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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폭군 간신 탐구

요도도노.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애첩으로 온갖 비밀이 많았던 일본 3대 악녀

by 사탐과탐 2023.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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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도도노는 임진왜란의 원흉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애첩으로 오늘날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전국시대 여성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있는 인물입니다
일본 3대 악녀 중 한명으로 유독 비밀이 많았던 요도도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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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상 많은 나라에는 손꼽히는 악녀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의 3대 악녀로는 여태후와 서태후, 그리고 측천무후가 있고 조선의 3대 악녀로는 장녹수, 정난정, 그리고 장희빈이 있죠

하지만 세월이 지나 인물들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하면서 기존에 사람이 빠지고 다른 사람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일본에도 3대 악녀가 있는데요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히노 도미코 그리고 호조 마사코와 요도도노가 있죠

오늘은 일본 3대 악녀중 한 명인 요도도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도도노는 우리나라의 원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첩실로 그녀가 악녀로 평가받는 이유는 다 그녀가 낳은 자식들 때문이죠

과연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역사에 길이 남을 악녀로 이름을 남겼을까요?

 

그녀의 어릴적 이름은 차차였습니다

차차는 오미국 오다니성의 성주인 '아자이 나가마사'와 어머니 '오이치' 사이의 첫째 딸로 태어났죠

어머니 오이치는 당시 최고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이었는데 아자이 나가마사와는 정략결혼으로 맺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아자이 나가마사가 쇼군 일가와 손을 잡으면서 오다 가문과의 사이가 악화 되어 결국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아버지 나가마사가 세상을 떠나고 오다니 성이 함락되면서 차차는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구출되어 또 다른 외삼촌이던 오다 노부카네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죠

그러던 1582년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면서 오다 노부나가가 세상을 떠나자 셋째 아들인 오다 노부타카는 오다 가문의 중신인 시바타 가쓰이에와의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자신의 고모이자 차차의 엄마이던 오이치를 가쓰이에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그 이후로 차차는 어머니 오이치를 따라 가쓰이에의 거성인 기타노쇼성으로 거처를 옮겨 살게 되죠

하지만 얼마 안 가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를 정하다가 오다 노부타카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손잡고 하시바 히데요시와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결국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히데요시에게 패배한 가쓰이에는 1583년 기타노쇼 성에서 오이치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도 잃은 차차와 두 여동생은 결국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거두어져 그의 보호를 받기 시작했죠

이때 그녀는 두 동생에게 "너희들은 오미의 명문 아자이 가문의 딸들이다 꼴사납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라며 훈계했을 정도로 자존심 강하고 기가 센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후 히데요시는 차차의 다른 두 여동생은 시집을 보내버렸지만 차차만은 20살이 지나도록 시집을 보내지 않고 있다가 1588년 그녀를 자신의 측실로 삼아버렸죠

그런데 이 일에 대해 재미있는 썰이 있는데 차차의 어머니인 오이치를 사모하고 있었던 히데요시가 어머니를 가장 닮아 출중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던 차차를 측실로 맞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녀의 어머니 오이치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최고의 미녀로 유명했는데 차차가 그녀의 어머니를 쏙 빼닮아 그녀 역시 당대 최고의 미녀로 이름을 날렸던 것이죠

 

당시 호색가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실부인 코다이인도 있었고 측실만 15명이나 두었었는데 그녀를 측실 중 가장 총애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바로 그녀의 미모 때문이었다고 할 정도로 미녀였던 것이죠

그리고 측실이 된지 얼마 안 가 그녀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1589년 아들 도요토미 쓰루마쓰를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없던 히데요시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엄청나게 기뻐하며 요도성을 차차에게 하사했는데 이때부터 그녀는 '요도성의 마님'이라는 뜻의 '요도도노'로 불리게 된 것이죠

 

그런데 첫째아들이 태어나고 얼마 안 가 그녀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다른남자와 바람을펴 임신을 하게 되었고 사실 쓰루마쓰는 히데요시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들이라는 것이었죠

이에 격분한 요도도노는 이 소문을 낸 사람들을 모조리 악착같이 색출해 내 다 잡아들였고 그들은 모두 잔인하게 처형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녀의 불륜설이 거의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고 하는데요

당시 천하가 알아주는 호색가였던 히데요시는 정실부인인 코다이인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었고 측실 15명에게서도 자식을 보지 못했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마 히데요시는 무정자증 이었을 거라고 보는 시각이 있죠

심지어 그의 측실 중 한명은 과거 아이를 다섯 명이나 낳은 여자도 있었기 때문에 임신을 하는데 여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훗날 낳게되는 히데요리는 키가 무려 197cm에 체중은 161kg이나 되는 거구였다고 하는데 키가 140cm에 불과했던 작고 왜소한 히데요시와 전혀 닮지 않았던 것이죠

또한 가신이던 오노 하루나가는 요도도노와 어릴 적부터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사이로 당시에도 두 사람이 내밀한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히데요리가 아마 하루나가의 자식일 것이다라는 설도 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쓰루마쓰가 태어난 당시에 히데요시는 50세를 넘은 나이였고 심지어 둘째 히데요리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50대 중후반의 나이었기 때문에 젊을 때도 아이를 낳지 못했던 히데요시가 유독 요도도노에게서만 두 명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어쨌든 히데요시의 뒤를 이을 아들을 낳은 요도도노는 수많은 특권을 부여 받으면서 강력한 권력을 손에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쓰루마쓰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았는데 불과 2년후인 1591년, 쓰루마쓰는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이에 히데요시는 촌마게(일종의 일본식 상투)를 자를 정도로 크게 슬퍼했고 더 이상 아들을 낳는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한 히데요시는 자포자기한 채 쓰루마쓰가 죽은지 3개월 만에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하고 관백자리를 물려주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조선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는데 1592년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기 직전에 히젠 나고야 성으로 거처를 옮기자 이때 요도도노 역시 그를 따라 그곳으로 갔죠

그리고 얼마 안 가 임진왜란을 벌였을 당시 요도도노가 또다시 히데요시의 아들을 임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년 후인 1593년, 요도도노는 히데요시의 둘째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게 되었죠

 

그러자 히데요시와 요도도노는 친아들인 히데요리를 다음 후계자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현재 후계자인 조카 히데쓰구와 갈등이 생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1595년, 히데요시는 히데쓰구를 모반죄로 몰아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고 결국 히데요시는 후계자로 히데요리를 삼게 되었죠

그런데 히데쓰구를 숙청할 당시 그의 처자식에 시녀들까지 수십명이나 되는 히데쓰구의 가솔들이 모조리 참수당하고 말았는데 히데쓰구의 처자식중에는 다른 영주의 딸도 있었기 때문에 이일로 인해 도요토미 가문에 앙심을 품은 영주들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또한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와 친했던 영주들까지 숙청하려 들었기 때문에 수많은 영주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죠

요도도노가 낳은 첫째 자식 때문에 불륜에 대한 소문을 낸 수많은 사람이 그녀에 의해 죽임 당했고 둘째 자식 때문에 기존에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던 도요토미 가문의 후계자 문제가 다시 시끄러워 지기 시작하면서 이후 히데쓰구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 그리고 수많은 영주들까지 도륙당하게 되었고 그렇게 그녀는 희대의 악녀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다음 최고 권력자가 될 히데요리를 낳은 요도도노의 권세는 정실부인이던 코다이인에 뒤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죠

그러던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유재란을 일으키고 얼마 안 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그녀는 아들 히데요리를 데리고 난공불락의 성인 오사카 성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요도도노는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서 정치와 인사 등에 개입하며 사실상 오사카 성의 수장이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히데요시의 장례식 중 한가지 일화가 있는데요

히데요시의 정실부인이던 코다이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히데요시의 관에 넣자 그 모습을 보던 요도도노는 질 수 없다는 마음에 히데요리가 손을 씻은 물을 히데요시의 관안에 넣었다고 합니다

이에 코다이인은 아직 살날도 많고 앞날이 창창한 히데요리와 관련된 것을 관속에 넣다니 불길하다는 말을 했다고 하죠

 

어쨌든 히데요리는 아버지의 뒤를 이었지만 아직 6살밖에 되지 않았던 탓에 가신들을 관리하지 못했고 영주들을 비롯한 신하들과 점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죽고나서 가장 강력한 영주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도요토미 가문과 사이가 나빠진 영주들을 포섭하는 등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죠

 

이에 친 도요토미파 였던 이시다 미쓰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야망을 막기 위해 반 이에야스 세력을 규합한 뒤 군대를 일으켜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와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습니다

요도도노는 대놓고 이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기기를 바라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결국 이시다 미쓰나리의 패배로 세키가하라 전투가 막을 내렸고 그렇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린 히데요리를 제치고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죠

 

그렇게 히데요리와 요도도노가 이끌던 도요토미 가문의 힘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약화되어 버렸습니다

히데요시는 전국에 분포되어 있던 수많은 직할시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고작 셋쓰, 가와치, 이즈미 3개국 65만 석을 지배하는 다이묘로 전락해 버렸죠

하지만 도요토미 가문은 조정의 관위로는 도쿠가와 가문에 필적했으며 히데요시에게 큰 은혜를 입은 다이묘들이 아직 건재했기 때문에 이에야스도 아무런 명분없이 히데요리를 쳐낼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도도노는 계속 도쿠가와 가문의 세력이 커져가는 것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죠

그렇게 도요토미 조정의 의견이 이에야스와 화친을 맺어야 한다와 싸워야 한다로 나뉘어져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614년, 호코지 대불전이 완성되었는데 여기서 큰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죠

 

호코지 대불전은 과거 요도도노가 도요토미가의 부흥을 위해 각종 신사와 사찰들을 새로 짓거나 보수를 했었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호코지였던 것입니다

호코지 대불전이 완성되고 곧이어 범종도 완성이 되었는데요

그런데 범종에 새겨진 글귀 중 "국가안강 군신풍락(國家安康, 君臣豊樂)" 이라는 구절을 보고 이에야스 측에서 화내며 난리를 쳐버렸던 것이죠

 

범종에 새겨진 글귀 중, 국가안강은 이에야스의 이름(家康)을 산산조각 내어 그를 저주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군신풍락에서 도요토미(豊臣)가의 이름을 거꾸로 넣은 것은 도요토미가의 부흥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라는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에 요도도노는 화친파였던 가타기리 카츠모토를 비롯해 여러 사람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내 해명도 하고 그를 달래보려 했지만 오히려 이에야스는 요도도노를 인질로 보내던지 아니면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죠

이 요구를 받아들일수 없었던 요도도노는 이에야스와 화평을 주장하며 중개 역할을 맡은 가타기리 가쓰모토와 다른 신하들을 추방해 버렸고 이에야스와 한판 붙자고 주장하던 오노 하루나가를 중용하면서 결국 이에야스와의 타협할 가능성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1614년 겨울이 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병력을 일으켜 오사카성을 포위하면서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죠

요도도노는 전장으로 나가 병사들을 독려하긴 했지만 정작 총대장인 히데요리를 데리고 나오지 않자 오히려 병사들의 비판만 받게 되었고 오사카 성 내에서 이에야스의 공격에 맞서 고군분투했지만 히데요시를 따르던 다른 영주들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기에 결국 그녀는 이에야스에게 화해를 요청하게 됩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지만 이듬해인 1615년이 되자 다시 오사카성을 공격한 이에야스는 결국 오사카성을 함락시켰고 요도도노는 아들 히데요리와 함께 할복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이후 요도도노가 살아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요

요도도노가 실제로 할복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고 카이샤쿠를 모리 카츠나가가 맡았다고 했지만 그녀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카이샤쿠 : 할복자가 할복을 할 때 뒤에서 참수시켜주는 사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요도도노가 히데요리를 데리고 다른곳으로 도망가서 조용히 살았다는 주장을 했던 것이죠

이후 그녀가 살아오면서 살았던 아버지 나가마사의 오다니성, 두 번째 남편인 가쓰이에의 키타노쇼성 그리고 아들 히데요리의 오사카성이 모두 함락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전국 제일의 불운녀'로 불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요도도노는 일본의 3대 악녀로 악명이 높은데 희안한 점은 2017년 일본에서 실시한 '가장 좋아하는 전국 시대의 여성' 이라는 설문조사에서 4위까지 했다고 하죠

중국에 비하면 그다지 무서운 악녀로 보이지는 않지만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자이긴 한 것 같네요

 

지금까지 요도도노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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