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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북벌의 왕 효종에게 많이 있었던 여러가지 재미있는 일화들과 야사 이야기

by 사탐과탐 2024.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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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효종에게 있었던 여러가지 재미있는 일화들과 야사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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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오직 북벌만 외치던 인물이 아니라

황폐해진 조선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그런 훌륭한 왕이었죠

 

그런데 이 효종은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남기기도 했었는데

오늘은 효종의 일화들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해볼까 합니다

 

효종은 어려서부터 무예를 갈고 닦는걸 좋아했다고 하죠

 

그래서 한가한 날에는 말을 타고 무예를 시험하곤 했는데

그때 쓰던 청룡도와 큰 몽둥이가 현재까지 남아있다고 합니다

 

정말 효종이 대단한것은 힘깨나 쓰는 장사들이나 무사들도

이 무기들을 마음대로 능숙하게 다룰수 없었지만

효종은 그런 청룡도를 자유자재로 휘둘렀다고 하죠

 

왕이 된 이후에도 정무가 끝나면 말을 타고 월도나 철퇴를 휘두르며

무예를 갈고 닦았는데 이 무기들도 굉장히 묵직한 무기들이었고

주로 힘이 센 무관들이 사용했던 무기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왠만한 무관들은 무게를 이기지 못해 능숙히 다루지는 못했던 반면

당시 굉장히 몸집이 크고 기골이 장대하던 효종은

다른 무관들보다 월도나 철퇴, 청룡도 같은 무기들을 잘 다룰수 있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효종이 즐겨 쓰던 이런 무거운 무기들은

훗날 무예 익히는 걸 좋아하던 왕족 중 한명이 다시 쓰기도 하는데요

 

그는 바로 사도세자 였죠

 

심지어 사도세자는 효종이 쓰던 청룡도와 큰 쇠몽둥이를

불과 15살부터 썼다고 하는데

무예에 관심이 많았던 사도세자는 <무예신보>를 편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효종에게는 '팔장사(八壯士)'라고 불리는 8명의 호위무관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팔장사는 효종이 아직 봉림대군이었던 시절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을때부터 효종을 호위한 인물들로

훗날 효종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고 왕위에 즉위했을때도

여전히 효종의 근처에서 그를 지켜줬다고 하죠

 

효종이 청나라에 끌려가던중 평안북도에 있던 용만이라는 지역을 지나갈때

이곳에서 이 팔장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렇게 '용만 팔장사' 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워낙 무예를 좋아했던 만큼

효종은 재위 내내 이 팔장사를 각별하게 챙겼다고 하는데요

 

그러다보니 대소신료들은 '왕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사를 처리 한다'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고 하죠

또한 효종은 팔장사 중 오효성이라는 인물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효종이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돌아올때

4살밖에 되지 않았던 아들 현종을 교자에 태울수 없어서

어쩔수없이 팔장사가 돌아가면서 현종을 등에 업고 갔다고 하죠

 

그런데 현종이 다른 장사들에게 업힐때는 계속 울었던 반면

오효성에게 업히면 울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오효성이 심양에서 한양에 도착할때까지

혼자 현종을 업고 걸어왔다고 합니다

 

이때 어린 현종이 오효성의 옷에 침도 흘리고 깨물기도 하는 바람에

옷이 많이 닳았다고 하죠

 

한편 효종이 조선에 도착하고나서 세자 자리에 오른뒤

팔장사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줬다고 하는데요

 

그때 오효성은 현종을 업고있는 모습으로 그리게 했다고 하죠

 

이후 효종은 오효성과 함께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취기가 오른 효종이 오효성을 총애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팔을 잡고 대화를 하려고 하자

오효성은 황송해하며 잡은 팔을 뿌리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빈정상한 효종은 갑자기 거문고를 들고

오효성의 어깨를 내리쳐 버렸고 그렇게 오효성은 어깨를 크게 다치게 되었죠

 

다음날 술에서 깬 효종은 이 사실을 알고 오효성을 불러

진심으로 사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효종은 세자시절부터 술은 한모금도 마시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심지어 효종은 '술로 인해 말 실수 하다가 화를 자초하기 일쑤고

크게는 천하와 국가를 잃고 작게는 일신(一身)을 망치는것이 술이다' 라며

술에 비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효종은 조선 관리들의 음주문화를 비판하기도 했으며

관리들에게 술을 줄이라는 교지까지 내렸고

1658년에는 아예 금주령까지 내렸을 정도로 술을 극혐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오효성의 일화는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에서 나오는데

이덕무도 '오효성의 후손이 기록한 것을 기록한것' 이라고

출처를 밝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효종이 오효성의 어깨를 거문고로 내리쳤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야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죠

 

효종이 개인적으로 총애한 인물은 팔장사 뿐만아니라

'장현' 이라는 인물도 있는데요

 

장현은 역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갈때 함께 가게 되었는데

이후 역관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은밀히 청나라의 사정을 파악하고 여러 정보를 모았으며

청나라의 주요 인물들과 인맥을 쌓아 교섭자의 역할까지 해냈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조금 더 나은 심양생활을 할수 있었던 것이죠

 

또한 40여년간 무려 30여 차례나 북경을 오가며

조선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했고

뛰어난 외국어와 외교 실력으로 수차례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면서

역관으로써는 하기 어려웠던 엄청난 역할을 소화해냈던 것입니다

 

그러던 1653년 어느날 역관들이 청나라에 갈때

무려 50수레가 넘는 인삼을 가져가다가 걸린적이 있는데

이때 장현을 탐탁치 않게 여겨오던 문관들은

아무런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삼의 주인은 장현이다' 라는 모함을 했던 적이 있죠

 

그렇게 잘못하면 큰 처벌을 받을수도 있었던 장현은

효종이 노골적으로 그를 비호해주었던 덕에

처벌을 받지 않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을 위해

청나라의 기밀 정보와 비밀문서를 입수하는 등 첩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호란 이후 조선에서는 제조가 금지된 화약과 화포 등의 무기를 밀매 하기도 하는등

목숨과 개인 재산을 아끼지 않고 위험한 일을 자발적으로 했다고 하죠

 

이후 왕위에 오른 효종은 그간의 공을 인정해 역관에 불과했던 장현을

45세의 젊은나이에 정2품 자헌대부로

임명할 정도로 그를 굉장히 총애 했다고 합니다

 

이후 장현은 숙종 3년에 종1품 숭록대부에 이르기까지 했던

최고의 역관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장현에게는 훗날 궁녀로 입궁하게 되는 5촌 조카가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희빈 장씨 입니다

 

그외에도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이

이완 장군을 등용할때의 일화도 굉장히 재미있는데요.

 

어느날 효종은 한밤중에 무신들을 급하게 궁으로 들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미리 군졸들에게 촉이 없는 화살을 주고

이 무신들이 궁내로 들어오면 활을 쏘라고 했던 것이죠

 

그렇게 새벽에 입궁하다가 난데없이 날아오는 화살에

무신들은 굉장히 당황해하며 허둥대고 있었는데

오직 이완만이 어명을 받들어야 한다며

여러발의 화살을 맞으면서 화살비를 뚫고

효종 앞에 도착했던 것이죠

 

그리고 효종은 그에게 어떻게 올수 있었냐고 물으니

그는 "전하께서 급하게 부르시니 어떤 큰일이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관복안에 두꺼운 갑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화살이 날아와도 개의치 않고 들어올수 있었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효종은 이완의 충성심에 크게 감탄하며

이완에게 상을 줌과 동시에 북벌의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했다고 하죠

 

효종은 가정생활에도 충실한 인물이었는데요

 

과거엔 스승을 존경하라는 의미로 땅바닥에 책을 놓은채

허리를 숙여서 수업을 받았다고 하죠

 

그런데 효종은 너무 사랑스러운 세자(현종)의 허리가 아플까봐

"세자가 보는 책이 공자의 말씀이 적힌 논어 인데

어찌 바닥에 두고 수업을 할수 있느냐" 며 책상에 올려놓고 하라고 했지만

실패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다정하고 풍채도 좋았던 효종은

의료사고로 인해 북벌은 하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고 말았는데요

 

그런데 워낙 갑자기 죽었던 탓에 정사와 야사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있죠

 

1659년 4월, 한 노인이 창덕궁 돈화문 앞에 홀연히 나타나

궁을 향해 소리를 쳤다고 하는데요

 

"6월에 나라에 큰 화가 있을것이니 불타버린 경복궁 터에 초가를 짓고

그곳에서 화를 물리치는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라고 외쳤다고 하죠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미친놈 취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달뒤인 6월, 효종이 갑자기 사망을 했던 것이죠

 

또한 효종의 부마인 정재륜이 저술한 <공사견문록>에는

1659년 4월에 세자가 학질에 걸려 오랜기간 앓아 누워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학질걸린 사람을 놀라게 하면

학질을 뗄수 있다'고 하는것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자 효종은 세자를 징광루 아래에 있게하고

궁녀를 시켜 몰래 기와를 가지고 누각 위로 올라가

밑으로 던져 깨트리고는 '궁녀 누구가 누각에서 떨어져 죽었다' 라고

일제히 외치게 했다고 하죠

 

이로인해 궁내에서는 난리가 나버렸는데

이 모습을 보고있던 한명의 나이든 궁녀가

"난 4대 조정(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을 받들었는데,

궁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면 조용히 진정시키는게 정상이지만

아무 일도 없이 일부러 무슨 일이 일어난것처럼 하였으니

상서롭지 못한 징조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노인이 나타났을때와 세자 학질때가

둘다 효종이 죽기 2달전에 일어난 일이니

확실히 좋지않은 징조가 보이긴 한것 같네요

 

그외에도 정재륜이 저술한 <한거만록>에서는

효종이 죽기 1달전에 창덕궁 후원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하나의 시를 읊었다고 합니다

 

雨後晴光萬綠新(우후청광만신록)

비 개인 뒤 맑은 빛에 온갖 초록이 새롭고

一堂長少是君臣(일당장소시군신)

한자리에 모인 늙은이와 젋은이는 임금과 신하로다

花臺柳榭渾如畫(화대류사혼여화)

꽃과 버드나무 속의 누대와 정자는 마치 그림 같은데

時有鶯聲喚主人(시유앵성환주인)

때때로 들리는 꾀꼬리 소리는 주인을 부르는구나

 

그런데 시를 다 읊고나서 "9월에 단풍이 들면 다시 부르겠다" 라고 말한뒤

갑자기 슬픈표정을 지으며 "뒷날 다시 만날것을 어찌 기약할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고 하죠

 

이런걸 보면 효종 자신도 어느정도 자신의 수명이 다한것을

알았던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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