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 최고의 명장이자 구국의 영웅 악비를 죽음에 이르게한 중국 최악의 매국노 진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악비는 중국 남송시대의 명장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이순신장군 급으로 중국인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죠
이순신장군은 노량해전때 적의 흉탄에 맞아 전사하셨지만 이 악비는 매국노라고 일컬어지는 한명의 인물로인해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마는데요
악왕묘에 가면 악비의 동상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또 다른 동상을 볼수 있는데 그 동상 인물들 중 한명이 악비를 죽인 인물이자 오늘 이야기할 인물이죠
오늘은 구국의 영웅 악비를 죽음으로 몰고간 남송의 재상이자 매국노, 진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진회는 1090년 현재 난징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25살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해 그 이후로는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죠
그러던 중 1115년 금나라가 건국이되고 금나라가 요나라를 박살내기 시작하자 송휘종은 금나라로 사신을 보내 요나라에 바치던 공물을 금나라에 바치겠다고 하며 요나라를 협공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요나라는 송과 금의 협공으로 멸망하고 말았죠
그런데 문제는 요나라를 박살내고 나자 송휘종은 금나라에 제시했던 땅과 공물 등 모든 조건들을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입을 싹 닦아버린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송휘종은 곧바로 요나라의 패잔병들을 모아 금나라까지 공격하려 하다가 발각되어 머리 끝까지 화가 난 금나라는 북송을 침공했죠
이에 발등에 불떨어진 북송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어떻게 대처할지를 고민하게 되는데요
이때 진회는 금나라와 화친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숙이고 들어가자는 주장이 아니라 금나라가 요구한 북방 영토 3진 중 1진만 내주고 시간을 끌다가 송나라의 방위를 굳건히 한 다음에 그때 금나라와 싸울건지 화친할건지를 정하자는 주장이었죠
그러나 이미 주전론을 선택한 송희종은 진회의 화친 주장을 깡그리 무시해버렸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송나라는 금나라의 상대가 되지 못했죠
심지어 곽경이라는 사이비 도사에게 속아 육갑신병이라는 병사들만 믿고 있다가 아주 아작이 나버렸고 1127년 송휘종과 흠종은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정강의 변' 이라고 부르고 있죠

아무튼 이때 송나라의 많은 신하들도 잡혀가게 되었는데 이때 진회 역시 금나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포로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던 중 금나라가 화북지역 통치를 위해 허수아비 국가인 초나라를 세워 송나라 재상이던 장방창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려고 했는데요
어느날 금태종은 포로로 잡혀있던 송나라의 황족과 신하들을 모아놓고 장방창의 초나라 황제 등극에 지지하는 서명을 강요했죠
이에 다들 억지로 서명을 했는데 유일하게 진회만이 "황성은 오직 송의 조씨뿐입니다" 라고 외치며 지지 서명을 거절했고 초나라 건국에 격렬히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진회의 이런 태도에 분노한 금태종이 그를 죽이려 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금나라 대신들이 황제를 말리자 진회는 목숨을 건질수 있었죠
금태종 앞에서 모두가 죽을까 겁이 나있던 상황에 대놓고 이런걸 보면 진회의 배짱도 정말 대단한데요
이를 눈여겨본 완안창은 그를 자신의 참모로 썼지만 1130년이 되던해 완안창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는 휘종의 아들이 세운 남송으로 도망가버렸습니다
남송의 황제 고종은 처음에는 진회를 금나라의 첩자로 의심했지만 진회가 주화론을 주장하면서 악비와 같은 주전파 군벌들을 견제하자 고종은 진회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고 바로 예부상서로 임명한 뒤 얼마안가 진회를 재상에까지 임명하게 되었죠
이후 남송과 금나라 사이에서는 휴전 협상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국경을 어디로 할것인지와 금과 남송의 지위를 어떻게 할지가 화친의 주된 관건이었습니다
이에 남송 내부에서는 주전파와 주화파로 분열되어 진회는 주화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주전파는 악비가 이끌게 되었죠
악비는 정강의변 당시 고종과 함께 남쪽으로 피신했었는데요

수차례 남송을 침공해오던 금나라 군대를 잘 막아내며 '태산을 흔드는건 쉽지만 악비의 군사를 흔드는건 어렵다' 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남송 최고의 명장이었습니다
악비는 강하게 금나라를 치고 올라가서 빼앗긴 영토를 되찾자고 주장했고 이에 진회와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던 것이죠
심지어 악비의 용병술은 너무나 뛰어나 매번 승전보를 가져다 주었고 그가 그러면 그럴수록 진회는 그를 더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강의 변이 있기전에도 진회는 일단은 화친을 하고 나중에 힘을 기른후에 공격을 하던말던 하자라는 주장이었고 포로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산 경험도 있으니 준비가 되지 않은채 또다시 금나라를 건드렸다가는 남송마저 불바다가 될것이라 여긴 진회도 강력하게 화친을 주장했죠
악비는 고종에게 금나라를 믿을수 없을 뿐만아니라 화친을 하면 금나라의 종이 될것이라면서 금나라를 공격해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회에게도 한마디 했는데요
바로 "재상이 나라의 이익을 도모하지 못하면 훗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게 될것이다" 라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회는 꿀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말 할수 없었죠
그러던 와중에 고종의 아버지이던 휘종이 금나라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금나라는 화친이 성사 되면 휘종의 시신을 주겠다 했고 이에 주화파와 고종 모두 휘종의 시신을 남송으로 모셔와야 한다고 하면서 막대한 거금을 공물로 바치는 조건으로 화친을 맺게 되었죠
그리고 고종은 휘종과 황후의 시신을 돌려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화친을 맺고나서 1년후인 1140년 5월, 금나라는 약속을 깨고 올출을 대장으로 삼아 남송으로 쳐들어 왔는데요
이를 막아선건 송나라의 명장 악비였죠
연전 연패를 거듭하던 올출은 진회에게 화친을 원한다면 악비를 죽이라는 밀서를 보냈고 예전부터 악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진회는 결국 그를 죽이기로 마음을 먹게 되죠
진회는 즉시 악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묵기설과 장준 등 에게 그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쓰게했습니다
그리고 악비와 반대세력이던 수많은 신하들에게도 그를 모함하게 했죠

그리고 1141년에 진회는 기습적으로 군제재편을 하면서 당시 군벌들의 지휘권을 모두 박탈해 버렸으며 모든 병사들은 중앙군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당시 남송의 황제이던 고종도 진회의 편을 들어주고 있던 터라 악비를 허구헌날 소환했고 결국 악비는 양자였던 악운과 최측근 부하 장헌과 함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죠
그리고 악비와 자식들까지 극심한 고문까지 받게 되는데요
악비가 끝까지 버티며 거짓고변을 하지 않자 진회는 악비에 대한 처결을 어떻게 하나 고심하던차에 부인이던 왕씨가 뭘그렇게 고민하냐고 그냥 죽이라고 조언했고 1141년 1월, 결국 송나라의 명장이자 영웅 악비는 39살의 나이로 살해당하고 말았죠
그가 죽기전 또 다른 남송의 명장이던 한세충이 진회를 찾아와 악비가 죽을 이유를 대라며 따졌는데 진회는 그에게 "막수유 (莫須有 : 아마 있을것이다)" 라는 세글자로 답했다고 하죠
이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던 한세충은 고작 그 세글자로 천하가 납득하겠냐며 강력히 항의했지만 악비의 죽음을 막을수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한세충은 모든 관직을 버리고 서호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지내다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그리고 진회는 악비가 죽기 전날 그를 찾아가 "그대는 죽음으로써 충신으로 기록될것이고
나는 희대의 간신으로 기록될 것이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의 승자는 나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 주전파들을 싸그리 숙청해버린 진회는 다음해인 1142년에 드디어 금나라와의 화친을 진행시킬수 있었죠
하지만 화친의 조건은, 남송에게는 너무나도 불리했었습니다
화친조건으로 황하강 이북의 땅을 금나라에 모조리 갖다 바쳤고 매년 25만냥의 은과 25만필의 비단을 공물로 바쳤어야 했으며 남송의 황제가 금의 황제에게 신하로써의 예를 취해야 한다는 조건이었죠
이 때문에 이후로 진회는 매국노라는 수식어를 달게 되었던 것입니다

화친을 맺고난 이후에도 진회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끊임이 없었죠
그러나 진회는 자신의 뜻에 반하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탄압하고 모조리 죽여버리는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펼쳤습니다
그렇게 악행을 떨치던 진회도 죽을뻔한적이 있는데요
어느날 입궐하는 진회를 죽이려고 한 자객이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지만 빗맞고 말았고 진회는 놀란 말에서 떨어져 죽을뻔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된것이죠
그 이후부터는 자신을 호위하는 무사들을 50명이나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1155년이 되자 그는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요
진회가 죽은날 고종은 "짐은 오늘부터 신발속에 칼을 감추지 않아도 되겠구나!" 라는 말을 했다고 하죠
황제였던 고종이 그런말을 했을 정도로 진회의 권세는 무서울 만큼 강했다는걸 알수 있습니다
진회가 죽고나서 고작 두달후에 그의 친인척들은 모조리 숙청당하고 말았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고종은 악비의 명예를 회복시켜줌과 동시에 악왕으로 추봉했습니다
진회도 죽고나서 신왕으로 추증되었지만 1206년 영종이 황제였을때 왕작이 추탈되었고 시호도 유추(謬丑)로 바꿨다가 다시 유한(謬狠)으로 고쳤다고 하죠
여기서 유(謬)는 그르치다와 속이다 라는 뜻이고 추(醜)는 추하다는 뜻이며, 한(狠)은 사납다, 원한을 품다라는 뜻으로 그의 바뀐 시호 두개 다 완전 나쁜 의미 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명나라 때 어떤 사람이 진회와 부인 왕씨, 그리고 묵기설과 장준이 무릎을 꿇은채 앉아있는 동상을 만들어 악비 묘 앞에 놓고 죄를 빌게 했는데 그 이후로 현재까지 그들은 악비의 묘 앞에 꿇어 앉아서 전시되고 있죠
중국인들은 이 동상들에 침을 뱉고 발로 차기도 했지만 하도 침을 많이 뱉다보니 이제 침 뱉지 말라는 안내판을 설치해 뒀다고 하죠
그리고 이 진회와 왕씨의 동상은 훼손이 심해 약 800여년동안 12번이나 새로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자를 쓰지 않는다고 하죠
또한 중국인들 사이에는 진회를 미워하는 감정이 드러나는 속담도 있는데요
"진회도 친구셋은 있다" 와 "칼을 천번 맞을지언정 진회와 사귀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바로 그것입니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자주 먹는 음식인 '요우티아오'는 진회를 미워하던 어떤 사람이 밀가루 반죽으로 진회부부의 인형을 만들고 때린 다음 기름에 넣고 튀겨 먹었던것에서 유래한다고 하죠
그만큼 진회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버렸는데요
금나라에 비해 군사력이 현저히 약하던 남송에게는 화친을 맺는것이 당시 상황으로썬 어쩔수 없었던 처세 였던것인데 점점 영웅시 된 악비를 숙청한 행위 때문에 현재까지도 그는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중국은 다른 소수민족들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라고 하는 역사공정 작업이 활발해 지면서 송을 정복한 금나라 역시 중국의 역사라고 선전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지금까지의 평가와는 반대로 악비는 평가 절하되었으며 진회는 국가를 전쟁의 화마에서 구해낸 인물로 재평가 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일반 중국인들에 대한 평가는 예전과 크게 차이가 없으며 악왕묘 앞 진회와 부인왕씨의 동상도 그대로 있죠
중국 역사상 최악의 매국노라고 일컬어지는 진회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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