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 왕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자입니다.
그는 황족의 신분때문에 일제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녔지만 누구보다 독립을 바랬고 일제를 증오했었죠.
죽어서도 일본의 만행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강제로 합사되어 아직까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광복을 끝내 보지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으며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왕자인 이우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우는 고종황제의 다섯 번째 아들 의친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고종황제에게는 뒤를 이을 황태자가 있었고 이우의 아버지는 고종황제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에서는 굉장히 멀었죠.
그런데 흥선대원군의 손자 영선군이 사망하자 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고 운현궁의 재산과 칭호를 계승한 뒤로는 '이우 공 전하'라는 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사실 살아있을 때 왕자로 불린 적은 없었죠.
그는 형 심약하고 일제에 순종적이던 형 이건과는 달리 이우는 어릴 적부터 일본을 싫어했고 일제에 반항적이었으며 항상 부딪쳤기 때문에 의친왕은 첫째 이건보다 이우를 더 총애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어린 나이에 '이우 공 전하'라는 신분을 가지게 된 이우는 경성 유치원과 종로 소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해오다가 1922년 11살의 나이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죠.
이후 이우는 일본 도쿄에 살면서 중, 고등학교를 나오게 되었는데요.
당시 일본은 일본의 황족들은 모두 육군 해군에 들어갔어야 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 황족 대우를 받던 이우 역시 곧바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 대학을 들어가게 되었죠.
이후 그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영친왕을 이방자여사 (마사코)와 강제로 결혼 시켰던 것처럼
이우 또한 일본 황족인 사와코 여왕과 결혼시키려 했지만 일본에 대한 반발심이 강했던 이우는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이 강제로 일본인과 결혼시키기 전에 재빨리 박일서의 딸인 박찬주와 결혼식을 올려버렸죠.
박일서는 바로 친일파 박영효의 아들이었는데요.
이우의 아버지 의친왕도 '일본인과 결혼시킬 바에는 친일파가 낫다' 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일제는 크게 화내며 이 둘의 결혼을 깨트릴려고 했지만 친일파 박영효가 겨우 일본을 달래서 무마했다고 하죠.
이우와 박찬주는 결혼 전부터 몰래 데이트를 하기도 했고 연애편지를 주고 받았던 사이였는데요.
둘은 이 당시에도 결혼기념일이 되면 뉴 그랜드 호텔에서 양식을 먹으며 기념할 만큼 금슬도 좋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결정은 한국에서도 엄청난 욕을 먹었는데요.
이유는 하필이면 친일파였던 박영효의 손녀와 결혼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사실 그는 누구보다 일본을 증오하는 인물이었는데요.
허구헌날 일본인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고 일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조선인과 결혼을 하는 패기도 보였죠.
그리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일본의 구 황족 아사카 다케히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가정교사였던 가네코는
당시 이우 공은 일본의 모든 행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서 일본 육군에서도 그를 두려워했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하죠.
게다가 이우의 아들 이청의 회고록에 의하면
일본의 오키나와가 미국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는데 이땐 아버지가 왜 웃는지 몰랐는데 크고 나서 웃음의 이유를 알았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일본을 엄청나게 싫어했던 이우는 평생 동안 일본 군복을 벗고 가족들과 함께 운현궁에서 살고 싶어 했는데 조선에 머물 때는 일본으로 다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전역을 신청하기도 했고, 조선에서의 근무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일제에 의해 모두 거절되었죠.
또한 일제는 그를 계속해서 일본이나 타지로 발령을 내며 조선에서 살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그는 일본 황족 신분으로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각 전선을 시찰하는 명령을 받았죠.
이후 여러 곳으로 전출되다 1945년 7월 히로시마 제2 총군 교육참모로 부임하게 되어 그곳으로 가게 되었죠.
이우의 둘째 여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잠깐 조선에 있었는데 히로시마에 전출되기 직전 운현궁에서
일본으로 가게 되면 나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내 손으로 아내와 두 아들을 모두 죽이고 일본으로 가겠다.
라고 가족들에게 말했다고 하죠.
그러자 동생들과 운현궁, 사동궁 식구들이 모두 울고 불며 그를 말렸고 그렇게 혼자 쓸쓸히, 끔찍히도 가기 싫어했던 일본으로 다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히로시마로 부임하고 한 달 후인 1945년 8월 6일. 이우는 평소처럼 말을 타고 출근하던 중 그가 있던 곳에서 고작 7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얼굴과 가슴에 큰 화상을 입어 의식을 잃게 되었죠.
그렇게 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다행히 의식을 회복했지만 다음날 새벽 오전 5시경, 극심한 방사능 피폭 증상을 보이며 병원에서 33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바라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도 못하고 독립하기 바로 직전에 죽고 만 것입니다.
당시에 이우를 감시하기 위해 일제에서 붙여놓은 요시나리 히로시라는 일본인 부관이 있었는데 그는 이우왕자가 사망한 뒤 부관으로서 그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그는 처음에는 감시 목적으로 왕자에게 붙어 있었지만 점점 이우의 훌륭한 성품에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고 나중에는 이우의 편이 된 일본인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일제는 패망하게 되었고 1945년 8월 서울 운동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죠.
그리고 그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의 흥선대원군의 묘역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59년에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본에서 벌어집니다.
그것은 일본이 지네 맘대로 야스쿠니 신사의 영새부에 일본의 전범들과 함께 이우의 이름을 올린 것이었는데요.
당시 일본은 이우가 방사능에 피폭되어 사망했던 그때 그는 전쟁에 여러 공을 세웠던 일본인이었으니 일본의 신으로 모시는게 당연하다는 얼토당토안한 주장을 했죠.
심지어 이우의 장남이던 이청에게 신사를 방문하라고 초대장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이청은 굉장히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며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라고 인터뷰를 했죠.
이후 유족들이 항의를 하기도 하고 한국에서도 큰 이슈가 되며 많은 비난이 있었지만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의 영새부에는 이우의 이름이 적혀있고 이름을 빼달라는 유족들의 요구도 들은체 만체 무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제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녔지만 누구보다 조선의 독립을 꿈꾸고 있었던 조선의 마지막 왕자 이우는 평생을 불행한 삶을 살았고 죽어서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영혼까지 고통받고 있는 인물이죠.
하루빨리 이우왕자의 이름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빠졌으면 좋겠네요.
대한제국 마지막 왕자 이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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