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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명종. 강력한 엄마 문정왕후의 그늘에 가려 자신이 악행을 일삼지는 않았지만 모든 잘못을 뒤집어 써버린 억울한 왕

by 사탐과탐 2024.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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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엄마 문정왕후의 그늘에 가려 자신이 악행을 일삼지는 않았지만
모든 잘못을 뒤집어 써버린 억울한 왕 명종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1534년 5월, 문정왕후는 당시로치면 35살의 늦은나이에

중종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 아들은 바로 경원대군이죠

 

경원대군은 훗날 명종으로 즉위하게 되는데요

 

오늘은 워낙 막강했던 어머니 문정왕후의 그늘에 가려

그다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을 뿐만아니라

심지어 마마보이라는 오명까지 쓰게된 조선의 13대 왕

명종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경원대군을 낳기전 문정왕후는 당시 세자였던 인종의 편을 들며

지극정성으로 인종을 보살폈는데요

 

만약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중종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다음 왕이되는 인종을 등에 업고 권력을 얻을 셈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마침내 아들을 낳은 문정왕후는

이후 인종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고

노골적으로 인종을 적대시하게 됩니다

 

그러자 인종을 낳은 장경왕후의 오빠이던 윤임은

문정왕후와 경원대군을 견제하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윤원형과도 대립하게 되었죠

 

윤임과 윤원형은 같은 파평윤씨 가문이었는데

둘이 서로 대립하다보니

사람들은 윤임을 대윤, 윤원형을 소윤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어린 경원대군이 갑자기 인종의 세자자리를 빼앗기는 힘들었고

그렇게 중종이 죽고나서 인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윤임이 왕의 외삼촌으로써 권력을 얻게 되죠

 

그렇게 윤임이 승승장구 할줄 알았지만

불과 8개월만에 갑작스럽게 인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윤씨들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지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인종이 죽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윤임은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경원대군은 안질(眼疾) 때문에 눈이 잘 안 보이니 왕을 하지 못한다"라며

그를 후계선상에서 제외 시키려고 했지만

경원대군을 왕위에 올리려던 문정왕후, 윤원형, 이언적 등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결국 포기하게 되죠

 

그리고 마침내 경원대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명종이었습니다

 

하지만 명종은 당시 12세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이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렇게 그녀의 동생인 윤원형이 득세하기 시작했으며

1545년, 마침내 조선 4대 사화에 들어가는

을사사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인종이 즉위했을 당시 윤임은 이언적,유관,성세창 등

사림의 인물들을 많이 등용해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죠

 

이때 사림과 윤임일파의 반대하는 사람들은

윤원형 밑에 모여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나고

명종이 왕위에 오른 동시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자

이번엔 윤임 일파의 세력이 약화되고

윤원형 일파의 힘이 강해진것이죠

 

그리고 얼마안가 윤원형은

윤임이 조카인 봉성군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고 무고하고

윤임이 인종이 죽었을 당시에 계림군을 다음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윤원형은 자신의 첩이었던 정난정에게 시켜

문정왕후와 명종을 선동하게 했고

결국 윤임의 일파였던 좌의정 유관, 이조판서 유인숙을

반역을 꾀한죄로 귀양을 보냈다가 목숨을 빼앗았고

이 일에 연루된 봉성군과 계림군 역시 유배지에서 사사되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윤임 일파가 귀양가거나 죽은 사건이 발생한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사림파의 정치적 기반은 굉장히 축소되었고

훈구파가 모든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조정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음에도

여전히 부족했는지 1547년 또다시 정미사화를 일으켰는데요

 

이 사화는 경기도 과천현 양제역에 붙어있던 익명의 벽서를

명종에게 보고하면서 시작되었죠

 

그 벽서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라는 내용이었죠

 

그러자 윤원형은 노발대발하며

을사사화 당시 윤임 일파 모두를 다 뿌리뽑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지금이라도 다 찾아내 뿌리 뽑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 정미사화는 훗날 '양재역 벽서사건'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대윤 일파의 잔당들이 모두 숙청되고 말았죠

그렇게 대윤 일파를 모조리 몰아내고

윤원형은 조선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권신이 되었습니다

 

한편 1553년 7월, 명종이 20살이 되고나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다는 선언을 하는데요

 

그러자 명종은 엎드려 울면서 문정왕후의 선언을 거두어 달라고 말했고

심지어 신하들에게 "대신들은 뭐하는가, 어마마마를 말리지 않고" 라며

질타를 하기도 했다고 하죠

 

하지만 이는 예의상 했어야 했던 행동일뿐

이후 명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 이후에도

계속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명종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게 했다고 하죠

 

그리고 마음에 안들면 명종을 불러 혼내기도 하고

왕이었던 명종의 뺨을 때리거나 회초리를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다보니 명종은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보면 지레 겁을먹고 벌벌 떨었으며

이후 문정왕후가 시키는대로 하는 마마보이가 되었다고

많은사람들은 명종을 욕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하죠

 

하지만 워낙 문정왕후의 이미지가 강하기도하고

야사가 흥미를 유발하기도 하다보니

이 소문은 널리널리 퍼지게 되면서

야사의 내용이 기정사실화 되어버린것입니다.

 

사실 이와는 다르게 문정왕후도 이후 정사에 크게 개입하거나

명종이 행하는 일에 간섭하지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하죠

 

또한 친정을 한 이후 명종은 어머니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정치를 펼쳐나갔습니다

 

그는 기존의 경국대전을 보완해 '경국대전주해'를 반포했는데

그렇게 조선 전기의 법적 체계가 마무리 되었으므로

이는 명종이 행한 유의미한 업적이었죠

 

또한 70여척의 배를 타고 대규모로 몰려온 왜구가

전라도 일대를 휩쓸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자

명종은 이준경, 김경석, 남치훈 등에게 그들을 토벌하라 명했고

비록 진압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왜구들을 모조리 몰아내기도 했습니다 (을묘왜란)

 

중종때 있었던 삼포왜란 이후 생겼던 임시 비상 기관인 비변사를

이때 이후 상설 기구화 시켰고

그렇게 비변사는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최고의 기구가 되었죠

 

또한 명종은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는데요

 

을묘왜변 이후 조선 수군력을 크게 강화하기 시작했는데

판옥선을 도입했고 총통을 개량 했으며 수군을 정비하고 개혁하는데 힘써

이는 훗날 임진왜란때 수군이 활약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군마를 수입하기도 했을만큼

국방력 강화에 힘을 쓰기도 했죠

 

하지만 윤원형 등 소윤 일파의 전횡이 계속되자

명종은 그들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 인순왕후의 외삼촌인 이량을 이조판서에 앉히고나서

소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도 했죠

 

하지만 문제는 기껏 이량을 등용해

나쁜짓을 일삼던 윤원형 일파를 견제하려 했지만

이후 이량이 명종의 신임을 등에 업고 자신도 파벌을 만든뒤

윤원형과 같은 전횡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정치는 더욱 문란해지고 당파끼리의 정쟁이 끊임이 없었죠

 

결국 이량이 눈 돌아가 명종의 외척들을 해치려고 하자

이에 빡친 명종은 윤원형 보다 더 먼저 이량을 제거해버리기도 했습니다

 

이후 어느날 명종은 윤원형을 지칭해

"외척이 대죄를 행하면 어찌해야 하는가?" 라는 말을 한적이 있는데

이에 문정왕후는 명종을 불러 "이 어미와 외숙(윤원형)이 없었다면

주상이 왕위에 올랐을것 같습니까?" 라며 명종을 혼냈다고 하죠

 

자칫 잘못하면 자신(문정왕후)의 친정이 몰락해버릴수도 있기 때문에

친정을 살리기 위해서 급하게 자신이 움직였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명종은 윤원형을 숙청하지 못하고

그대로 둘수 밖에 없었죠

 

또한 양주 백정이었던 도적 임꺽정이 명종때에 나타나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한편 명종은 인순왕후와의 사이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얻게 되는데요

명종은 크게 기뻐하며 아들을 세자(순회세자)로 삼았죠

 

그런데 1563년 10월, 12살밖에 안되던 순회세자는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했고

이후 명종의 성격이 굉장히 괴팍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명종은 조울증과 홧병을 앓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명종은 주로 내시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기분에 따라 툭하면 총애하던 내시를 바꿔버렸다고 하죠

 

하지만 순회세자가 죽고나자 더욱 조울증은 심해져

술에 취하면 내시를 하옥시키거나 국문까지 했을 정도 였기 때문에

내시들은 "신하들에게는 성군이면서

우리에게는 걸주나 다름 없다" 라고 투덜거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명종은 죽기직전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않았던것 같죠

 

그러던 1565년 4월, 어머니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이미 권력을 많이 약화시켜 놓았던 소윤일파를 모두 숙청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문정왕후가 키워놓은 불교와 승려 보우를 처단해버렸죠

 

그러자 지방에서 조용히 힘을 기르던 사림은

훈구파가 빠졌던 자리를 빠르게 채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명종은 사림의 영수로 추대받던 퇴계 이황을 대제학으로 임명했고

소과와 문과에 연이어 장원 급제한 율곡 이이를 등용해

개혁정치를 펼치려고 했죠

 

하지만 명종의 정치는 끝내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마는데요

 

아들을 잃고나서 극심한 슬픔으로 인해 얻은 병세가

문정왕후의 삼년상을 정성들여 치르면서 더욱 악화되어 버렸고

마침내 명종은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준경은 다음 후계자를 미리 뽑아야 한다고 했는데

인순왕후는 명종이 평소에 아끼던 조카인 하성군을 불러

명종의 병간호를 맡겨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왕이 아프면 왕의 병간호는 세자가 했었기 때문에

이는 사실상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후 명종이 다시 의식을 차린 뒤에도 이 일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하죠

 

그 일이 있고나서 2년후인 1567년,

명종은 34살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

 

워낙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후계자에 대해 의논할 시간도 없었고

어의들은 물론 대신들도 정신없이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이준경이 다음 왕위를 누구로 올리냐고 묻자

인순왕후는 "을축년에 결정한대로 한다" 라며

명종이 아플때 병간호를 해줬던 하성군을 다음 왕위에 올리게 되죠

 

그러자 대부분의 신하들도 별다른 이견이 없었고

그렇게 하성군은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선조입니다

 

명종실록에 기록된 사관의 논평에 의하면

"명종은 총명하고 예지의 덕이 있었지만 국가에 베풀지 못한 왕이었고

어둡거나 탐혹하고 잔인한 잘못이 없었지만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 왕이었다"

"이단을 숭상하지는 않았지만 불교 사찰이 나라의 절반을 차지했고

환관을 친애하지 않았지만 소인들이 궁내에 득실거렸다" 라고 했다고 하죠

 

사실 명종은 자신이 악행을 일삼지는 않았지만

모든 잘못을 뒤집어 쓴걸 보면 억울할수도 있는 왕인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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