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이자 매국노 진회에게 죽임을 당한 남송의 구국의 영웅이자 중국 최고의 명장 악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예전 저희 채널에서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라고 일컬어지는 진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진회가 이런 평가를 받는 이유는 바로 남송 최고의 명장이자 구국의 영웅 악비를 죽여서이기 때문이죠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바로 이 악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악비는 1103년 하남성 상주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죠
그가 태어날때 큰 새가 지붕위에 앉았던걸 범상치 않게 여긴 그의 아버지가 그의 이름을 비(飛)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황하가 범람하는 바람에 그의 고향 마을이 잠겨버리면서 아버지가 홍수에 휘말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야사에 따르면 다행스럽게도 그의 어머니인 요씨는 악비를 품에 안은채로 커다란 바구니를 타고있었던 덕분에 겨우 목숨을 구할수 있었습니다
악비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도 쌔며 굉장히 용맹했다고 하죠
그리고 당시 창술과 검술의 달인이던 진광으로부터 무예를 배웠고 최고의 명궁으로 일컬어지던 주동에게 궁술을 배워 뛰어난 활 솜씨까지 갖추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학문과 병법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매일밤 잠들기 전에 손자병법을 읽었을 정도로 학문에도 정진해 어릴적 이러한 경험들은 훗날 자신이 최고의 명장이 되는데 크나큰 도움이 되었죠
그렇게 악비는 19세가 되던해에 의용군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금나라와의 질긴 악연이 시작되었죠

어느날 악비는 기병 백여명을 거느리고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갑자기 금나라군이 나타난것이죠
심지어 자신들의 병력은 백여명 밖에 되지 않았는데 금나라 군은 얼핏봐도 자신들보다 병사가 많아 보였던 것입니다
이에 쫄아버린 병사들이 어쩔줄 몰라하자 악비는 그들에게 "당황하지 마라, 적은 우리의 병력이 얼마인지 모른다 놈들이 손을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치면 이길수 있다" 라고 한것이죠
그리고 순식간에 금나라군 한가운데로 돌진해 적장의 목을 베어버렸고 이에 기세가 등등해진 병사들도 금나라군을 공격하자 기겁한 적들은 혼비백산 달아나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악비의 용맹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죠
이때쯤 악비에 대한 재미있는 야사가 있는데요
악비는 종택의 부하가 되어 계속해서 금나라 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가 어느날 종택이 병에 걸려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나서 군의 통솔을 맡은 장군은 두충이라는 인물이었죠
그는 종택과 달리 금나라와 싸우려 들지 않자 악비는 그대로 군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악비의 어머니 요씨는 그에게 다시 군으로 돌아가라며 혼을 내면서 악비의 등에, '진충보국'이라는 네 글자를 새겨주었고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며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말했죠
그렇게 악비는 어머니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다시 군으로 돌아가 금나라와의 전쟁을 이어나갈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1126년, 금나라 군이 화북지방을 침공 하자 그들과 맞서 싸우던 악비는 도저히 병력차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송나라의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말았죠
그렇게 정강의 변 사건이 일어나 송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로 끌려가고 고종은 남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이때 악비도 고종을 따라 남쪽으로 떠났는데요
훗날 그는 우한과 양양을 거점으로 하면서 호북성 일대를 영유하는 군벌이 되었죠
악비는 백성들에게 평판도 너무 좋았습니다
그가 이끄는 군대는 '악가군(岳家軍)' 이라고 불렸죠
악가군은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했는데요
그들은 행군 도중 마을을 지나다 야영을 해야 할때면 백성들의 집을 빼앗아 그곳에서 자지 않고 길가에서 노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병사들에게 집에 들어와 쉬라고 해도 어느 누구도 백성들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죠
'얼어 죽는한이 있더라도 백성의 집 나무를 뜯어 불을 피우지 않으며 굶어 죽는한이 있더라도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 않는다' 라는것이 악가군의 규율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악비와 악가군이 자신의 마을앞을 지나갈때면 백성들이 서로 술과 고기를 바쳤다고도 하죠

악가군은 전투에서도 얼마나 강했는지 매번 승리를 가져갔으며 금나라 병사들은 악가군을 두려워했다고 하는데요
금나라 군은 "태산을 흔드는건 쉽지만 악비의 군사들을 흔드는건 어렵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하죠
그리고 계속해서 남하하는 금나라 군대를 한세충, 장준, 유광세 등의 군벌들과 협력하여 그들을 막아낸 결과 회하 이남으로는 더이상 내려오지 못하게 하는데 성공했으며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금나라 철기군을 계속해서 격퇴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고종과 남쪽으로 피신한 악비는 고작 31살의 나이에 청원군절도사가 되었으며 2년후에는 선무부사, 그리고 일년후에는 선무사로 임명되었고 계속해서 금나라와의 전투를 치르며 그들에게 빼앗긴 장강과 회하 사이에 위치한 중원 지역의 일부를 다시 수복할수 있었죠
그리고 그는 남송의 황제가 된 고종에게 강하게 북벌론을 주장했습니다
이대로 계속 북진하여 금나라에게 빼앗긴 모든 영토를 다시 되찾아와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때 금나라와 화친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재상 진회와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진회는 고종에게 일단 금나라와 화친을 하고 힘을 기른뒤 훗날을 도모하자고 주장하며 준비를 하지 않은채 금나라와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면 남송 역시 불바다가 될것이라고 했죠
이에 악비는 금나라는 믿을수 없을뿐만아니라 화친을 하면 그들의 종이 될것이라며 진회와 고종에게 말했습니다
또한 진회에게는 재상이 나라의 이익을 도모하지 못하면 훗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게 될것이라며 역정을 냈죠
그렇게 악비가 대표인 주전파와 진회가 대표인 주화파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계속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고종의 아버지이던 휘종이 1135년 6월 금나라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고종은 아버지 휘종의 시신과 함께 금나라에 잡혀있던 자신의 어머니 위현비를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죠
이에 금나라는 막대한 거금과 공물을 바치고 다른 여러 악조건을 받아들이는 강화조약을 맺어야만 보내주겠다고 하는것이었습니다
원래 고종은 남송을 세우고나서 처음에는 금나라를 치기위한 준비를 하려고 주전파였던 이강을 재상에 앉혔었는데요
결국 그러한 준비들이 금나라를 자극하게 되었고 이에 남송으로 침공해 들어온 금나라 군대를 피해 처절하게 도망을 다녔던 기억이 있는 고종은 아버지의 시신도 받아 장례도 치뤄야 하고 어머니도 보고싶기도 했기 때문에 그들과 싸우기보다 화친을 맺는것이 먼저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주전파 재상이던 이강을 파직시켰고 금에 대항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해 이강이 금나라 군대를 대비해 구축했던 여러 진지들을 스스로 다 때려 부숴버렸습니다

이런 고종의 노력(?) 덕분인지 1139년에 남송과 금나라는 강화조약을 맺게 되었죠
그러자 남송은 스스로를 금나라의 신하로 칭해야했고 금나라에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1년후인 1140년 10월, 금나라 내부의 화친파가 반대파와의 권력다툼에서 밀리면서 화의 협정을 깨고 올출을 대장으로 삼아 다시 남송 침공을 시작했죠
이를 막아선건 다름아닌 악비를 비롯한 한세충, 유기 등 남송의 명장들이었습니다
올출은 남송의 군대중 비교적 약한 장준의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었을뿐 연전연퇴를 거듭하죠
악비는 부장들에게 적군의 진로를 틀어막는 한편 하동과 하북의 의병들에게는 적군의 후방을 기습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유기가 이끄는 팔자군은 올출의 군대를 격퇴했으며 악가군은 언성과 영창에서 금군을 작살내버렸죠
이에 오히려 금나라 군대가 밀리기 시작해 영창, 진주, 정주, 낙양 등을 다시 수복할수 있었으며 계속 승전보를 올리면서 북송의 수도 였던 개봉에서 불과 15km 떨어진 주선진까지 밀고 올라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각지의 의병들은 기뻐하며 악비의 군대에 속속 합류했고 백성들은 수레로 식량들을 운반해 왔으며 어떤 사람들은 춤을 추며 악비의 군대를 환영했죠
이에 기세등등해진 악비는 흥분하며 부하들에게 온 힘을 다해 적을 쳐부수고 금나라의 수도 황룡부까지 진격하면 승전을 축하하며 코 삐뚤어지게 술한잔 거하게 먹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금나라를 다시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죠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던 금나라의 대장 올출은 퇴각을 하려고 했지만 부하 중 한명이 이런 말을 했는데요
"예로부터 간신이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으면 아무리 능력이 있는 장군도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곧 송나라 내부에 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라고 했던것이죠
이 말을 들은 올출은 즉시 진회에게 밀서를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바로 '당신이 화친을 원한다면 악비를 죽여라 악비가 죽지 않으면 우리가 마음을 놓을수 없다' 라는 것이었죠
이에 예전부터 그와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던 진회는 결국 그를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에 주화파 인물들과 악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조정 대신들은 그를 온갖 죄목을 갖다붙여 모함하기 시작했죠
그러자 당시 고종의 마음도 진회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참 기세가 좋던 악비를 조정으로 불러 들여버렸고 나머지 군벌들도 철군을 명했습니다
그렇게 악비가 돌아오는 길에는 백성들의 통곡소리가 가득했다고 하죠
거기다가 1141년이 되자 조정에서는 군제개편을 명목으로 악비와 한세충, 유기, 그리고 양기중 등 군벌들의 병권을 박탈하고 모든 병사들을 중앙군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진회는 악비를 죽일 명분을 만들기 위해 그의 부하였던 장헌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고 했고 이 일에는 악비의 아들 악운까지 연루되어 있다고 모함을해 그들을 잡아 들였고 지독한 고문을 받게 되었죠
그리고 얼마안가 악비 마저 잡혀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강도높은 고문을 가해도 악비는 반역을 꾀했다는 거짓고변을 하지않고 버텼고 그에게 붙은 죄목들도 증거가 전혀 없다보니 진회는 어떻게 하나 고민을 하기 시작했죠
그러자 진회의 아내이던 왕씨가 뭘 그렇게 고민하냐 그냥 죽여버리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자 진회는 그녀의 말대로 그냥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때 악비가 처한 상황을 알게된 한세충은 격분하며 진회를 찾아가 악비를 잡아간 증거를 대라고 소리쳤죠
그러자 진회는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아마 있을것이다" 라는 얼토당토 안한말을 했고 이에 더 열받은 한세충은 그걸 말이라고 하는것이냐,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지 않냐며 강력히 항의 했습니다
하지만 악비의 죽음을 막을수는 없었죠
진회는 악비가 죽기 전날 그를 찾아가 "그대는 죽음으로써 충신으로 기록될것이고 나는 희대의 간신으로 기록될 것이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의 승자는 나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결국 악비는 39세의 젊은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죽기 전 유언으로 "나의 결백한 마음은 하늘의 태양처럼 밝을것이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는데요
독살을 당했다는 말도 있고, 처형당했다, 사약을 먹고 죽었다 라는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고 하죠
아무튼 그가 죽고나서 옥졸이던 외순(隗順)은 몰래 그의 시신을 빼내 장사지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악비의 시신을 진회가 훼손할 것을 염려한 외순은 시신을 자신의 집에 있는 나무 밑에 묻었고 자신이 죽을 무렵 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하죠
이후 악비를 너무 사랑하는 효종이 즉위하고나서 악비는 누명이 풀리게 되었고 시호로 무목(武穆)을 받아 구국의 영웅으로 여겨졌으며 1204년에는 영종이 악비를 왕으로 추존하여 항저우의 악왕묘(岳王廟)에 배향되었고 시호를 충무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악왕묘에는 진회와 부인왕씨, 그리고 묵기설, 장준 등이 무릎꿇고 있는 동상이 만들어져 악비 동상 앞에 놓였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하도 진회 등 간신들 동상에 침을 많이 뱉다보니 지금은 동상에 침을 뱉지 말라는 팻말이 걸려 있을정도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중국에 문화대혁명이 불어닥치자 홍위병들의 마수를 피해 가지 못했고 악비의 묘를 파헤친뒤 유골을 불로 태워 재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했죠
악비는 구국의 영웅이자 최고의 명장으로 여겨지는 한편 진회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로 여겨졌는데요
그러나 최근에는 악비의 전공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대부분 악비 후손들이 쓴 행장을 바탕으로 하다보니 다른기록과 교차검증이 안되거나 공신력 있는 사서에 채택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죠
악비전의 기록만 봐도 불과 500명의 병사로 올출의 10만대군을 작살 냈다는 이야기나 800명으로 도적 50만명을 격파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군을 격퇴한 명장들이 없지는 않았으니 말이 안되는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일들을 완전히 다 믿는것도 애매하긴 한것 같죠
그렇다보니 악비의 불분명한 기록과 과장된 전공은 학계에서도 비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최근 중국 정부의 역사공정으로 인해 교과서에서 악비는 구국의 영웅이라는 평가가 점점 지워지고 있으며 진회도 역시 재평가를 받고 있다고 하죠
남송 최고의 명장으로 구국의 영웅이었다가 마지막에는 간신 진회에게 모함을 받아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악비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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