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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폭군 간신 탐구

호조 마사코. 막부의 평화 시대를 열었지만 정작 악녀로 낙인 찍혀버린 일본의 3대 악녀

by 사탐과탐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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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마사코는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이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부인으로 훗날 막부시대의 평화기를 열었지만 정작 악녀로 낙인 찍힌 일본의 3대 악녀입니다
비구니 쇼군으로 알려진 호조 마사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일본의 3대 악녀인 히노도미코와 요도도노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근데 중국 3대 악녀와 비교해서는 전혀 악녀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과거에 권력을 두고 부모와 자식간에 투쟁을 했던 수많은 사례가 있듯이 오늘 이야기할 인물도 일본의 3대 악녀로 일컬어 지고는 있지만 흔히 있던 권력다툼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악해 보이지는 않죠

오히려 굉장히 강력한 여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바로 호조 마사코 입니다

그녀는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정실부인으로서 굉장히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되죠

호조 마사코는 1157년, 이즈노쿠니의 호족이던 호조 도키마사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156년 7월, 그녀의 인생을 뒤흔드는 큰 사건이 벌어지는데요

 

바로 황위승계문제로 천황파와 상황파, 이 두 세력으로 나뉘어진 조정은 결국 무력충돌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충돌을 호겐의 난이라고 부르죠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국 고시라카와 천황파가 승리를 거두면서 호겐의 난은 끝이나게 됩니다

그런데 전쟁 후 있었던 논공행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포상이 생각보다 적었던 반면 별다른 공을 세우지 않았던 다이라 기요모리는 큰 포상을 받자 요시토모는 엄청난 불만을 갖게 되었죠

 

한편 고시라카와 천황의 측근으로 2명의 실력자가 있었는데 바로 후지와라 미치노리와 후지와라 노부요리였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치열한 경쟁상대였고, 이때쯤엔 권력투쟁이 극에 달했으며 결국 후지와라 미치노리는 다이라 기요모리와 손을 잡고 후지와라 노부요리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같은편이 되어 1160년 1월 기요모리가 참배를 떠난틈에 요시토모와 노부요리가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죠

그렇게 그들은 상황과 천황을 궁궐에 유폐시키고 도망치던 미치노리를 사로잡아 참수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노부요리와 요시토모는 조정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죠

이 소식을 들은 다이라 기요모리는 급히 교토로 돌아와 군대를 소집했고 다시 발생한 전투에서 다이라 기요모리가 승리를 거두며 노부요리는 죽임을 당했고 요시토모 역시 도망가던 중 가신의 배신으로 첫째, 둘째 아들들과 함께 죽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미나모토 집안은 몰락하고 말았고 이때 살아남은 요시토모의 아들들은 목숨은 건질수 있었지만 셋째 아들이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이즈 지역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 것이죠

그렇게 미나모토 집안과 다이라 집안은 철천지 원수사이가 되었습니다

이즈 지역은 호조 마사코가 살던 지역이었는데 그녀의 아버지 호조 도키마사는 유배되어 온 요리토모의 감시역을 맡게 되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요리토모를 감시하면서 만나게 된 마사코는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죠

그 사실을 알게된 호조 도키마사는 다이라 가문에게 들킬까 두려워 마사코를 얼른 다른 집안의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버리려고 했지만 밤을 틈타 몰래 도망나온 마사코는 비바람을 뚫고 산 하나를 넘어 요리토모를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요리토모와 마사코는 어느 신사로 도망쳐 그곳에서 지냈죠

 

그리고 1178년, 둘은 첫째 딸 오오히메를 낳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알게된 호조 도키마사는 그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호조 집안은 요리토모의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죠

그러던 1180년, 황족이던 모치히토 왕이 전국에 흩어져있던 미나모토 가문에게 다이라 가문을 토벌하기 위한 거병을 권하는 밀지를 보내게 되는데 이 밀지가 마사코의 남편이던 요리토모에게도 전해지게 되었고 그도 역시 호조가문의 지원을 받아 거병하게 되었죠

 

이때 호조 가문은 군사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요리토모의 거병 소식을 들은 이복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 미나모토노 노리요리도 그를 찾아와 휘하에 참여 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이시바시산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한번 위기가 찾아오지만 무사들이 계속해서 요리토모를 찾아오면서 요리토모 군은 어느새 수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되었고 미나모토 집안의 연고지이던 가마쿠라를 본거지로 삼았죠

 

이후 요리토모는 후지가와 전투에서 다이라 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간토 지역을 착실히 확보해 나갔고 요리토모는 결국 도고쿠의 주인으로서 '가마쿠라 도노'라 불리게 되었으며 마사코 역시 '미다이도코로' 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줄곧 이즈산에 숨어살던 마사코도 드디어 가마쿠라로 옮겨와 함께 살게 되었죠

그러던 1182년, 그녀는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 아이는 훗날 2대 쇼군이 되는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입니다

 

그런데 이때 그녀에게 악녀 타이틀이 씌워지게 된 사건이 벌어지는데요

마사코가 임신하고 있는 동안 남편 요리토모는 가메노마에 라는 여인을 총애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 사실은 마사코의 아버지 도키마사의 후처인 마키 노가타가 마사코에게 전해주게 되었는데 이 말을 들은 마사코는 격분했고 마키 노가타의 아버지인 마키 무네치카에게 명령해 가메노마에를 잡아들이고 그녀가 살던 후시이 히로쓰나의 집을 다 때려 부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마키 무네치카는 히로쓰나의 집을 다 때려 부순 뒤 도망친 가메노마에를 잡으려 했지만 결국 잡지 못했죠

이 소식을 접하게된 요리토모는 굉장히 분노하면서 마키 무네치카를 힐문하며 자신이 직접 그의 상투를 잘라 버리는 등 온갖 모욕과 수치를 줬습니다

그러자 호조 도키마사는 자신의 장인에게 치욕을 준 것에 분노해 일족 모두를 이끌고 이즈로 돌아가버리는 난리가 나기도 했죠

 

또한 화가 덜풀린 마사코가 노발대발하자 요리토모는 결국 애첩 가메노마에를 숨겨주던 히로쓰나를 유배 보내기까지 하면서 마사코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도 요리토모는 수많은 여자와 정을 통했는데 당시 고위층 남자들은 일부다처제가 보편적이었지만 요리토모는 마사코가 화낼까봐 무서워 몰래 만났다고 하죠

 

사실 당시 작은 호족에 불과했던 호조집안 출신의 마사코가 귀족인 요리토모의 정실로써 신분이 너무 미천했기 때문에 그녀는 정실부인이라는 지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내는 걸 격하게 쳐낼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그녀는 질투심 많은 악녀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요리토모는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라는 인물과 당시 같은 일족이지만 라이벌 비슷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일단 공동의 적인 다이라 가문에 대항하기 위해 요리토모와 요시나카는 화합을 하기로 했고 요시나카의 아들인 요시타카와 요리토모의 딸 오오히메를 결혼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요시타카는 가마쿠라(요시토모의 근거지)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정략결혼이었지만 오오히메는 요시타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죠

그러던 1184년 1월, 요시나카는 고시라카와 법황을 협박해 쇼군 지위를 얻어냈습니다

 

그러자 법황은 요리토모에게 요시나카 토벌의 명령을 내렸고 이에 요리토모는 이복동생이던 요시쓰네와 노리요리를 보내 그를 토벌해 버렸죠

그리고나서 후환을 없애기 위해 가마쿠라에 있던 요시나카의 아들 요시타카를 죽일 것을 명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오오히메는 요시타카를 급하게 피신시켰습니다

격분한 요리토모는 토나이 미쓰즈미를 보내 급히 요시타카를 추격해 그를 죽이라고 명했죠

그렇게 결국 추격대에 따라잡힌 요시타카는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오오히메는 엄청난 상심에 빠져 병져 눕게 되었습니다

 

이에 마사코는 요리토모에게 오오히메 어쩔 거냐며 격하게 항의하자 요리토모는 어쩔수 없이 미쓰즈미를 처벌했지만 오오히메의 마음의 병은 치유될 수 없었고 결국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죠

한편 요리토모는 도고쿠를 다스리고 있었고 그의 이복동생들인 노리요리와 요시쓰네는 다이라 가문을 상대로 전투를 치르고 있었는데요

 

이복동생들은 거듭 승리를 거두고 있다가 1185년 마침내 단노우라 전투에서 다이라 가문을 멸하게 되었죠

하지만 그이후 요시쓰네는 요리토모를 거치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기도 했고 요리토모의 허가없이 조정으로부터 관위를 받기도 하면서 요리토모의 눈밖에 나버렸고 둘은 대립하다가 요시쓰네는 결국 도망쳐 히데히라에게 몸을 의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애첩인 시즈카 고젠이 붙잡히게 되는데 이때 마사코는 당시 가무의 일종인 시라뵤시의 달인이었던 시즈카 고젠에게 춤을 보여줄것을 청하죠

 

그러자 마지못해 시즈카 고젠은 춤을 췄는데 그 속에 담긴 노랫말이 남편인 요시쓰네를 그리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요리토모가 분노하자 이때 마사코는 요리토모에게 "당신이 유배를 왔을 때와 거병하고 나서 목숨을 건 전투를 펼칠 때의 저의 심정이 지금 시즈카와 같습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었어도 당신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라며 요리토모를 설득했고 그러자 그는 화를 거두고 시즈카에게 상을 내렸다고 하죠

 

마사코는 남편의 첩에게는 가차없이 대했지만 그게 아닌 다른 여성들에게는 많은 호의를 베풀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시즈카 고젠은 당시 요시쓰네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요

요리토모는 시즈카 고젠이 낳은 아이가 남자면 죽이고 여자면 살려주라 명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는 남자였고 결국 아기는 어딘가에 유기되어 목숨을 잃게 되었죠

 

이때 마사코는 요리토모를 찾아가 아이를 살려줄것을 요청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상심한 시즈카 고젠을 위해 그녀가 교토로 돌아갈때 오오히메와 함께 많은 재물을 선물했다고 합니다

마사코와 오오히메도 요시타카의 일이 생각나 더욱 마음이 쓰였던 것이겠죠

어쨌든 오슈로 도망간 요시쓰네는 1189년 4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고 요리토모는 그 기회를 틈타 오슈를 침공해 후지와라가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1190년, 대군을 거느리고 교토로 입성한 요리토모는 2년 후인 1192년, 막부 최고 실력자인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죠

 

그리고 얼마 안 가 마사코는 아들 사네토모를 낳게 되었습니다

마사코가 사네토모를 임신하고 있을 때 요리토모는 또 다시 다이신노 쓰보네라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들 죠쿄를 낳았는데 마사코가 두려웠던 나머지 아이의 출산을 축하하는 의식도 생략해버렸고 다이신노 쓰보네와 아들 죠코는 마사코에게 해코지를 당할 것이 무서워 몸을 숨겨버렸으며 유모도 두지 못한채 숨어 살다가 결국 아들이 7살이 되었을때 둘은 마사코로부터 도망치다시피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마사코의 위세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알게 해 주는 대목이네요

그러던 1193년 어느날 요리토모가 사냥을 떠났을 때 갑자기 소가형제가 그들의 원수인 구도 스케쓰네를 죽이는 사건이 터지고 가마쿠라에는 소문이 와전되어 요리토모가 살해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러자 마사코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는데 당시 가마쿠라에 있던 요리토모의 이복동생 노리요리가 "여기엔 제가 있으니 걱정 마세요" 라며 그녀를 위로해 주었던 것이죠

 

하지만 요리토모에게는 아무일 없었고 가마쿠라로 돌아온 요리토모에게 마사코는 이 이야기를 해줬는데 이 말을 들은 요리토모는 노리요리를 모반 혐의로 의심하기 시작했고 이후 그를 이즈에 유폐시켰고 얼마 후 죽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요리토모가 거병할 당시 도와주겠다며 달려온 이복동생 요시쓰네와 노리요리가 결국 요리토모에게 죽임 당하고 만 것이죠

 

이후 그녀는 갈수록 우울증이 깊어지던 딸 오오히메도 고토바 천황과 결혼하게 되면 기뻐할것이라 생각하고 결혼을 추진했지만 오오히메의 병은 더욱 깊어졌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1197년, 2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사코는 딸의 죽음에 자신도 따라 죽으려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슬퍼했다고 하죠

그리고 고작 2년 후인 1199년 1월, 남편이던 요리토모가 낙마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해 6월에는 둘째딸이던 산만히메까지 죽고 말았죠

이때 마사코는 "나도 이제 끝이라 생각했는데 나까지 죽으면 아직 어린 자식들이 부모 둘을 모두 잃는 것이니 아이들을 버릴수는 없다" 고 하면서 정신을 차린뒤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는데 아들 요리이에를 2대 쇼군으로 올린 뒤 그녀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쇼군의 친어머니 였기 때문에 막부의 정권을 장악한 뒤 아버지 호조 도키마사와 남동생 호조 요시토키와 손을 잡고 정치를 이어나가기 시작했죠

 

이후 마사코는 막부 내에서 친정이던 호조가문의 지위향상과 실권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녀는 여장부스러운 행보를 하기 시작하는데요

요리이에가 쇼군이 되고 난 이후 아다치 가게모리라는 신하의 애첩을 빼앗았는데 이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는 가게모리가 모반의 혐의가 있다며 군사를 출병시켜 그를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들은 마사코는 가게모리를 찾아가 그에게 모반의 의사가 없다는 서약서를 쓰라고 명하는 동시에 요리이에를 엄하게 꾸짖고 가게모리를 죽이려면 나부터 죽이라며 사태를 수습했던 것이죠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였던 요리이에는 계속해서 자신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고 축국에만 몰두하는 등 망나니 짓을 하고 다녔는데 마사코가 충고를 해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요리이에에 대해 많은 신하들의 불만이 높아지기 시작했죠

또한 요리이에는 히키 요시카즈의 딸과의 사이에서 아들 이치만을 낳는 등 히키 가문 인물들을 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마사코와 외척이던 호조가문의 섭정에 반하여 장인인 히키 가문과 손을 잡은 것이죠

히키 가문의 힘이 세지는 만큼 호조 가문은 위협이 되었고 요리이에의 막장 정치가 계속되자 마사코는 요리이에의 힘을 빼앗아 오오에노 히로모토, 가지와라 가게토키, 히키 요시카즈, 호조 도키마사, 호조 요시토키와 같은 유력한 신하들에 의한 13인의 합의제를 결성해 쇼군 1인 통치를 끝내버리고 합의제에 의한 정치를 시작해 버렸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던 1203년 어느 날, 급작스레 요리이에가 중태에 빠지고 마는데요

그러자 마사코와 호조 도키마사는 요리이에를 쇼군에서 폐하고 쇼군이 일본 전체를 다스리던것을 반으로 나누어 반은 요리이에의 아들 이치만이, 나머지 반은 마사코의 아들 사네토모가 통치하는 걸로 결정해 버렸죠

이 소식을 들은 히카 요시카즈는 병상에 누워있던 요리이에에게 찾아가 호조 가문이 정치를 농단한다며 그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요리이에도 그의 뜻을 받아들여 토벌을 명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대화를 몰래 듣고 있던 마사코는 급히 파발을 띄워 아버지 호조 도키마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도키마사는 급하게 군사를 일으켜 호조 요시카즈와 이치만을 죽이고 히키 집안을 멸망시켜 버렸죠

그러자 요리이에는 신하들에게 호조 가문의 쿠데타를 진압하라 명했지만 이미 모든 권력과 권위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기에 그의 말을 듣는 신하는 누구도 없었고 결국 요리이에는 쇼군직에서 물러나 유폐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1204년 어느 날 요리이에는 누군가에게 암살되고 마는데 이 일의 배후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죠

어쨌든 마사코는 12살 밖에 안된 자신의 아들 사네토모를 다음 쇼군으로 옹립했습니다

또한 마사코는 사네토모가 쇼군에 오르고나서 후환도 없애고 사네토모의 지위를 확고히 하면서 강화 하기위해 요리이에의 자식들을 모조리 반강제로 출가시켜 버렸죠

 

그리고 호조 도키마사는 싯켄자리에 오르면서 실질적으로 모든 막부의 권력을 마사코와 호조 가문이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싯켄 : 쇼군을 대신하여 막부의 정무를 총괄하던 직책, 일종의 재상)

그런데 1205년, 호조 도키마사와 그의 후처 마키 노가타가 이상한 흉계를 꾸미기 시작하는데요

 

바로 쇼군이던 사네토모를 폐위시키고 자신들의 사위인 히라가 도모마사를 쇼군으로 옹립하려 한 것입니다

이 음모를 알아챈 마사코는 도키마사의 저택에 있던 사네토모를 얼른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왔고 남동생 호조 요시토키와 협력해 아버지 도키마사를 싯켄 자리에서 내쫓아버렸죠

이는 반역죄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처형시켰어야 했지만 요시토키와 마사코가 친아버지인 도키마사를 죽일 수는 없었기에 모든 권력을 빼앗은채 후처인 마키노카타와 함께 강제로 출가시켜버렸습니다

 

이후 호조 요시토키가 싯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죠

한편 쇼군 사네토모는 행사참여와 같은 공적인 역할만 수행할뿐 정치에는 전혀 관여 하지 않았고 모든 정치는 어머니 마사코와 외삼촌 요시토키가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208년 2월 사네토모는 천연두에 걸려버리고 말았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천연두 흉터를 부끄럽게 여겨 대외적인 활동을 잘 하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이후 잦은 병에 걸리는 등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죠

 

나날이 사네토모의 병이 깊어만 가자 마사코는 자식이 없던 사네토모를 이을 차기 쇼군 자리에 고토바 상황의 황자를 앉히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토바 상황의 유모 였던 후지와라 가네코를 찾아가 만약 사네토모가 갑자기 죽게되면 뒤를 이어 황자가 쇼군이 되기로 내락을 얻어냈죠

그러다 조금 병세가 약해진 사네토모가 우대신에 오른 기념으로 쓰루가오카 하치만 궁에서 승진 의식을 치르던 도중 형 요리이에의 차남이자 조카였던 구교가 사네토모에게 달려들어 그대로 그에게 죽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로 인해 구교는 처형당했으며 다른 요리이에의 아들들도 줄줄이 제거 당하면서 초대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직계후손은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네토모가 자식이 없더라도 요리이에의 아들들은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음 쇼군을 물려줄수도 있었지만 마사코는 그렇게 하지 않고 황자를 쇼군직에 올리려 하고 나중에는 아예 다른 가문의 사람을 쇼군직에 앉히는데 이것만 봐도 마사코는 일부러 쇼군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싯켄을 세습하던 호조가문의 영향력을 점점 강해지게 만들어 그 권력을 호조가문이 독점하려 했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이죠

 

또한 요리토모의 직계자손들의 죽음의 배후에는 호조가문이 있다는 썰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마사코는 친정을 위해 친자식과 손자를 죽인 악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마사코는 그렇게 아들 둘과 딸 둘을 모두 잃고마는 엄청난 슬픔을 겪게 되죠

사네토모의 장례식을 끝마친 마사코는 고토바 상황에게 사자를 보내 황자를 가마쿠라로 보내 쇼군으로 옹립하자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갑자기 '그러면 일본을 반으로 가르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반대하고 나선것이죠

그런데 상황은 자신의 애첩 가메키쿠가 소유한 장원의 지토를 파면 시켜주면 황자를 쇼군으로 보내겠다고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이 조건을 들은 마사코와 요시토키는 막부의 세금 징수와 토지제도의 근간을 흔드는것이라며 그의 조건을 거부하게 되죠

 

이후로 마사코는 몇번이나 황자를 보내달라고 청했지만 상황은 모두 거절했고 결국 마사코와 요시토키는 황자 대신 요리토모의 먼 친척이던 쿠조 미치이에의 아들 미토라(훗날 후지와라노 요리쓰네)를 다음 쇼군으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미토라의 나이는 고작 2살밖에 되지 않았다 보니 이후 마사코는 어린 쇼군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비구니 쇼군'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한편 쇼군문제로 요시토키와 마찰을 빚었던 고토바 상황은 결국 그에게 불만을 품게되고 1221년 5월, 호조 요시토키를 토벌하라는 령을 전국에 내려 막부 타도 운동을 개시하기에 이르렀죠

이 사건은 가마쿠라 막부가 창설된 이래 최대의 위기가 되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조정에 대한 외경심은 남아있었기 때문에 막부의 가신들도 이런 조정의 태도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마사코는 모든 가신들을 불러놓고 크게 외치는데요

바로 "니들이 주군이던 요리토모에게 받은 은혜가 산 보다 높고 바다 만큼 깊은데 너네는 왜 은혜에 보답하려하지 않냐", "지금 역신의 참언에 의해 상황이 도리에 어긋난 명령을 내렸는데 명예를 아끼는 자는 빨리 히데야스, 다네요시 등을 토벌해 3대 쇼군의 은혜에 보답하라!" "근데 상황측에 가고 싶은 놈은 지금 똑바로 말하고 떠나라!" 라며 무사들을 향해 단호하게 소리쳤죠

 

그러자 그녀의 그 말에 감복을 받은 무사들은 일순간 동요하고 있던것이 가라앉았으며 모두 그녀의 명령에 복종했고 눈물을 흘리며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다는 대답을 하는 무사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요시토키는 19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토바 상황이 있는 교토로 진군했고 막부의 대군에 의해 교토군은 처참히 패퇴했으며 마침내 교토는 막부군에게 함락되고 말았죠

 

이후 고토바 상황은 요시토키의 토벌 명령을 철회했으며 오키섬에 유배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마사코는 조정을 감시하기 위해 교토에 막부 기관인 로쿠하라 탄다이를 설치했으며 상황의 편으로 가담했던 귀족, 무사들을 모두 처형해버렸고 그들에게 몰수한 영지는 공을 세운 무사들에게 포상으로 내려주었죠

또한 여러 정책을 실시하면서 막부의 지배권을 전국적으로 확대했습니다

 

나중에 마사코가 설치한 로쿠하라탄다이는 행정, 사법을 총괄하는 조정과 막부의 최고기관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마사코가 일본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막부를 세운 요리토모 못지않은 만큼 대단하죠

훗날 이 사건을 '조큐의 난' 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사건으로 인해 조정의 힘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이후 일본은 막부를 중심으로 정치체제가 새로 편제되는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시간이 흘러 1224년, 남동생이던 싯켄 호조 요시토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싯켄 계승을 둘러싸고 사건이 발생했죠

원래 싯켄직은 요시토키의 장남인 야스토키가 이었어야 했는데 요시토키의 후실인 이가 노가타와 그 오빠 이가 미쓰무네가 당시 유력한 신하이던 미우라 요시무라를 끌어들여 자신의 아들인 마사무라를 싯켄으로 옹립하고 사위인 이치조 사네마사를 쇼군에 취임시키려는 반역을 꾀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마사코는 직접 미우라 요시무라의 집으로 찾아가 "니가 마사무라 옹립 음모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냐"라고 대놓고 물었고 그러자 깜짝놀란 요시무라는 사실이 아니라며 그 자리에서 야스토키에게 충성을 맹세했죠

그리고 마사코는 야스토키를 싯켄에 올린 뒤 빠르게 이가 가문을 제압하고 이가노카타, 이가 미쓰무네, 그리고 이치조 사네마사를 모두 유배 보내버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마사코는 모두 현명히 잘 대처 해냈고 그렇게 막부는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죠

요리토모와 결혼하고 나서 거의 50여년 동안 수많은 일들을 거치고 강인한 철의 여인으로 살아온 마사코는 1225년 69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 첩들에 대한 질투심과 친정인 호조 가문의 이득을 가장 많이 생각하면서 '부인으로서 인륜을 저버린 행위를 한 악녀'라 비판받고 있기도 하지만 가마쿠라 막부를 창설했던 요리토모의 정실로서 손색이 없는 여장부에 역사적 격동기를 온몸으로 헤쳐 온 철의 여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확실히 무지막지하게 대단한 여인인 것 같긴 한데 아들 두명의 죽음은 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긴 한 것 같네요

 

일본 3대 악녀로 불리고 있는 호조 마사코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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