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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현종. 두차례에 걸친 예송논쟁 등 끊임없는 신하들의 당파싸움에 스트레스 받아 죽은 왕

by 사탐과탐 2024.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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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차례에 걸친 예송논쟁 등 끊임없는 신하들의 당파싸움에 스트레스 받아 죽은 왕
조선 현종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나서 얼마안가 항복한 인조는

당시 청나라 수도인 심양에 인질로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부부를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심양에서 훗날 현종이 되는 아기가 태어나게 되죠

 

현종의 아버지는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 이었는데요

 

오늘은 조선의 역대 왕 중 유일하게 조선땅이 아닌

외국에서 태어났던 왕, 현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645년 2월, 형 소현세자가 조선에 돌아가고나서 불과 2개월만에 숨지자

봉림대군이 약 8년간의 인질생활을 끝내고 조선에 돌아오게 되는데요

 

인조는 종법을 무시하고 국유장군론을 내세워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고 그렇게 현종은 왕세손이 되었죠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외아들이었는데요

 

누나가 2명에 여동생이 4명 있었는데

유일하게 아들은 이 현종 밖에 없었던 것이죠

 

유일한 왕가 후계자이다보니 정말 애지중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고 합니다

 

현종이 아직 어린나이 였을적에

그의 따뜻한 인품을 보여주는 기록이 현종실록에 있는데요

 

어느날 인조에게 표범 가죽을 바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표범가죽의 품질이 너무 형편없어서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세손이던 어린 현종이 "표범 한마리를 잡으려면 분명히 많은 사람이 다칠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인조는 세손의 뜻을 가상히 여겨

그 표범가죽을 받았다고 하죠

 

이후 효종이 즉위하자 정식 세자로 책봉되었고

1659년, 효종이 사망하자 현종으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그의 왕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는데요

 

바로 왕위에 오르자마자 예송논쟁이라는 일이 벌어지게 된것입니다

 

이 외에도 재위기간 15년 내내 벌어지는

크고 작은 논쟁들로 인해 효종은 계속해서 고통을 받게 되죠

 

예송논쟁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효종이 죽고나서 인조의 두번째 왕비였던 장렬왕후가

참최복을 입어야 할지 기년복을 입어야 할지에 대한 논쟁이

바로 예송논쟁 인데요

 

<주자가례>에 따르면

첫째아들이 죽으면 그의 어머니는 3년복인 참최복을 입어야 하고,

둘째아들과 그 이후 아들들이 죽으면

1년복인 기년복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었죠

 

이에 서인은 효종이 소현세자의 동생이기 때문에

1년복인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고

남인은 왕은 일반 백성들의 예와는 다르게 해야 한다며

효종은 장남은 아니지만 인조의 적통 후계자이니

3년복인 참최복을 입어야 한다고 한것입니다

 

그러자 영의정이던 정태화는 <국조오례의>와 <대명률>에 따르면

부모는 자식들의 장례에 항상 1년복을 입었으니

그냥 조선에서 해오던 관습대로 기년복을 입는게 좋겠다고 했고

이때까지만해도 조선 왕실에서는 자식이 죽었을때

부모는 언제나 1년복을 입었었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하기로 하고 논쟁은 마무리 되었죠

 

그런데 1년뒤인 1660년 3월, 허목이 갑자기 효종은 왕이기도 하고

종묘의 제사도 지내고 사실상 맏아들 역할을 다 했으니

모든 사람이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것입니다

 

그러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효종은 왕이라도 장자가 아닌 서자이니

그냥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국조오례의에 따라

장자 서자 따지지 말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1년복을 입었던것과 같이

장렬왕후도 1년복을 입는게 맞다고 주장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윤선도가 "효종이 서자라면 첩의 자식이라는 말인데

그러면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정통성을 가졌다는 말이냐?"며 상소를 올렸고

그렇게 조정이 발칵 뒤집어 진것입니다

 

만약 윤선도의 말이 맞다면 송시열은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 역적이 되는셈이되고

이는 현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말이나 다름없었죠

 

반대로 송시열의 말이 맞다면 윤선도는 맞는말을 한 송시열을

역적으로 모함을 한것이 되기 때문에

둘다 목숨을 건 승부를 펼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 주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온 조정이 크게 들끓었죠

 

결국 현종은 고심끝에 서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1년복을 채택했고

그렇게 윤선도는 귀양을 가게 됩니다

 

이 사건이 바로 1차 예송논쟁인 '기해예송'이라고 불리고 있는것이죠

 

자칫 잘못하면 피바람이 불수도 있는 이 사건을

현종이 그냥 조용히 무마시킨것이었는데요

 

사실 현종은 굉장히 온화한 성품을 가지고있던 왕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에 대한 여러 일화가 있는데

현종이 세자였던 시절 광해군의 후궁을 모셨던 조상궁이라는 상궁이

이후 현종의 보모가 되었다고 하죠

 

그러던 어느날 어린 현종이 불장난을 하는것을 본 조상궁은

혼잣말로 "할아버지가 불로써 나라를 얻은것을 배우려는가" 라며 중얼거린것입니다

 

이는 인조반정으로 궁이 불타고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가 왕위에 오른것을

비꼬듯이 말했던 것인데요

조상궁은 인조반정을 그렇게 좋게보지 않았던 것이죠

 

이 말을 들은 현종은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훗날 왕위에 오르고나서 조상궁을 부른뒤

"그 말을 듣고 부왕께 일러바칠수도 있었지만

그대가 나를 양육한 공이 있었기 때문에 참았다" 라고 말하고

조상궁을 궁에서 출궁시키고 더이상의 처벌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조상궁이 죽을때까지 먹고살 식량을 계속 대주기도 했다고 하죠

 

또한 효종에게 새끼곰을 바친 사람이 있어서 곰을 궁에서 기른적이 있는데

훗날 곰이 자라서 몸집이 커지더니 사람들을 위협하기까지 한것입니다

 

그래서 내시 중 한명이 효종에게

'나중에 사람을 해칠지도 모르니 죽이는것이 좋겠다'고 말했죠

 

그러자 현종은 "곰은 사람을 해치기는 하지만 아직 이 곰에게 해를 입은 사람이 없는데

지금 나중을 염려해 곰을 죽인다면 어진 마음이 아닙니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효종은 세자인 현종에게

"니가 왕이 되고나서 시기와 의심때문에 죽임 당할 사람은 없겠다

너의 신하가 되는 사람은 복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라며 칭찬해주었다고 하죠

 

그리고 훗날 왕위에 오른 이후 현종은 청나라 사신을 전송하던 중

한 병사가 주위를 살피지 않고 빠르게 걷다가 현종과 부딪쳐

하마터면 현종이 넘어질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신하들이 이 병사에게 강력한 처벌을 내려야한다며 날뛰었는데

현종은 "모르고 실수로 한일인데 굳이 처벌할거야 있겠는가" 라며

곤장 대여섯대를 치는것으로 끝냈다고 하죠

 

이렇게 온화한 성격의 현종 덕분에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할수도 있었던 이 논쟁이

다행히 아무도 다치는 사람없이 마무리 될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큰일없이 기해예송은 마무리 되나 싶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는데요

 

남인 유생들은 지속적으로 반발 상소를 올렸고

몇년동안 이 기해예송에 대한 상소와 주장들이 현종에게 올라오는 등

이 일은 계속해서 현종의 골머리를 썩혔죠

그러다보니 현종은 예송 금지령까지 내렸을 정도였습니다

 

훗날 아들 숙종대에 벌어진 피바람이 휘몰아치는 환국정치를 생각하면

이 문제를 평화적이고 현명하게 풀어나갔던 현종의 정치력은 굉장히 뛰어난 것이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현종이 더 오래 재위를 이어나갔다면

더욱 평화로운 정국이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많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예송논쟁 이후 현종은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산림)들이

왕권을 가볍게 여긴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죠

 

그러던 1663년,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당시 수찬 김만균은 현종을 수행해

청나라 사신단을 맞이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만균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에 의해 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원수 나라인 청나라의 사신을 맞이하는 업무를 할 수는 없다며

현종에게 사직을 요청했던 것이죠

 

이에 서필원이라는 인물은

벼슬을 한 사람은 사적인 일 보다 공적인 일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며 사직을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문제는 김만균을 불충의 이유를 들어 파직시키는걸로 끝나는듯 했지만

이후 송시열이 "사의를 인륜의 차원에서 봤을때

인륜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답고 나라가 나라다울수 있는것이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사의는 존중 되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면서

사의와 공의 중 뭐가 더 중요하냐는 논쟁이 벌어지게 되죠

 

그러자 현종은 그런 송시열의 태도에 영 언짢은 모습을 보였는데요

 

이미 기해예송때 부터 아버지 효종을 두고 서자라느니 맏아들이 아니라느니 하는

불경스러운 말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당시엔 편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그들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1664년 4월, 인사에 대한 보고서가 현종에게 올라왔는데

중앙 요직에는 서필원을 공격한 인물들로

그리고 외직에는 서필원을 지지한 인물들로 채워졌던 것입니다

 

현종은 사적 당파를 비호하는 작태가 한심스럽다며

이번 인사에 대해 거꾸로 발령해버리는 명을 내려버렸죠

 

심지어 이조판서 김수항과 이조참판 민정중, 이조좌랑 이민서를

모두 파직시켜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습니다

 

노골적으로 송시열과 서인들이 하는일에

반대하는 제스처를 취했던 것이죠

 

또한 송시열이 올린 사의론 때문에 조정이 난리가나자

송시열은 스스로 자책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현종은 며칠뒤에야 겨우 형식적인 답변을 해주었고

송준길이 송시열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자

아예 대답을 안해주다가 두달후에야 겨우 적당히 답을 해줬는데

이는 신권을 대변하는 양송(송시열, 송준길)을

현종이 대놓고 차갑게 대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벌어진 왕권과 신권 사이의 대립에서도

현종은 강경한 입장으로 서필원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현종도 이만하면 신하들에게 자신의 뜻을 충분히 전달했다는 느낌이 들자

서필원을 잠깐 파직 시키고

양송을 다시 예우 해주는 모습을 보이면서

논쟁을 종결시켰고 정국을 다시 안정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번 논쟁으로 인해 서인 산림의 정치적 위상에

큰 타격을 받게 되었죠

 

이후 현종은 효종대에 준비하던 북벌을 중단시키긴 했지만

군사력 강화는 계속 이어서 해나갔는데요

 

신기전을 개량하여 대량생산하고

자주가던 온천 여행을 갈때마다 군사훈련을 시키는 등

군사력 강화에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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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가작통법 사목을 강력히 제정하고

수리시설과 양전 사업에 힘썼으며

나라 재정을 수습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죠

 

또한 서양 문물과 과학 기술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서

혼천의를 개량하고 자명종을 제작하는 등

신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열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1670년부터 조선에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는데요

 

바로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에 벌어진 대기근이죠

이를 합쳐 경신 대기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때 전세계에 불어닥친 이상 저온 현상으로

농산물 생산량이 급격히 하락하자

조선 전역에서 최악의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어죽어 나가고

수많은 지역에서 역병이 창궐해 조선 전체를 집어 삼킨 것이죠

 

이에 현종은 호남지역까지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면서

굶어죽어가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만 굶어 죽은것과 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약 100만명이나 되는 등 현종대에 이와같은 대재앙이 벌어졌죠

 

이후 현종을 괴롭히는 사건이 또 벌어지는데요

바로 효종의 부인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사망한 사건이었죠

 

이때도 장렬왕후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또 무슨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 하는 2차 예송논쟁인

'갑인예송'이 벌어진 것입니다

 

<경국대전>에는 맏며느리인 경우엔 시어머니가 1년짜리 기년복을 입고

그외 며느리는 9개월짜리 대공복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요

 

이에 송시열은 효종이 둘째이니 효종의 아내도 둘째며느리가 되는것이고

그러면 9개월짜리 대공복을 입는것이 맞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현종은 몹시 화를 내며

예조의 담당자들을 모조리 파직시켜 버렸죠

 

그리고나서 현종은 효종이 죽었을때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장자 서자 따지지 말고 1년복을 입으라 하더니

왜 이번에는 둘째며느리의 장례이니 대공복을 입어야 된다고 하는건

일관성이 없지 않냐며 서인의 주장을 반박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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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송시열과 서인의 주장은

현종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할수도 있는 주장이라

충분히 거부감이 들수도 있었던 것이죠

 

그러면 애초에 1차 때인 기해예송때

왜 현종이 이러지 않았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많은데

당시엔 현종의 나이가 겨우 10대 후반에 불과했고

왕이 된 직후였기 때문에 집권당인 서인의 눈치를 봐야했었지만

지금은 이미 30대의 나이에 15년 가까이 국정을 운영했기 때문에

서인이 없어도 국가를 운영해 나갈 자신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같이 화내던 현종은

갑자기 갑인예송을 신속하게 마무리 해버리는데요

 

현종은 기해예송에서 했던것처럼 국조오례의에 따라

장렬왕후의 복제를 기년복으로 정했고

송시열을 호되게 질책하면서

서인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위기에 몰리게 되었죠

 

하지만 이후 두달이 채 되지도 않은 1674년 8월,

현종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현종은 평생 종기를 달고 살다시피 할 만큼 몸이 병약하기도 했고

15년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붕당들의 정쟁들과

경신대기근까지 벌어지면서 그에 따른 스트레스로 인해

잔병까지 항상 달고있었다고 하죠

 

그래서인지 결국 30대 초반의 나이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너무나 타이밍이 절묘하다보니 위기에 빠진 송시열이

현종을 죽인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을만큼 어이없는 죽음이었죠

 

현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숙종은 예송을 근거로 들어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을 싹 몰아내버렸고

그렇게 남인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기도 했습니다

 

현종은 존재감이 그렇게 큰 왕은 아니지만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 중심으로 돌아가던 조정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던 왕이었죠

 

현종 이전에 현종이라는 묘호를 썼던 고려 현종은

뛰어난 능력으로 거란을 막아낸 훌륭한 군주였는데요

 

이후 조선 현종도 현종이라는 묘호를 쓴걸 보면

당시엔 굉장히 훌륭한 평가를 받았던 군주였다는걸 추측할수 있죠

 

현종이 훗날 노련하게 신하들을 대하고 정치를 해나간걸 봤을때

만약 더 오래 살아있었다면 명군이나 성군이 될수도 있었을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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