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말기 말도 안 되는 세금과 군역, 환곡으로 인해 백성들은 살아 숨 쉬는 것 조차 힘들어졌습니다.
나날이 피폐해진 삶에 지친 백성들은 최후의 몸부림으로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고 산으로 도망가 산적이 되기도 했었죠.
지난번에 조선 제25대 왕 철종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죠.
19세기 조선 왕조에 세도정치가 극에 달할 때 매관매직으로 수령직을 산 탐관오리들은 관직을 살 때 들었던 큰돈을 다시 벌어들이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전정, 군정, 그리고 환곡까지 정부의 세 가지 제도를 악용해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만 사용한 것이죠.
또한 수해, 흉년이 겹치고 콜레라 같은 질병까지 백성들을 덮쳤는데 그러자 백성들의 삶은 엎친데 덮친격으로 너무나도 피폐해지기 시작했고 피죽도 못 쒀먹고 굶어죽는 사람이 허다했습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굶어 죽나, 반란 한번 일으키고 죽나 어찌 됐든 죽는 수밖에 없게 되자 참다못한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철종은 이 이런 폐해를 바로잡고자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는 등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지만 당시 세도가문이던 안동김씨 세력에 의해 실패하고 말죠.
당시 악덕 수령들은 도대체 어떤 지독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집어 넣고 있던 것일까요?
첫 번째 수탈 방법은 농사짓는 땅에 메기는 토지세를 이용한 것이었는데요.
사실 토지세는 농민의 부담이 아니고 그 땅의 주인인 지주의 부담이었죠.
하지만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농사를 짓고 있는 토지 1결당 미곡 4두인데 2배로 뻥튀기해서 1결당 8두씩 받아먹기도 했으며 농사짓는 땅도 아닌 허허벌판 황무지에다가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고 거기다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땅을 백성들 거라고 기록해두고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죠.
또한 쌀을 운반할 때 운송비나 수수료를 받기도 했고 창고에 쌀을 보관할 때 쥐가 파먹으면 그 또한 농민들에게 부담시켰습니다.
백성들이 당장 굶어 죽게 생겼다고 사정해도 그들의 사정은 눈곱만큼도 고려되지 않았죠.
그저 돈만 뜯어내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16세부터 60세의 남자들은 군포를 냈었는데요.
군대를 가야 하는 남자가 군에 가지 않는 대신에 옷감을 내던 것이 군포이죠.
원래 이 군포를 냈던 이유는 군역을 지지 않는 사람들이 군포를 납부해 군복무를 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한 취지였는데 이 또한 벼슬아치들의 백성 수탈 도구로 쓰였습니다.
아직 16세가 안된 어린아이들과 60세가 넘은 노인은 군역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군포를 뜯어냈죠.
심지어 갓난아기들의 군포를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백골징포라 하여 이미 죽은 사람을 산사람처럼 꾸며 군포를 징수했죠.
이런 탐관오리의 쓰레기 같은 짓거리가 극에 달하자 이것을 못 버티고 도망가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하지만 세금을 삥 뜯어가는 짓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오가작통법' 이라고 5가구를 묶어서 서로 감시하게 했는데 만약 한 가구가 도망가면 나머지 4가구에서 군포를 냈어야 했죠.
만약 다섯 가구가 다 도망가면 연좌제를 적용해 그들의 친척에게 찾아가 기어코 군포를 뜯어냈습니다.
또한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의하면 딸을 아들로 바꿔서 징수한 적도 있다고 하고 집에서 키우는 개와 절구를 사람 이름으로 올려서 군포를 받아 간 경우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안의 남자가 죽어도 그의 군포를 내야하고 자식을 낳아도 딸이든 아들이든 군포를 내야 했으며 심지어 도망친 이웃이나 친척의 군포까지, 이중, 삼중으로 세금이 불어나니 결국엔 모두가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 버리고 마는 사태까지 벌어졌죠.
당시 군포의 부담을 견디지 못하는 농민들은 심한 경우 자식을 더 이상 낳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거세를 하는 남자들도 있었다고 하죠.
농민들의 거세에 대한 이야기는 정약용의 시, 애절양(哀絶陽)에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토지세와 군포 이 두 가지의 백성 수탈 제도 보다 더욱더 극심한 것이 바로 환곡이라는 제도였습니다.
사실 환곡이란 곡식을 나라의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가 곡식이 바닥나기 시작하는 봄쯤에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추수하는 시기인 가을에 약간의 이자를 붙여 다시 곡식을 거두던 것을 말합니다.
그냥 보면 가난한 농민들을 구제해 주는 아주 훌륭한 제도 같은데요.
환곡은 백성들을 죽음에 몰아세우는 제도가 됩니다.
원래 환곡은 굶어죽게 생긴 농민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생긴 제도였기 때문에 처음엔 이자가 없었죠.
그러다 점점 이자를 받기 시작했는데요.
원래는 이자를 6개월에 10%로 제한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말기쯤 되면 6개월에 50% 이상으로 이자를 붙이기 시작했죠.
게다가 곡식을 아껴먹어서 환곡이 필요 없는 백성들이나 환곡을 빌릴 바엔 그냥 굶어 죽겠다고 하는 백성들에게도 강제로 곡식을 빌려줬는데 끝까지 반항하는 백성들은 환곡을 빌릴 때까지 고문을 가했습니다.
또한 곡식을 빌려줄 때 쌀겨나 모래, 돌 등을 섞어 주거나 쌀을 물에 불려서 양이나 무게를 속이는 경우도 허다했죠.
이러한 지방 탐관오리들의 백성들 수탈은 철종 대에 극에 달했고 이래죽나 저래죽나 자포자기한 백성들은 산으로 도망가 산적이 되기도 했으며 지방 수령 뿐만 아니라 아전들 역시 백성들을 착취했고 공금이나 환곡 등을 횡령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중앙정부에서는 암행어사를 수시로 보내기도 했지만 이미 고착화 되어버린 악습은 도저히 없앨 수 없을 정도였기에 바로 고치기엔 이미 너무 늦고 말았죠.
이렇게 토지세를 말하는 전정, 군포를 말하는 군정, 그리고 환곡까지의 골 때리는 백성 수탈 도구를 '삼정의 문란' 이라고 불렀고 이 삼정의 문란은 결국 홍경래이 난과 진주 농민 봉기, 개령 농민 봉기 등 여러 지역에서 수많은 민란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나서야 삼정의 문란은 겨우 변화되기 시작했는데요.
하지만 그나마 사정이 조금 나아졌을 뿐이었죠.
나중에 여흥 민씨 세력의 세도정치로 인해 또다시 허사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이는 얼마 안 가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기폭제가 되었고 조선이 망국의 길로 접어든 수많은 이유 중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나 싶기도 하고 과거에 태어나지 않고 지금 태어났다는게 천만다행이라고도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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