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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성종. 신하들이 하도 난리 치는 바람에 평생 놀지도 못하긴 했지만 조선의 체제완성과 기반을 다졌던 열심히 일 만하다가 과로로 죽은 왕

by 사탐과탐 2024.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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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이 하도 난리 치는 바람에 평생 놀지도 못하긴 했지만
조선의 체제완성과 기반을 다졌던 열심히 일 만하다가
과로로 죽은 왕 성종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의 8대 왕인 예종이 왕위에 오른지

불과 1년만에 세상을 떠나자

조선 조정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나게 됩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다음 왕위를 정해야 했던 것이죠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자성대비(정희왕후, 세조의 아내)는

한명회, 신숙주 등 대신들과 의논을 했는데

예종의 아들이던 제안대군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리고 의경세자의 첫째아들인 월산군은 아프다는 이유로

세자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결국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오늘 이야기 할 성종 입니다

 

성종은 사실 왕위에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었는데요

 

예종이 너무 갑작스럽고 일찍 죽는 바람에

굉장히 운이 좋게 왕위에 오르게 된 케이스라고 볼수도 있죠

 

성종은 1457년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그 유명한 인수대비 한씨 입니다

 

하지만 성종이 태어난지 고작 두달만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세조는 둘째인 해양대군을 세자로 삼게 되었고

그렇게 자을산군은 어머니와 함께 출궁해 밖에서 살게 되었죠

 

세자빈자리에서 내려온 어머니 한씨는

이후 매우 엄격하게 자식들을 교육시켰다고 하는데요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자을산군은 어려서부터 굉장히 총명한 모습을 보였고

행동거지도 침착하고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며

도량도 넓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억수같은 비가 오고 천둥번개가 치던 어느날

갑자기 내리친 벼락에 어린 자을산군의 옆에 있던 내시가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졌죠

 

그러자 형이던 월산대군이나 다른 내시와 궁녀 등은 너무 놀라

정신을 잃은 사람도 있었고 어쩔줄 몰라 했지만

자을산군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서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자을산군의 모습을 본 세조는

기백은 태조를, 총명함은 세종을 닮았다며 칭찬해주었다고 하죠

 

또한 꾸준히 한명회 신숙주 등과 교류를 이어나오던 어머니 수빈 한씨는

자을산군이 11살이 되던해에 당시 최고 권력자인 한명회의 딸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그가 13세가 된 1469년

예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고

자성대비는 대신들과 의논 후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렸으며

그렇게 그는 성종이 되었죠

 

특이한점은 대개 왕이 죽으면 4~6일 정도 시간을 두고

왕이 다시 소생하기를(?) 기다리는게 관례였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성종은 워낙 취약한 정통성 문제가 있다보니

예종이 죽은 당일에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곧바로 즉위를 하게 되었다고 하죠

 

어쨌든 성종은 고작 13살 밖에 안되던 어린나이였기 때문에

이후 자성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성대비는 성종이 즉위하고나서 성종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기위해

아들이던 의경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려고 했는데요

 

그렇게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어 신위를 종묘에 안치 했으며

그 전까지만해도 예종의 왕비였던 인혜대비가

의경세자의 아내인 인수대비보다 궁내 서열이 높았지만

덕종이 종묘에 안치되면서 다시 인수대비가 인혜대비보다

높은 서열을 차지하게 되면서

꼬여있던 두 대비의 서열문제도 다시 조정될수 있었죠

 

그러던 1474년 아내이던 공혜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2년후에 윤기견의 딸 숙의 윤씨를 왕비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살이 되었고

이후 할머니 자성대비는 수렴청정을 거두었으며

성종은 직접 친정을 하기 시작했죠

 

또한 경사스러운 일이 있었으니

이 윤씨가 성종의 후사를 이을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들은 훗날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이 되죠

거기다가 이 윤씨는 너무 문제가 많았습니다

 

다른 여러 빈들에게 심한 투기를 부리기도 했고

심지어 왕인 성종에게조차 불경스러운 말과 행동을 하기까지 했죠

 

윤씨는 투기를 너무 심하게 하다보니

성종을 거의 증오하다시피 했는데

그가 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항상 상복처럼 흰 옷만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성종)의 눈을 빼고 발자취도 없애버리며

그 팔을 끊어버리고 싶다' 라고 하는등

온갖 무시무시한 패악질을 일삼고 다녔죠

 

또한 원자(연산군)가 커서 왕위에 오르면 두고보자며

원한을 가진 사람들을 협박하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옷 속 주머니에 비상가루 (독약)를 지니고 다녔는데

방에는 비상을 바른 곶감을 상자에 넣어두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왕과 후궁을 독살하려 했다는 의심을 샀는데

인수대비는 며느리인 윤씨가 뭔짓을 할까봐

성종이 먹는 수라상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조치를 취했을 정도였죠

 

윤씨의 이상한짓이 계속되자 결국 그녀는 폐출되어

궁밖으로 내쳐지게 되는데요

 

성종은 폐비윤씨에 대해 넌더리가 났는지 그녀를 쫓아내자마자

윤호의 딸인 숙의 윤씨를 다시 중전(정현왕후)으로 승격시키는 등

폐비윤씨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아예 관심을 끊어버렸는데

그래도 예전 국모였던 점을 감안해 그녀가 밖에서 먹고 살수 있게

좀 예우해 주자는 상소가 올라오면 아예 무시해버리기도 했고

어느날 폐비윤씨의 집에 도둑이 들자

집에 담장을 쌓아주고 조사를 하자는 상소를 올리니

'폐비윤씨 자신이 잘못해서 벌어진 일을 왜 내가 처리해야 하냐'면서

'그러면 한양에 도둑든 집들은 내가 다 고쳐줘야 하냐'고 까지 했다고 하죠

 

그 이후 한동안 말이 없다가 연산군의 나이가 7살이 되었을때

경연 중 신하들이 성종에게

'폐비윤씨 좀 먹고살게 대우해주자'라고 의견을 냈는데

이에 열받은 성종이 "네놈들은 윤씨의 신하냐 나의 신하냐?

폐비윤씨가 나한테 무슨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그렇게 불쌍하면 너희들 녹봉으로 대우해주던가 해라!" 라며 일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482년, 폐비윤씨는 결국 사사되고 말았죠

 

성종은 어려서부터 계속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요

그는 공부하는것과 토론하는것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세조가 굉장히 싫어해서 자주 열지도 않았던 경연을

다시 하루 세번 여는걸로 만들어

아침 점심 저녁때마다 여러 대소신료들과 학문을 토론했다고 합니다

 

경연에는 나이든 대신 뿐만아니라 나이 어린 관리들도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신진 관원들의 의견을 왕이 직접 들을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죠

 

그래서 경연은 세종 역시 굉장히 좋아했었는데

성종은 경연자리에서 국정 현안을 논의했다는것이 특이한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연에서 국정을 논의했다는 것이

성종의 문치주의를 잘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했죠

 

또한 성종은 한명회 신숙주 등 너무 막강한 권력을 가진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대신들 견제는 성공하긴 했지만

대간들의 권세가 강해질수록 새로운 폐단이 생겨났죠

 

그 폐단은 바로 뭔짓만해도 대간들이 들고 일어나

난리를 친다는 것이었는데요

 

별일도 아닌데 대신들의 인격을 문제삼아 탄핵하기도 했기 때문에

대신들은 또 대간들에게 꼬투리 잡힐것이 두려워

국정 운영에 대한 발언 하기를 꺼려했고

심지어 성종에게도 온갖 무례한 발언을 일삼았던 것이죠

 

그러다보니 대신들 기죽이려고 키워놓은 대간들 때문에

성종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성종이 활을 쏘거나 시를 쓰면

'나랏일은 내팽개치고 놀기만 한다'고 상소가 올라오고

무신들을 등용하려니 '온 조정을 군인들로 채운다'며 난리가 났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화가 최경이 아버지 덕종의 어진을 그렸기에 그 공을 치하하기 위해

그를 당상관에 제수하려고 하자 또 다시 상소가 빗발치기 시작했으며

결국 성종은 명을 거두고 최경에게는 말 한필만 하사하고 끝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느날엔 현판을 직접 써서 내린적이 있는데

대간들은 즉시 '왕이 잡기에 빠져 나라를 망친다'며 상소를 올리자

개빡친 성종은 현판을 뜯어내 때려부숴버리고 태워버리기 까지 했다고 하죠

 

성종은 유달리 동물애호가이기도 했는데요

그는 궁내에 수많은 동물들(고양이, 개, 사슴, 노루, 매, 고니, 앵무새, 공작, 원숭이) 을 길렀다고 합니다

 

원숭이는 류큐왕국(오키나와)에서 보내온 것인데

성종은 원숭이가 너무 예뻐 옷을 해 입히려 했지만

또 다시 신하들의 태클에 발목을 잡혔다고 하죠

 

당시 한 신하가 "원숭이에게 입힐 옷 한벌로, 한명의 백성을 추위에 떨지 않게 할수 있습니다" 라고 하자 성종은 "외국에서 선물로 받은 동물을 추위에 떨게하는것은 도리가 아니다" 라고 했지만 결국 대차게 까이고 말았다고 합니다

 

또한 낙타를 들여오기 위해 신하들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는데요

 

신하들이 극구 반대를 하자 성종은 군사용으로 들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죠

 

하지만 낙타값이 워낙 비싸기도 하고

더운 지방에서 살던 낙타가 기후가 안맞는 조선에 와서

제대로 움직이겠냐며 결국 이것도 까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까였던 가장 큰 이유는 동물들의 먹이값은

국고에서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기존에 기르던 동물들도 신하들 등쌀에 못이겨 놓아주기도 했는데

사슴이나 매는 수도없이 놔줬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죠

 

재미있는 점은 신하들이 성종에게 동물에대해 태클을 걸때마다

'나는 동물을 안좋아하지만 어쩔수 없다'라는 말을 계속 했다고 합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성종은 좋아하던 매 사냥은 꿈도 못꿀정도였는데

시간이 나면 잠깐 뒷간에서 대간들 몰래 조용히 매 날리기만 했어야 했다고 하죠

 

성종 말년에는 다리가 셋달린 병아리가 태어난적이 있는데

이때 대간들은 '이런 요사스러운 요물이 태어나는 이유는

왕이 여자의 말을 듣고 정치를 했기 때문이라면서

성종을 찾아와 반성을 하라며 요구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어처구니가 없었던 성종은 찾아와 난리를 치는 대간들에게

"어찌 미신을 가지고 이 난리냐, 내가 뭘 했어야 반성을 하지

하지도 않은걸로 어떻게 반성을 하냐" 라며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대간들은 반성할 생각은 하지않고

어찌 반박을 할수 있냐며 대꾸했다고 하죠

 

이런 막무가내 행동에 성종은 머리 끝까지 열이 받았지만

그냥 "그래 다 내 탓이다, 이제 됐냐" 라고 한뒤

그들을 돌려보낸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고싶은 일을 제대로 즐길수 없는 처지이다보니

성종은 술과 여자말고는 아무것도 할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대간들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여색으로 풀었다는 이야기도 있죠

 

그렇게 성종은 총 12명의 왕비 및 후궁에게서 16남 12녀를 얻었다고 합니다

또한 조선시대 희대의 간통녀 어우동이 성종 시기 사람인데

성종이 워낙 미행을 자주 다니다보니

'어우동을 만나기 위해 나간것이다' 라는 말도 안되는 야사가 있기도 하죠

 

성종은 풍류를 좋아한 사람답게 술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술버릇이 아랫사람에게 술먹이기 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종에게는 굉장히 많은 일이 있기도 했지만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기기도 했는데요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대부분 집현전 출신이었기에

세조가 없애버린 집현전을 다시 재건했는데 그곳이 바로 홍문관 입니다

 

그렇게 학술 연기기관인 홍문관을 다시 만들었으며

홍문관은 이후 국가 중대사에 대해 언론기관의 역할까지 하면서

활약했다고 하죠

 

그리고 고려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약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과 교지, 조례, 그리고 관례 등을 총망라해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결국 1485년에 완성해

반포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성종의 치세기를 흔히 '문화의 황금기'라고도 불렸는데

성종대에 <국조 오례의>, <악학궤범>,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역사와 문학, 지리, 그리고 음악과 의례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다양한 출판물이 출간되기도 했죠

 

그리고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해 관수관급제를 실시했으며

북쪽에 빈번히 침범해오던 여진족 소굴을 소탕하는 등 국방에 힘쓰기도 했습니다

 

또한 훈구파들을 견제하기위해 사림파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는데요

 

그렇게 훈구와 사림간의 세력의 균형을 이루게 되어 왕권을 안정시켰고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

시켰던 왕이 바로 성종이었죠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지만

그는 겨우 3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

 

1494년 가을부터 폐결핵과 천식, 두통 등 여러 질병으로 인해

병석에 눕게 되었고

갑자기 배꼽 밑에 종기가 생겼는데

이는 매독으로 인한 증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죠

 

이후 성종의 병세는 계속해서 악화되다가

자신의 수명이 다한걸 느꼈던 것인지

성종은 신하들과 연산군을 부른다음 연산군에게 대리청정을 명했고

얼마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성종은 죽기전 신하들에게 폐비윤씨 사사사건을

자신의 사후 100년간 아무도 언급하지 못하게 할것을 유언으로 남겼지만

이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고

친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이 흑화되어

한반도 역사상 손에꼽는 폭군이 되기도 했죠

 

지금까지 조선의 모든 체제를 완성시키고 기반을 다져놓았던 왕

성종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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