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해서 왕이 되었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수많은 개혁을 시도했지만 왕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세도가문에 의해 모든 정책이 좌절되었던 비운의 왕 조선 25대 왕 철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때는 조선시대 말 강화도에는 나무꾼으로 살고 있는 이원범이라는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의 별명은 강화도령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궁으로 데려갔고 그렇게 그는 조선 25대 왕 철종이 되었습니다.
그 이원범이라는 인물은 조선의 왕족이었죠.
그런데 그는 왕위 계승권과는 너무나도 먼 왕족이었는데요.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였습니다.
근데 은언군의 여러 자녀들 중에서도 서6남이 철종의 아버지 이광이죠.
조선에서는 적장자가 왕위를 승계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서자의 서자의 서자이기도 하고 심지어 첫째도 아닌 여섯째 아들이 왕이 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철종은 아버지 대부터 군호조차 받지 못했었죠.
그 또한 왕으로 즉위하기 전날에야 비로소 덕완군이라는 군호를 받았습니다.
그가 왕이 된 이후 아버지와 큰형도 군호를 받게 되었죠.
정조 10년인 1786년.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홍국영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이광을 비롯한 모든 식구들이 교동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순조가 왕으로 즉위하고 난 뒤 은언군은 사사 당하고 말았지만 이광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교동도에서 살았죠.
그러다 1830년. 이광은 유배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왔고 다음해인 1831년 아들 이원범을 낳았습니다.
이후 그가 10살이 될 때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14살이 되던 해인 1844년 민진용이 이원범의 큰형인 '이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미게 되면서 가족들 전체가 역모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죠.
결국 큰형 이원경은 처형되었고 그렇게 또다시 가족 전체가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된 이원범과 작은형 이경응은 왕족의 지위도 박탈당해 재산도 없었기에 농사짓고 나무 베며 일반 백성처럼 근근이 먹고살게 되었죠.
심지어 강화도에 벼슬을 하던 관리들도 이 철종의 가족들을 개무시 하는 경우도 많았고 백성들조차 그들을 양반이나 왕족 취급을 해주지 않고 온갖 멸시를 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술에 취한 양아치 같은 남자가 그의 집 문 앞에서 그에 대한 욕을 해대며 모욕을 주기도 했다고 하죠.
그러던 중 궁에서는 큰 사건이 하나 터지게 됩니다.
그 사건은 바로 헌종이 23살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었죠.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던 순원왕후는 헌종의 뒤를 이을 왕족을 찾았는데 좀 어벙한 것 같기도 하고 다루기도 쉬울 것 같았으며 그나마 헌종과 가장 가까운 친척은 이원범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를 다음 왕으로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조선 왕실에서는 다음 왕인 이원범을 모셔오기 위해 엄청난 인력을 동원해서 강화도로 향했는데 이 엄청난 행렬을 본 이원범은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산속으로 도망쳐 버렸죠.
작은형 이경응 역시 놀라서 도망치다가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잡히게 되었고 영의정 정원용과 주민들의 설득으로 결국 가마에 오르게 되었고 그렇게 한양으로 가게 되었죠.
평범하게 농사짓고 나무하며 근근이 살아오던 백성 같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왕이 되어버린 희대의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왕권은 너무나도 약했고 세도가들의 권세가 왕을 넘어 하늘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미래 또한 암울하기 그지없었죠.
그가 19세에 왕으로 즉위하자 어리다는 이유로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852년부터는 친히 정치를 하기 시작했는데 어릴 적부터 고통받으며 살던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살았던 철종은 여러 개혁 정책들을 내놓으며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했죠.
그렇지만 자신을 지지해 줄 정치적 세력이 그에게는 전혀 없었고 세도가들의 반대로 그의 정책 대부분은 이루어지지 못했죠.
또한 순조, 헌종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안동 김씨 가문의 여인을 왕비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철인왕후였는데요.
철종은 농민으로 살았었기 때문에 그때 마시던 막걸리를 너무 그리워했다고 하죠.
그러자 부인인 철인왕후 김씨가 친정에 부탁해 막걸리를 구해다 철종에게 바쳤다는 야사가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야사에 의하면 철종에게는 강화도에 결혼을 약속한 '양순'이라는 여인이 있었지만 그녀의 신분이 미천했기 때문에 사랑하던 그녀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고 하죠.
하지만 그녀를 잊지 못했던 철종은 그녀를 후궁으로 맞아들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고 그녀에 대한 무수한 소문만 남기고 말았습니다.
양순에 대한 상사병으로 괴로워하는 철종을 본 조선 왕실에서는 몰래 사람을 보내 양순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있기도 하고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난 뒤 그녀를 후궁으로 부르려고 찾아갔지만 이미 병에 걸려죽었다는 소문도 있기도 했으며 역적의 후손이라 부를 수가 없었다는 등의 소문이 있었죠.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개혁 정책을 이루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게 되면서 여기저기서 역대급 규모의 민란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철종은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고자 했지만 이 또한 순원왕후와 세도가의 반발로 인해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철종은 왕이 된 후 현재의 문제들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개혁하려는 의지 또한 충만했지만 그의 뜻을 받아들여줄 세력이 너무나도 부족했죠.
정치로써도 모든게 막혀 어찌할 수가 없고 사랑하는 여인 조차 다시 만나지 못한 상실감과 허수아비 왕으로써의 허탈감 때문이었을까요?
그는 점점 정치에게 손을 떼기 시작했고 술과 여자에 빠져 문란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농사와 나무를 하며 쌓아놓았던 체력 또한 약해졌죠.
그러다 결국 1861년 31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앓아눕게 되었고 2년 동안의 병석에 누워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1863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행했던 삶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그가 살아있을 때 성격이 순하고 온화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지었어도 가볍게 잘 넘어가 주었고 비록 나중에 술과 여자에 빠지기는 했지만 원체 검소한 성격 탓에 심한 사치는 하지 않았다고 하죠.
그는 중전과 여러 후궁들 사이에서 5남 6녀를 두었지만 대부분 어린 나이에 죽었고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조선의 왕통은 또다시 단절되었습니다.
신정왕후 조씨는 흥선군의 차남 이명복을 차기 왕으로 지명했고 그가 바로 고종이 되었죠.
철종은 조선왕조 존속기간 중 마지막으로 국상을 치른 마지막 조선왕조 임금이기도 하고 그의 능인 예릉 역시 전통적인 조선왕릉 형태로 조성된 마지막 왕릉이기도 합니다.
세도가들에 의해 억지로 왕이 되어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다 자신이 펼치고 싶던 정책 한번 펼치지 못하고 답답한 궁 안에서 쓸쓸히 죽어간 철종에게는 어쩌면 강화도령으로 평범하게 살던 것이 더 좋았을 수도 있겠네요.
그가 만약 강화도에서 곤궁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해서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았다면 행복하게 더 오래 살수 있었을까요?
농사꾼이자 나무꾼으로써 평범하고 행복한 백성의 삶을 살다 하루아침에 조선 25대 왕이 되어 불행한 삶을 살게 된 철종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한국역사 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숙직상궁. 조선시대 임금의 잠자리를 감시하고 코치하던 8명의 감독관 (0) | 2021.08.22 |
---|---|
효장세자. 매흉과 화흉으로 어린 나이에 독살당한 비운의 왕세자 (0) | 2021.08.21 |
삼정의 문란. 조선 말기 말도 안 되는 세금과 군역, 환곡 (0) | 2021.08.18 |
이우. 일본의 야스쿠니 합사 만행으로 아직도 편히 잠들지 못한 대한제국 마지막 왕자 (0) | 2021.08.18 |
서달 사건. 조선시대 최악의 권력형 비리 사건 (0) | 2021.08.15 |
한글 훈민정음. 전 세계가 인정하는 한글의 우수성과 위대함에 대한 이야기 (0) | 2021.08.14 |
궁녀들의 훈련법. 조선시대 왕의 눈에 들기 위한 치열했던 경쟁 (0) | 2021.08.13 |
더럽지만 재미있는 조선시대 똥 이야기 (0) | 2021.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