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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효종. 왜란, 호란을 거치며 전국토가 초토화된 조선을 다시 안정시켰던 명군이지만 어이없는 의료사고로 사망한 왕

by 사탐과탐 2024.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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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 호란을 거치며 전국토가 초토화된 조선을 다시 안정시켰던 명군이지만
어이없는 의료사고로 사망한 왕이자 북벌을 외치던 효종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인조가 항복을 한뒤

조선의 세자였던 소현세자와 그의 동생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됩니다

 

훗날 소현세자는 조선에 돌아온지 약 2달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인조의 뒤를 이어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고

그가 바로 효종이죠

 

이 효종은 청나라에 볼모로 있으면서 당했던 치욕을

가슴속 깊이 새기며 복수를 다짐했고

왕이 된 이후 북벌을 외치게 되는데요

 

오늘은 조선의 17대 왕 효종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는 1619년 5월 광해군이 왕이었을 시기에

아버지 능양군과 어머니 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죠

 

이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아버지였던 능양군이 인조로 즉위하면서

그는 봉림대군에 봉해졌습니다

 

하지만 4년뒤 후금이 조선에 침략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이후 형제국이 될것으로 하고 후금군은 물러나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조선은 여전히 후금을 오랑캐라고 보고 있었고

그들에 대해 냉대하면서 명나라를 섬기고 있었기에

결국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말았죠

 

그러자 봉림대군은 아버지 인조의 명을 받아

동생인 인평대군과 함께 왕실 비빈과 양반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먼저 피난했지만

인조가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인조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고

이후 봉림대군은 형인 소현세자와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의

척화신들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약 8년간 볼모로 잡혀있게 되었는데

잡혀있는동안 적극적으로 세자였던 형을 보호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게 되었습니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해 들어갈때 소현세자에게 함께 갈것을 강요하자

봉림대군은 적극적으로 이에 대해 반대하고 나섰으며

소현세자 대신 자신을 데리고 가달라고 하기까지 했죠

 

산해관 뿐만아니라 청나라군이 공격하는 곳에는 강제로 끌려다니게 되는데요

 

몽골과 금주, 송산, 그리고 동쪽으로는 철령과 개원까지

억지로 끌려다니면서 청나라에 원한을 품게 되었으며

볼모 생활을 하면서 소현세자는 아담 샬 등 유럽에서 건너온 천주교 선교사들을 만나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배웠던 반면

봉림대군은 복수와 청나라 정벌을 다짐하게 되었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볼모가 된지 8년만인 1645년 2월에

형인 소현세자가 먼저 조선으로 돌아왔고

그는 계속해서 청나라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2달만인 4월에 소현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봉림대군은 조선에 돌아오게 되었는데요

소현세자가 죽었으면 소현세자의 아들이 세손이 되어

인조의 뒤를 잇는것이 종법상 맞는 일이었지만

인조는 국유장군론을 내세우며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고 강력하게 밀어붙인것이죠

 

그렇게 그는 결국 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5월,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왕인 효종으로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는 평생 정통성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요

 

자칫 잘못하면 형 소현세자의 아들들에게 갔어야 할 왕위를

자신이 빼앗었다고 여겨질수도 있는 노릇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있을때 까지만해도

형 소현세자와 형수 민회빈 강씨 부부와 친하게 지냈지만

왕이 된 이후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된 정통성을 위해서

소현세자의 아들들과 형수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효종은 민회빈 강씨를 신원할것을 요구하는 신하들을 모조리 처벌해 버렸는데

심지어 민회빈 강씨를 역강 ('반역자 강씨'라는 뜻) 이라고 불렀고

"역강에 대해 입을 놀렸다간 같은 역당으로 간주하겠다"며

신하들의 입을 막아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어쨌든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조선의 망가진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기초적인 군사력을 기르는데 온힘을 기울이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은밀하고도 강력한 북벌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즉위 직후 인조반정의 반정공신인 서인 공신계열과

김자점 등의 외척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어린시절 스승이던 송시열과 송준길 등을 영입했고

서인이지만 비공신이던 김집, 김상헌, 김육 등을 발탁했죠

 

이때 발탁된 인물들은 청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던 인물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청나라를 치는것은 군부국(君父國)인 명나라에 대한

신자국(臣子國)의 당연한 의무라는 논리로 효종의 북벌에 힘을 실어주었죠

 

또한 효종은 김자점 등 친청파들을 파직시켰으며

계속해서 북벌 계획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친청파인 김자점 등과 정명수, 이형장 등이

청나라에 북벌계획을 알려주면서 더욱 적극적인 군사계획은 펼칠수 없었죠

 

그러나 1651년, 조선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이 세상을 떠나면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던 태도는

전과는 확실히 다르게 굉장히 완화 되었는데요

 

효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귀인 조씨의 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등 친청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해버렸죠

 

이후 본격적으로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을 시작하면서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 훈련을 하는등 군사력 강화에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북벌의 선봉부대가 될 어영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강화했으며

금군을 기병화 했죠

 

그리고 더 많은 군사를 확보하기 위해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명으로 증액시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어영군은 군사 증강에 성공했지만

훈련도감군은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아쉽게도 실패하고 말았죠

 

이후 지방군인 속오군의 훈련도 강화하기 위해

보인제를 이용해 병사가 훈련에 전념할수 있도록 했습니다

(보인 : 병역의무자 이지만 직접 복무는 하지않고

복무하는 대신 베나 무명 등을 바쳤던 군인

실제 군복무중인 한명에게 2~4명씩 배당해

복무중인 한명의 군인이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제도)

 

그외에도 서울 외곽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지역으로 무장들을 파견해 성벽을 보수하고 군량을 저장하도록 했고

심지어 무장들에게 군사학을 강의하고

표류해왔던 네덜란드인 하멜을 훈련도감에 보내

조총과 화포 등 신무기를 개량하고 보수 하는 등

무기 개량에도 힘을 기울였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런 국방력 강화도 돈이 없으면 할수 없는 일이었으니

효종은 무너진 조선의 경제를 재건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여러번의 전쟁을 겪으며 경작하지 않는 토지가 늘어났고

그러자 농업 생산력이 급감하면서 백성들이 먹고살기도 힘들어졌던 것이죠

 

그로인해 당시 조선은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정도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든것이 망가진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에 효종은 김육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의 실시 지역을 확대 했고

백성들의 세금부담을 줄여주기도 했죠

 

또한 공주목사 신속이 엮은 <농가집성>을 간행해

농업 생산량을 높이는데도 힘을 썼습니다

 

또한 전쟁후에 흐트러진 윤리질서를 다시 바로 잡기위해

내훈과 경민편 등을 간행하는등

전쟁을 겪고나서 엄청난 손실을 입은 조선의 모든면을

다시 정상화 시키는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죠

 

그렇게 민생을 안정시키고 군사편제를 재정비 하면서

왜란과 호란으로 초토화된 조선은 그나마 안정을 찾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북벌론을 내세우며 군비 확충에 전력을 기울였음에도

청나라의 힘은 더욱 강해져 북벌의 기회를 잡을수 없었고

결국 군비 확충의 성과는 청나라의 강요로 인해

두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서 확인할수 있었죠

 

나선정벌 당시 지휘관이던 신유 장군은

전리품으로 플린트락 머스킷 한정을 빼돌려 조정에 바쳤는데

이는 조총보다 가격도 비싼데 구조가 워낙 복잡해서 생산이 힘들었죠

 

근데 성능은 조총보다 약간 더 좋았던터라 효종은

"이거 하나 만들바에 조총 3개 만드는게 낫겠다"며 생산을 취소했습니다

 

그런데 효종은 그렇게 북벌을 외쳤지만

단 한번도 청나라를 공격하지는 않았는데요

 

그는 아버지 인조와는 다르게

현실적이고 상식적으로 나라를 운영했던 것이죠

 

만약 복수를 외치며 청나라를 공격할 이상주의자였다면

청나라를 공격하고 이후 한번 더 청나라에 의해

조선의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피해를 입었을테지만

당시 효종은 조선의 국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청나라를 공격하는 어리석은 짓은 일부러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망가질대로 망가진 조선을 다시 재건하는데 집중했던 효종은

어이없게도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버리는데요

 

죽은이유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바로 의료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것이죠

 

당시 효종의 얼굴에 종기가 나서

그에 대한 치료를 두고 두 의관의 의견이 달랐습니다

 

신가귀의 주장은 '침으로 피를 빼내어 독기를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유후성의 주장은 '전하의 머리에 경솔히 침을 놓을수 없다'는 의견이었죠

 

하지만 과거에 신가귀의 침으로 인해 종기가 나은적이 있었던 효종은

신가귀의 의견을 받아들여 침을 놓으라 명했고

그렇게 신가귀는 수전증이 있었지만 효종 얼굴에 난 종기에 침을 꽂았습니다

 

그렇게 침구멍에서 농즙이 나온이후 검붉은 피가 줄줄 나왔고

그러자 효종은 "이제서야 정신이 좀 든다"며,

"신가귀가 아니었으면 큰일날뻔 했다" 라고 말했죠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신가귀가 찌른 침이 혈관을 건드렸는지

피가 멈추지않고 계속 쏟아져 나온것이죠

 

신가귀를 비롯한 많은 의원들이 필사적으로 지혈을 했지만

지혈이 되지 않았고 결국 그날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도 갑작스레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채 우왕좌왕 했다는데요

 

염습을 하는 동안에 시신이 부패하고 약물에 의한 부작용으로 인해

시신이 부풀어 오르기도 했으며

그러다보니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조선시대에는 왕의 관을 미리 만들어 놓았었기 때문에

효종이 재위하는동안 어깨가 너무 넓어져서 시신이 관에 들어가지도 않았던 것이죠

 

결국 기존의 관에 널빤지를 대고 늘려서

효종의 시신을 관속에 넣었던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효종이 죽은 이후 조선에서는

역사상 가장 치열한 사상 논쟁이 발생하게 되죠

 

비록 북벌의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북벌을 준비해 나가면서 조선의 국방력이나 경제가 그나마 나아지고

전란 이후 민생을 수습하려 노력했으며 다시 조선이 안정되었다는걸 보면

효종은 많은 업적을 남긴 명군이기도 했습니다

 

효종이 만약 더 오래 살았다면 더욱 많은 치적을 남기고

조선이 더 안정될수도 있었을것 같은데 아쉽기도 하네요

 

지금까지 청나라를 공격하자는 북벌론을 내세우며

조선을 조금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효종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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