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만큼 악행을 저지른 왕자들이 많았었습니다.
양녕대군의 아들 '이혜'가 그러했었지만 그중에서도 선조의 아들인 순화군 '이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악행을 저질렀던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만큼 악행을 저지른 왕자들이 많았습니다.
저희 채널에서 소개한 양녕대군의 아들 이혜도 그러했고 선조의 아들 중에는 인간 말종 왕자 3인방도 있었는데요.
임해군, 정원군,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인물 순화군도 왕실의 골칫거리 왕자였죠.
순화군은 어릴 적부터 사이코패스 기질이 다분했다고 합니다.
성품 자체가 굉장히 잔혹했는데 동물들을 잔인하게 학대하거나 죽였죠.
선조실록에 따르면
내(선조)가 말하는 것은 미안하긴 하나 내가 만약 말하지 않으면 조정이 어떻게 알겠는가.
순화군의 성격과 기질은 극히 이상하여 어릴 때부터 천성적으로 잔인하였다.
이제 저곳에서 하는 일이 모두 사람을 때려 죽이는 짓으로 잔혹하기 그지없으니, 더욱 괴롭기만 하다.
비록 주색이나 잡기와 같은 것에 미친 사람이라면 그래도 괜찮겠으나 순화군은 그렇지 않다.
라며 기록이 돼있을 정도였죠.
아버지인 선조가 차라리 술과 여자에 빠져있거나 다른 것에 빠져 있으면 오히려 괜찮을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순화군이 13살이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됩니다.
선조의 강원도에서 의병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이미 강원도는 왜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어있는 상태였기에 어쩔 수 없이 함경도에 있는 임해군을 만나 함께 회령에 주둔하고 있던 상태였죠.
그러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함경도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렸는데 이에 열받은 사람들은 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해서 순화군과 임해군을 붙잡아 일본에 넘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약 1년 정도 왜군의 포로가 되어 고된 생활을 겪다가 풀려났는데요.
그 이유에서인지 성격은 더 포악해지기 시작했죠.
그가 1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을 때는 황해도 신계에 잠깐 머물렀었는데 그때도 백성들에게 트집을 잡기 시작하더니 하루에도 여러 명의 백성들을 두들겨 패기에 보다 못한 이이첨이 선조에게 건의해 관직을 삭탈 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말기에는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수많은 사람을 잔혹하게 죽일 정도로
이미 연쇄 살인마에 가까운 인물이 되고야 말았죠.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더욱 잔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즐거워서 저지를 정도의 심각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죠.
매년 10명 정도의 사람을 꾸준히 죽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막장 행보를 보이는 순화군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짓을 일삼는 아들의 행실을 항상 눈감아주던 선조도 문제였죠.
그런데 어느 날 선조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순화군이 궁에서 한 궁녀를 겁탈하는 중죄를 저지른 것인데요.
때는 1600년 6월 27일.
선조의 아내였던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순화군이 대낮에 의인왕후를 모시던 궁녀를 의인왕후의 관이 있던 빈전 옆 여막에서 강제로 겁탈해버린 것이죠.
원래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웃어른의 궁녀를 건드리는 것은 금기였는데 순화군 이보는 자신의 어머니 격이던 중전의 궁녀를 건드린 것도 모자라 심지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던 중에 어머니가 모셔진 관 앞에서 그런 짓을 한 것입니다.
또한 모든 궁녀들은 모두 왕이자 아버지인 선조의 여자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여자를 건드리는 패륜마저 저지른 셈이었죠.
이사실을 안 선조는 여태껏 사람을 죽여도 눈감아줬는데 이번에는 참을 수 없었는지 순화군의 처벌을 지시하게 됩니다.
당시엔 강간을 하면 곧바로 사형에 처해졌는데 종부시에서는 그래도 왕의 아들을 사형시키기엔 좀 그랬는지 장 80대에 유배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선조에게 보고했죠.
저런 나쁜 놈을 왜 사형시키지 않냐 하겠지만 사실 장 80대를 맞으면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이미 반쯤 죽어있는 상태인데 그 상태로 치료받지 않고 먼 유배지까지 걸어가게 되면 거의 99% 죽음에 이르는 사형에 준하는 형벌이었습니다.
아니면 장 80대를 맞다가 죽을 수도 있었고요.
하지만 보고를 받은 선조는 또 답답한 판결을 합니다.
순화군을 그냥 경기도 수원으로 유배를 보내는 걸로 사건을 마무리 지은 것이죠.
그렇게 중죄를 지은 순화군은 장 한 대도 맞지 않고 그냥 유배지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기고만장해졌던 것일까요?
순화군의 악행들은 유배지인 수원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왕 조차도 어쩌지 못해서 멀리 보내버린 왕자를 수원에 있던 관리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죠.
순화군은 하인들에게 관아의 처벌 도구들을 꺼내 오게 하더니 마음에 안 들던 아전들을 마구잡이로 두들겨 팼고 순화군의 횡포에 관리들이 모조리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수원의 행정업무가 완전히 마비 되기도 했습니다.
이 순화군의 횡포를 들은 조정에서는 결국 순화군을 위리안치 시키기로 결정했는데 하지만 순화군에게는 이 또한 소용이 없었습니다.
금부도사가 담장을 쌓을 때도 방해하며 인부들을 두들겨 팼고 문을 잠그면 부수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순화군의 횡포를 버티지 못하고 수원부사가 도망을 치자 다음 수원부사로 권경우가 부임해 왔죠.
하지만 왕자인 자신에게 인사를 하러 오지 않고 바로 관아로 향하자 순화군은 이에 앙심을 품었고 또다시 패악질을 해댔습니다.
그는 긴 칼을 차고 말을 타고 관아로 달려가서는 칼을 휘둘러 기둥을 치면서 "부사의 몸에서는 피가 나오지 않는다더냐?" 라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종이에 사람 머리를 그려놓고 '부사 권경우의 잘린 머리통' 이라고 써놓았는데 이 일로 인해 겁에 질린 권경우는 업무를 보지 못했고 머지않아 수원부사 자리에서 잘리게 되었죠.
게다가 순화군은 힘없는 백성들에게도 온갖 극악무도한 짓을 해댔는데요.
자기가 먹을 채소가 신선하지 않다며 채소밭을 맡고 있던 노비의 숙모를 잡아다 두들겨 팼고 밥상에 소고기와 생선이 없자 창고지기였던 노비의 집을 불태워버리기도 했으며 술을 가져다준 원금이라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기도 했죠.
또한 역시 술을 가져다준 여종 주질재의 옷을 모두 벗긴 후 묶어놓고 하루 종일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돌똥이라는 사람의 집에 병이 들자 역신이 들었다 생각한 장돌똥은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순화군이 이들을 잡아와 고문을 하고 옥에 가두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무당의 위아래 치아를 1개씩, 그리고 장돌똥의 위아래 치아 9개씩을 쇠망치로 때려 깨부수고 집게로 잡아 빼버렸죠.
그러자 무당은 결국 옥 안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장돌똥은 다음날 풀려나긴 했지만 살아남기 힘들 정도의 상해를 입은 뒤였습니다.
사태가 그 정도까지 가자, 언제 이 쓰레기 같은 놈에게 죽을지 모르던 백성들은 순화군을 피해 다른 고을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죠.
그러자 큰 고을이던 수원에 백성이 없어 고을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순화군을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여 집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선조는 순화군의 군호를 폐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버렸죠.
하지만 순화군의 악행은 그치질 않았습니다.
못 나오게 문을 막자 또 담을 허물고 길거리로 나와 백성들을 붙잡고 곤장을 치는 등 여전히 답도 없는 짓거리들을 했습니다.
이에 사헌부에서는 순화군의 이러한 만행을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다며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선조는 여전히 순화군을 감싸주었죠.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아버지 빽으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자 이제는 더 막장짓을 하고 다닙니다.
무뢰배들과 패거리를 만들어 그들을 자신의 집에 살게 하고 그들과 함께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마주친 사람들을 시도 때도 없이 죽이기도 하고 두들겨 패기도 했죠.
그러자 백성들은 순화군이 온다는 소리만 들려도 멀리 도망가거나 숨었으며 패거리들은 사람들이 숨고 없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훔치는 등 마치 도적처럼 행동했습니다.
이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냐면 선조실록에는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해 마치 호환을 피하듯이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죠.
게다가 오죽하면 사관이 '한 명의 왕자를 죽이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백성들은 무슨 죄로 죽어야 하는가' 라고 주석을 달아 놓았을 정도였습니다.
더 이상 순화군의 악행을 봐줄 수 없었던 선조는 군사를 보내 순화군을 붙잡아 집안에서 한 발자국도 밖에 나오지 못하게 하도록 명했는데 이 과정에서도 순화군은 순순히 붙잡히지 않았고 온갖 난동을 부리며 행패를 부리자 신하들은 또다시 선조에게 어떻게 하냐 물어도 돌아오는 선조의 대답은 알아서 하라는 식의 대답뿐이었죠.
시원하게 결정해 주지 않는 답답한 선조였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군사까지 보낸 덕에 순화군은 결국 집에 갇혀 수년 동안 집안에서만 살았으며 다행히도 그 동안은 사람을 죽이지 못했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풍병에 걸려 쓰러졌고 온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지만
조정에서는 별다른 치료를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땐 이미 선조도, 대신들도 통제 불가능한 개망나니 순화군이 그대로 그냥 죽기를 바랬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러다 결국 1607년 2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는데 서인으로 강등되었던 그는 훗날 순화군으로 다시 복권되었습니다.
순화군이 훗날 누구보다 욕을 먹는 이유는 주로 사회적 약자이던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구타하며 죽이는 식의 행패 부렸기 때문이기도 하죠.
게다가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지속적으로 순화군을 탄핵했음에도 이런 망나니 아들을 두둔하기만 했던 선조도 큰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왕자로 태어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겼을 정도로 잔인하고 포악한 인물, 순화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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