해왔지만 1968년 테트기간에는 북베트남과 베트콩들이 기습공격을 해온것이죠

 

이에 남베트남의 수많은 도시들은 동시에 함락되었고 수도인 사이공마저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글에서의 게릴라 전이 아닌 시가전이었기 때문에 미군은 오히려 베트콩 세력들을 밀어냈고 채 한달이 되기 전에 대부분의 도시들을 탈환할수 있었죠

이 테트공세 이후 전세가 역전되었는데 미군과 남베트남 전사자는 약 3천 400여명에 불과했던 반면 북베트남 전사자는 5만여명에 달했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문제는 다른곳에서 터지는데요

바로 이때 미국대사관이 베트콩들에게 털린일을 미국 본토에서 국민들이 TV를 통해 전부 목격해버린 일이죠

당시 미국인들은 미군들이 어딧는지도 모르는 작은 나라에서 나름 수월하게 전쟁을 치르고 있는줄 알았는데 미군 대사관과 수도 사이공이 탈탈 털렸다는건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인들에 의해 미국내 여론은 점점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으로 바뀌어갔고 이후 반전 시위가 일어나면서 시위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대규모로 일어났죠

그렇게 1969년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은 이런 여론에 못이겨 미군 철수 계획을 발표했는데 오하이오 주 방위군이 반전 시위를 하던 학생들에게 실탄을 발사해 학생들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일어나자 여론이 더욱더 악화 되었습니다

이런 미국 본토 소식을 전해들은 베트남 주둔 미군들의 사기도 뚝뚝 떨어져갔고 오랜 전쟁으로 지칠대로 지쳐있었던 미군들은 병사들도 반전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결국 미국은 베트남과 비밀협상에 돌입해 결국 1973년 1월 27일, 베트남 전쟁 종결을 위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미국 사이에서 파리 평화 협정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군은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죠

이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내전이 계속되어 결국 1975년 3월 사이공이 함락되고 북베트남 공산주의 진영에 의해 베트남은 통일되었습니다

 

미군은 전쟁 실패로 인해 너무큰 대가를 치뤘는데요

미군 약 6만명이 전사했고 15만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국으로 돌아간 미군들에게 국민들은 베이비 킬러라며 손가락질 해댔고 참전군인 중 약 83만명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진단 받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고 하죠

또한 전쟁비용으로 약 1000억달러(한화로 48조 4천억원)를 썼다보니 이 문제로 인해 미국의 재정이 악화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이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베트남 양국에 뼈아픈 비극으로 남게 되었죠

미국 역사상 최초로 쓰디쓴 패배를 맛본, 베트남전쟁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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