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파는 노익장의 대명사로 춘추전국시대 거의 혼자서 조나라를 지켜냈지만 고약한 성질머리 때문에 암울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장이자 삼국지의 황충과 함께 노익장의 대명사로 알려진 염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염파가 흔히 노익장의 대명사로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가 늙은 나이에도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생겼을 뿐 실제로 그는 젊은 시절부터 손에 꼽는 명장이었다고 하죠
전국시대에 가장 뛰어난 명장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탁월한 장수인 동시에 지력까지 갖춘 문무겸비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염파의 조국인 조나라는 전국칠웅 가운데 손꼽히는 강국이었지만 하필 최강인 진나라와 가까이 있다는 지리적 약점 탓에 빠르게 그 세력이 약해져 버린 비운의 나라였죠
하지만 염파가 한창 활약하던 시기만 해도 조나라는 무령왕이 시행한 호복기사 개혁의 결과로 영토와 국력이 크게 올라간 상태였고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평원군, 인상여, 조사 등 걸출한 인재가 잇달아 등장하면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인상여와 염파가 버티고 있을 시기에는 천하의 진나라도 쉽사리 조나라를 건드릴 엄두를 못 냈을 정도였는데요
그 시기 진나라의 왕이 바로 전국시대 최고의 정복군주로 이름 높은 소양왕이었음에도 말이죠
사기에 나와있는 염파의 기록을 보면 염파는 기원전 283년 진나라를 쳐서 석양을 점령한 후 다음에는 제나라를 쳐서 양진을 함락시킨 공으로 상경에 임명되면서 그의 용맹은 당시 제후들 사이에서 너무나도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기원전 276년에는 누창이 위나라의 기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자 염파가 대신 파견되어 기를 함락시켰으며 다음 해에도 염파는 위나라의 방자와 안양을 공격해 빼앗았죠
기원전 270년에는 진나라의 군대가 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그 길목에 있는 조나라의 연여를 공격했고 이에 수비를 위해 출동한 조나라의 군이 진나라군을 물리치자 패배한 진나라군은 방향을 바꾸어 위나라의 기를 공격했는데 이때 염파가 나타나 기를 구하고 진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고 하네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진나라는 착실히 성장을 거듭한 반면 조나라의 전성기는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조나라의 전성기를 이끌던 인상여, 조사와 같은 인재들마저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염파는 혼자 힘으로 진나라의 거침없는 공격을 막아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기원전 262년 진나라는 전국 칠웅 중 최강으로 나머지 6국의 힘을 합쳐도 상대가 안될 정도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죠
실제로도 진나라는 여러 나라를 압박하고 괴롭히고 있었으며 공갈과 협박을 서슴지 않을 정도의 깡패 국가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진나라가 명장 백기를 보내 약소국인 한나라의 상당을 공격하려 하자 그 소식을 들은 한나라의 상당 태수는 조나라에 냉큼 항복을 해버렸고 그렇게 닭 쫓던 개 꼴이 돼버린 진나라는 군사들을 출전시켜 조나라와 일대 결전을 벌이게 되죠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장평대전입니다
장평 대전은 기원전 262년에서 기원전 260년에 걸쳐 중국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회전(전면전)으로 중국 전국 시대의 판도를 변하게 만든 대표적인 전투의 하나였기 때문에 장평의 승리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패전국인 조나라에게는 몰락을 가져다준 결정적인 전투였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최후의 승자는 진나라가 되기는 했지만 이 장평대전의 초반부에 염파가 조나라군의 대장으로 있을 때만 해도 진나라군은 염파의 수비를 뚫지 못해 매우 곤란해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수비를 굳히고 진나라군의 보급을 어렵게 만들면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염파였지만 조나라 조정은 그런 염파를 지원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진나라의 뇌물 공세와 유언비어에 넘어가 그를 해임해 버렸죠
이후 염파의 후임으로 부임한 조괄은 45만 명이라는 병력이 있음에도 새롭게 진나라군의 대장으로 부임한 백기의 유인책에 걸려서 그야말로 순식간에 개박살이 나버렸다고 하니 그동안 그 강력한 진나라군을 상대로 버텨낸 염파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죠
그렇게 총대장 조괄이 죽으면서 조나라는 장평대전에서 대패하게 되고 이후 멸망 직전까지 몰린 조나라는 주변국가에서 보기에는 너무나도 탐스런 먹잇감이 되었기 때문에 평소 그들과 사이가 좋지 않던 연나라에서 침략을 해왔는데 이때 염파가 늙은 몸을 이끌고 참전해 조나라를 구해냅니다
염파는 지금의 하북성 백향현 북부에서 연나라군을 크게 쳐부수고 이후 연군을 추격해 연의 도읍이었던 계를 포위한 뒤 연나라로부터 다섯 개의 성을 넘겨받고 그들과 화친을 맺었죠
조의 효성왕은 염파의 오랜 공적을 기려 위문이라는 지역의 땅을 하사하고 그를 신평군에 봉했으며 얼마 후에는 공석이던 상국 대행자리에 그를 앉혔습니다
기원전 245년에는 염파가 위나라를 쳐서 번양의 성을 함락시키며 다시 한번 염파의 전성기가 오나 싶었는데 하필이면 그 직후 조나라에 있던 효성왕이 죽고 도양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이 염파에게는 불운이었죠
태자 시절 때부터 염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도양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염파를 장군직에서 파면시켜 버린 후 그의 후임자리에 악승이라는 인물을 임명해 버렸습니다
이에 한을 품은 염파는 후임 장군이 된 악승을 공격해 버렸고 이 일로 더 이상 조에 머무르지 못하게 되자 위나라로 망명하게 되죠
하지만 염파는 위에서는 별다른 신임을 얻지 못했고 그에게 대군을 지휘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새롭게 진나라의 왕으로 등극한 시황제에게 염파가 떠난 조나라는 매우 탐스런 공격대상으로 보였는지 진시황은 군대를 보내 신나게 조나라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나라의 도양왕은 염파에게 사자를 보내 그가 아직 진나라를 상대할 힘이 있는지 살펴보게 했는데 도양왕의 의도를 눈치챈 염파는 80이 넘는 고령의 몸으로도 한 끼 식사에 밥 한 말, 고기 열 근을 먹어치우는 왕성한 식욕에 갑옷을 입고 한바탕 말을 달리는 무력시위까지 하면서 자신이 아직 쓸모 있음을 도양왕에게 보이려고 했지만 하필 왕이 보낸 사자가 염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간신 곽개에게 이미 매수당한 상태라는 게 문제였습니다
염파를 만난 후 다시 조왕에게 돌아간 사자는 염파도 이제 나이가 들어 다른 노인들과 다를 것 없어졌다는 보고를 올렸고 그의 말을 들은 도양왕도 염파를 쓸 생각을 포기해 버렸죠
결국 위나라에서 중히 쓰이지 못하던 염파는 초나라로 갔지만 그곳에서도 장군으로 임명되지도 공을 세우지도 못한 채 세월만 흘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 "나는 그저 조나라 군사들을 지휘하고 싶을 뿐이다" 라는 말을 남긴 후 수춘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나게 되죠
염파의 기록을 보다 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의 성격이 굉장히 솔직하고 화끈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솔직하고 화끈한 면 때문인지 '염파인상여열전'을 비롯한 당대 기록을 살펴보면 정치력이 부족한 모습을 조금씩 보여주기도 하는데요
물론 '기전파목'중 왕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간신의 모함으로 숙청당하기는 했지만 똑같이 숙청을 당한 백기, 이목과 비교해 보아도 염파의 성격은 확실히 화끈하다는 느낌이 강하다고 볼 수 있죠
이런 염파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기원전 279년 조나라의 명신 인상여가 회담에 참석해서 큰 공을 세운 대가로 상경이라는 관직에 임명되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염파가 인상여는 고작 말 몇 마디 잘한 걸로 전쟁터에서 많은 공을 세운 자신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았다며 만약 그를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망신을 주겠다고 길길이 날뛴 일이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인상여는 그 뒤로 계속 염파를 피해 다녔는데 인상여의 지인들은 그가 염파를 두려워해서 피한다고 생각하고는 크게 실망해서 그를 떠나려는 모습을 보였죠
이에 인상여는 진나라가 지금 조나라를 침공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염파와 자신이 있기 때문인데 이럴 때 내가 염파와 싸우는 것은 나라를 위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며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나라의 급한 일을 더 우선시하자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였고 그 말을 전해 들은 염파도 직접 인상여를 찾아가 사과를 했다고 하는데요
이 일화를 비롯한 몇 가지 기록만 봐도 염파가 정치를 그리 잘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같은 '기전파목'의 일원인 왕전이 이목이 지휘하는 조군을 꺾지 못했지만 정치를 굉장히 잘해서 결국 초나라를 멸망시켰고 편안한 노후를 보낸 것과는 비교되는 모습이죠
게다가 앞서 말한 것처럼 도양왕에게 파직당하고 조나라를 떠날 때 그 후임자인 악승이 이끄는 부대를 공격까지 해버린 것 또한 큰 실수였는데 물론 염파의 입장에서 보면 왕이 자신을 숙청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군권을 빼앗기자마자 자국 군대를 상대로 내전을 벌인 것은 조나라는 물론 타국의 인물들에게 너무나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남길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매우 불행한 말년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이러한 일화들을 종합해 보면 염파가 그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주 쫓겨 다닌 이유는 간신의 모함도 모함이지만 그의 정치력 부족도 큰 이유가 됐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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