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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예종. 세자시절에도, 왕위에 오른후에도 명군의 자질을 보였지만 고작 1년만에 죽어버린 비운의 왕

by 사탐과탐 2024.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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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시절에도, 왕위에 오른후에도 명군의 자질을 보였지만
고작 1년만에 죽어버린 비운의 왕 예종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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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그로부터 2년뒤에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수양대군의 두 아들은 왕자가 되는데요

 

첫째아들은 의경세자가 되었고

의경세자보다 12살이나 어렸던 둘째아들은 해양대군에 봉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만해도 나이 많은 형까지 있었던 해양대군은

왕위와는 거리가 먼 왕자일 뿐이었죠

 

하지만 훗날 그는 예종으로 즉위하게 되는데요

 

그리고 암살 당한 단종을 빼면 조선 역대 왕들 중에서

가장 단명한 왕에 이름을 올리게 되죠

 

오늘은 조선의 8번째 국왕 예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가 해양대군이던 시절, 형 의경세자는

자신이 넘볼수 없는 굉장히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지만

그만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버리게 되죠

 

야사에서는 세조가 단종을 죽인 이후

단종의 어머니이던 현덕왕후 권씨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의경세자에 대한 저주를 퍼부었고

그로인해 의경세자가 일찍 요절했다는 말도 있는데요

그러나 실제로는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먼저 죽었다고 하죠

 

어쨌든 1457년 9월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나고나서

그해 12월 해양대군이 세자가 되었고

이후 1460년 11살의 나이로 한명회의 딸(16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사실 해양대군이 세자가 되는것은 종법제에 어긋나는 것이었는데요

 

원래 의경세자가 죽었다면 의경세자의 아들인

월산대군이 후계자가 되었어야 맞는것이었죠

 

심지어 해양대군과 월산대군의 나이차이는 고작 4~5살차이 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때문에 세자 자리를 물려줄수 밖에 없었다는 말을 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세조는 특이하게 월산대군을 세손으로 책봉해서

왕위 계승권을 인정해주는 동시에

둘째아들인 해양대군을 세자로 임명해버렸죠

 

그래서 세조가 이렇게 특이하게 왕위 계승권 문제를 처리한 이유는

자신의 사례를 우려하지 않았냐는 말이 많습니다

 

만약 혹시 월산대군이 어린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을경우

해양대군이 제2의 수양대군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그냥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한것이 아닌가 하는것이죠

 

그리고 다른 대신들도 대충 세조의 의중을 읽었는지

종법상 어긋나기는 했지만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어쨌든 예종은 세자가 되고나서

다음해인 1461년에 세자빈 한씨가 원손인 인성대군을 낳았는데

예종은 고작 12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된것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안타까운점은 세자빈 한씨는 인성대군을 낳고나서

산후병으로 인해 얼마안가 세상을 떠나버렸고

자식인 인성대군 역시 고작 3살의 나이에 풍질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후 다시 세자빈을 뽑지는 않고 한백륜의 딸을 소훈으로 삼은채

세자빈 예우를 해주었다고 하죠 (소훈: 세자의 후궁)

 

예종은 세자가 되고나서 아버지 세조의 지극한 관심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해 왕으로써의 자질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세조는 "세자는 모든학문에 통하지 않은게 없다"며 극찬을 했다고 하죠

 

이후 세조가 병에 걸려 정사를 돌보지 못하자

예종은 세자의 자리에서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등의 원로대신들과

모든 정무를 처리했으며

이에 세조는 "일을 부탁할 사람을 얻었으니 내가 근심이 없다" 라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후 1468년 9월 7일, 세조가 죽기 직전 양위를 받아 왕으로 즉위했으며

세조는 예종이 즉위하고 다음날인 9월 8일에 세상을 떠났죠

 

예종이 19살의 나이로 즉위를 하자

예종의 어머니였던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후 예종이 친정을 하는 모습을 본 정희왕후는

아들의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았는지

즉시 수렴청정을 거두었다고 하죠

또한 세자시절부터 굉장히 총명했던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억지를 쓰지도 않으며

혼자서 정사를 주도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대신들은 자신들의 말을 존중해줄 성군이 될거라며

굉장히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예종은 즉위하고 한달만에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찌질한 왕' 또는 '징검다리 왕'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죠

 

그 사건은 바로 '남이의 옥사' 사건입니다

 

남이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세조말년에는 병조판서에 까지 오르게 되었던 인물이죠

 

하지만 그의 능력과 명성을 시기 질투한 유자광이

남이가 반역을 도모했다며 고변해버린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사건으로 인해 남이는 강순과 함께 처형되고 말았죠

 

이 일은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강순, 구성군 이준, 남이 등의 신공신들과

계유정난 이후 형성된 한명회, 신숙주 등 구공신 사이에서 서로 견제하다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종은 세자시절부터 굉장히 강한 위기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할 때 총사령관이었던 구성군 이준을

아버지 세조가 칭찬하며 굉장히 예뻐하는 모습을 보이자

예종은 이준을 견제하는 말을 했다고 하죠

 

그러자 세조는 예종에게

"누구와 의논 했길래 그런 소릴 하느냐"며 역정을 냈던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예종은 신공신이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영의정까지 오른 구성군 이준과 병조판서까지 벼락출세한 남이 등을

위험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강등시키기까지 하면서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었죠

 

그러다 때마침 유자광이 고변하자 심문끝에 죽여버리고 만것이었습니다

 

아버지였던 세조는 신하들과 술도 자주 먹고 친하게 지내면서

신하들을 다독여가며 함께 일을 했지만

예종은 굳이 신하들과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던 것이죠

 

이후 그는 경연도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도 해가며 국정을 운영해 나갔고

아버지 대부터 편찬되고 있던 경국대전의 편찬작업도

계속 이어 받아 강행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1469년 11월 28일, 예종이 왕이 된지 14개월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리고 마는데요

 

앞으로 왕으로써 더욱 많은 업적을 남길수도 있었던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은 이유는

세조가 아플때 오랜기간동안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하느라

그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몸이 쇠약해진것 때문이라고 하죠

 

세조가 아파 병석에 눕자 그는 밤낮으로 세조의 옆을 지키며

그에게 맞는 치료법을 찾기위해

여러달 동안 밤을 지새우기도 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세조가 죽고나서는 슬픔에 잠겨

밥은 커녕 물도 잘 마시지 않았다고 하죠

 

최근 역사학자들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여러 정황상

그가 죽은 이유는 어린시절부터 예종을 괴롭혀오던

지병인 족질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족질로 인해 발에 세균이 침투하면서 패혈증 증상이 생기고

이후 세균이 온몸에 침투하고 나면

여러 조직에 혈액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으면서

피부가 멍이 든것처럼 시퍼렇게 변한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래서인지 예종이 승하 했을때가 겨울이라

시신의 부패가 느리게 진행 될텐데도

사망하고 2일만에 시신이 시퍼렇게 변색되었다고 합니다

 

급작스레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모두가 깜짝 놀라는데

정희왕후는 "매일 나에게 문안인사를 하러 오길래

병이 심하지는 않는가보다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죽을수 있단 말인가" 하며

놀라움과 슬픔을 금치 못했다고 하죠

 

어쨌든 갑자기 시신이 변색까지 하다보니

일각에서는 독살설도 나돌았는데

예종이 죽기 전 자을산군을 불러 함께 식사를 했고

이후 갑자기 죽었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하지만 자을산군과 밥을 먹고나서 죽었다면

당연히 자을산군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찍혀버릴텐데

자을산군의 어머니인 수빈 한씨가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것이며

어린 아들에게 독극물을 주면서

삼촌의 밥에 몰래 넣어라 했을리도 없다는 것이죠

 

그러다 자칫 잘못하면 걸릴수도 있고

아니면 자을산군도 독극물을 먹을수도 있기 때문에

독살설은 신빙성이 낮다고 합니다

 

그렇게 2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타살로 세상을 떠난 단종을 제외하면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단명한 왕이 바로 예종이죠

 

그리고 인종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짧은 왕이기도 합니다

 

이후 정희왕후는 월산대군을 다음 왕위로 삼으니 그가 바로 성종이죠

 

후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제왕학 공부도 열심히 했고

왕이 되고나서도 자신에 대한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왕이었던 만큼

오래 살았다면 아버지 세조보다 더 나은 왕이 되었을 거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자광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남이를 죽였다는 이유로

쪼잔하고 의심많은 왕이라는 이미지가 굳혀져 버렸죠

 

어쩌면 예종도 이런 평가를 받으면서

조금 억울하다고 생각할수도 있을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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