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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폭군 간신 탐구

이인임.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왕 위에 군림하며 절대권력을 휘두른 최악의 간신

by 사탐과탐 2022.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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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은 고려 말기 명석한 두뇌와 정치 감각을 잘 이용해 왕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명실상부 고려 최악의 간신입니다.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절대권력을 휘두른 이인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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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웠습니다.

그 후로 474년이 흘러 1392년에 고려는 멸망하고 말았죠.

고려에는 큰 사건들이 많았었는데요.

 

무신들이 나라를 쥐고 뒤흔든 무신정권도 있었고 원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원 간섭기를 거치기도 했습니다.

이때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시기에 아주 강력한 세력을 키운 집단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권문세족이라는 집단이었죠.

 

이 권문세족들의 힘은 너무나도 막강했는데요.

특히 원나라의 황후를 여동생으로 두었던 기철은 부패가 만연한 권문세족의 대표급이었죠.

이들은 많은 수의 사병을 거느렸으며 대대로 권력과 부를 물려주면서 나중에는 고려의 왕도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기철과 마찬가지로 대표급 권문세족으로 '고려의 멸망을 앞당긴 간신'으로 불린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오늘 소개할 인물 '이인임' 입니다.

그의 재능은 특출나기도 했고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써, 공민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그 재능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쓰지 않고 개인을 위해 쓰다보니 결국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의 할아버지는 고려시대 막장 폭군 충혜왕에게 수많은 간언을 올리던 청백리이자 충신 이조년인데요.

그의 출생연도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성주이씨의 기록에는 1312년으로 나와있습니다.

그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음서제도를 통해 바로 관리가 되었죠.

 

그렇게 전객시승, 전법총랑을 지내고 1358년 마침내 공민왕의 가까운 곳에서 그를 보좌하는 좌부승선 직책을 맡게 되면서 그의 특출난 재능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원나라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명나라가 치고 올라오는 혼란하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기였고 고려 내부에서는 홍건적과 왜구들이 자꾸 침략을 해오던 굉장히 불안정한 상황이었죠.

 

그러던 1359년, 홍건적이 고려로 쳐들어왔을 때 이인임은 고려군을 지휘해 승리로 이끌어 2등공신이 되었고 훗날 1361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는 개경까지 함락당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개경을 수복하는 전공을 세우면서 1등 공신이 되었죠.

문관으로써 전장에 나가 적과 붙어 싸운건 아니었지만 뒤에서 지휘를 하던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공민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펼쳤는데요.

이인임은 유인우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켰으며 원나라의 비호를 받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기철을 처형했죠.

그러자 원나라의 기황후는 공민왕이 오빠 기철을 죽인 것에 앙심을 품고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충선왕의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시키기 위해 최유 등으로 하여금 고려를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인임은 이때도 최유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중에는 동녕부를 회복하기도 하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공민왕은 자신이 하던 개혁 정책을 이끌어나갈 인재로 신돈을 등용했으며 기울어가던 원나라와는 등을 돌리고 새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명나라와 손을 잡았죠.

이인임은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세우자 권문세족이 빼앗은 전민을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노비를 풀어주는 일을 착착 진행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신돈과 함께 신진사대부가 세력을 키우는데 지원을 하기도 했죠.

자신도 권문세족 출신이었지만 공민왕의 최측근이 되어 그의 정책을 이루어 나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국대장공주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공민왕은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전권을 신돈에게 넘기고 자신은 모든 것을 놓아버렸는데요.

 

공민왕은 자제위라는 미소년 조직을 만들어 그들을 총애하며 개혁 정치를 하며 바삐 움직였던 궁내가 순식간에 연회와 잔치 소리로 가득 차버렸죠.

그러다 이인임은 신돈이 숙청되고 나서 잠깐 한직으로 좌천되기도 했지만 이미 조정에서 그의 영향력은 너무나 비대해져 있었죠.

하지만 공민왕은 자제위들에게 자신의 후궁들을 강간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는 등 여전히 이상한 짓을 해대며 고려의 국정은 마비되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후궁이던 익비가 자제위였던 홍륜과 동침해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공민왕은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삼고 이 사실을 아는 모든 자들을 없애야겠다 생각하고 내관이던 최만생에게 준비를 시킨 채 술에 취해 잠이 들어버렸는데요.

이에 최만생은 자신도 죽임을 당하겠구나 싶어서 홍륜에게 찾아가 모든 사실을 알려주게 되었죠.

그러자 홍륜을 비롯한 자제위들은 공민왕의 침전을 습격해 그를 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음날 한 내관이 처참하게 죽어있는 공민왕을 발견하고 명덕태후에게 알렸는데 태후는 당시 서열 넘버원이던 경복흥과 넘버투던 이인임을 불러 비밀리에 왕을 시해한 역적들을 잡아들이라 명했죠.

그렇게 이인임은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하던 중 내관 최만생의 옷에 피가 튀어 있는걸 발견하고 즉시 그를 체포해 취조를 하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고문 끝에 자제위와 홍륜이 저지른 일인걸 밝혀냈고 그들을 모조리 도륙한 뒤 그렇게 공민왕 시해 사건은 일단락 되게 되었죠.

이런 일련의 과정 중 모든 권력이 이인임에게 집중되게 되었고 공민왕 시해사건도 해결해 태후의 신임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공민왕에게는 세자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 왕을 누구로 삼을것이가에 대해 온 조정이 들썩이게 되었죠.

그러다 경복흥과 이인임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복흥과 명덕태후는 종친 중에 한 명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견이었고 이인임은 공민왕의 아들인 모니노가 다음 왕이 되어야 된다고 주장했죠.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공민왕은 신돈의 여종이었던 반야가 눈에 들어왔고 그녀와 함께 낳은 아들이 바로 모니노 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명덕태후와 고려 왕실에서는 모니노는 공민왕의 자식이 아닌 신돈의 자식으로 여겼는데요.

공민왕은 모니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강녕군이라는 군호까지 내렸고 공부까지 시켰던 것이죠.

 

이인임은 이러한 정황들을 근거로 모니노를 다음 왕으로 옹립할 것을 주장했고 명덕태후에게는 수렴청정을 하면 되지 않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 말에 혹한 태후는 모니노를 왕으로 옹립했고 그가 바로 10세의 어린 나이에 고려의 왕이 된 우왕이죠.

사실 이인임은 우왕이 나이도 어리고 외척이나 측근도 없으며 언제든지 정통성을 문제 삼아 왕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에 모니노를 밀었던 것인데요.

 

그렇게 이인임은 조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며 실질적인 고려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큰 사건이 일어나며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는 일이 벌어지는데요.

명나라에서는 공민왕이 살아있을 때 사신을 보내 말 수천 필을 바치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죠.

이에 공민왕은 사신에게 말 300필을 주며 잘 달래서 다시 명나라로 보냈고 김의라는 신하에게 그 사신을 배웅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던 중 홍륜에 의해 공민왕이 시해되어 버렸고 당시 명나라에서는 왕이 시해를 당하면 재상에게 죄를 묻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운 나머지 김의에게 사람을 보내 명나라 사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하고 말았죠.

그리고서는 지는 해였던 원나라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인임의 이런 행동에 열받은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정도전, 정몽주 등 신진사대부 들이었죠.

 

그들은 이인임이 개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명나라 사신을 살해해 나라 전체를 위태롭게 했으니 그를 잡아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인임은 오히려 이 사건을, 정적들을 없애는 기회로 여겨 간관들이 재상을 비난했다며 신진사대부들을 공격했고 이에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우왕은 당시 이인임을 탄핵했던 사대부들을 대거 파면해버리거나 정도전, 정몽주 등은 유배를 보내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심지어 그중에서도 정도전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걸 느낀 이인임은 정몽주 등의 사대부들은 2,3년 만에 유배지에서 풀어줘 관직으로 복귀를 했지만 유독 정도전만 8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유배지에서 풀어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풀려난 뒤로도 정치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개경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벌까지 내렸습니다.

 

또한 강직하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워할 장군인 최영과 손을 잡으면서 조정 내에서도 입지를 더욱 권고히 했죠.

그런데 우왕도 나이가 들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이인임에 의해 모두 허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우왕이 어머니처럼 여기던 유모가 이인임의 암살 시도를 했다가 들켜버리는 일이 벌어졌는데요.

 

우왕은 이인임에게 제발 유모를 살려달라 했지만 끝내 죽여버렸고 몇 안 되는 우왕의 측근들 마저도 모조리 죽이거나 쫓아내 버렸습니다.

이인임의 모진 행동에 크게 상처를 받은 우왕은 더 이상 정치에 흥미를 잃어버렸고 그 뒤론 술과 여자에 빠져버렸으며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었죠.

 

또한 이인임은 우왕에게 미모가 특출나게 아름다웠던 여종 봉가이를 소개시켜주고 우왕의 혼을 쏙 빼놓았으며 그러자 우왕은 봉가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인임의 집으로 허구헌날 찾아갔고 점차 이인임을 아버지, 이인임의 부인 박씨를 어머니라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이인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서열 1위이던 경복흥도 탄핵해 쫓아내 버렸고 그렇게 어느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못하는 명실상부 고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최측근 중에는 임견미와 염흥방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요.

이들은 역대급 최악의 인물 투톱이었죠.

그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었는데 매관매직은 기본이었고 백성들의 토지를 그냥 빼앗기도 했으며 세금도 뒤로 빼돌려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그들에게 돈만 주면 뭐든 가능했는데요.

능력 없는 사람도 뇌물만 찔러주면 엄청난 인재로 둔갑해 높은 자리에 올랐고 뇌물을 안주거나 그들에게 찍힌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파면당하거나 처형당했죠.

그런 그들을 견제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이나 세력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최영에게 그들을 견제할 만한 힘이 있었지만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천상 군인이었죠.

또한 신진사대부들 역시 이인임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이인임 일파가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을 때 뒤에서는 혁명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것은 바로 정도전이 이성계를 앞세운 뒤 부패가 만연한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려는 역성혁명을 일으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정도전이 비밀리에 일을 꾸밀 때 이인임은 병에 걸려 치료를 하기 위해 사직을 하게 되었고 여전히 최측근이던 임견미와 염흥방을 뒤에서 조종하며 거머쥔 권력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죠.

 

하지만 임견미와 염흥방의 만행은 이미 선을 넘기 시작했는데요.

그들뿐만 아니라 노비들까지 주인의 권력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기 시작한 것이죠.

계급이 낮은 관리들은 이들의 노비들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1388년에 염흥방의 노비인 이광이 밀직부사였던 조반의 땅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었죠.

 

그러자 조반은 염흥방에게 찾아가 애걸복걸해 겨우 땅을 돌려받았지만 노비 이광이 다시 땅을 강제로 빼앗자 조반은 이광에게 다시 돌려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노비였던 이광이 조반에게 오만방자하게 굴며 땅을 돌려주지 않겠다고 말하자 이에 분노한 조반은 이광을 때려죽인 뒤 염흥방에게 달려가 이 모든 사실을 알렸죠.

그러나 염흥방은 이 사건의 피해자였던 조반에게 역모죄를 덮어씌워 그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아와 옥에 가두고 조반에게 고문을 가해 역모를 꾀했다는 자백을 받아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조반은 모진 고문에도 끝까지 버티며 거짓 자백을 하지 않았죠.

결국 이 사실이 우왕과 많은 대소신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이 사건에 대해 상의를 하게 되었는데 임견미, 염흥방과 그들의 우두머리이던 이인임을 숙청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되었습니다.

최영과 이성계는 군대를 동원해 임견미와 염흥방 및 전횡을 일삼던 권문세족들을 모조리 체포했고 그렇게 그들은 모조리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죠.

 

그리고 이인임 역시 체포되었는데 신진사대부들은 그를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청했으나 우왕과 최영이 목숨만은 살려주자고 하여 결국 유배형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병세가 깊었던 이인임은 14년 동안 최고로 강한 권력을 휘두르다 결국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하지만 공양왕 때 부관참시를 당했고 그가 살던 집을 허물어 버린 뒤 연못으로 바꿔버리는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고 이 과정 중 정몽주 또한 죽임을 당했으며 최영도 귀양을 가게 되는데요.

최영이 귀양을 가면서 이인임이 살아있을 때 자신에게 한 말을 생각했다고 하죠.

그것은 바로 "이성계를 경계해야 한다, 그는 왕이 되려고 한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때 최영은 이인임의 말이 옳았다고 말했다 하죠.

 

그가 살아있을 때 극도로 경계한 인물이 이성계와 정도전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확실히 사람 보는 눈은 있었던 것 같네요.

정말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고 탁월한 정치력에 뛰어난 언변 등 모든 면에서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이인임은 초반에는 최고의 인재로써 잘했지만 순식간에 흑화 되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휘두른걸 보면 참 아쉽기도 하고 아깝기도 한 인물 같습니다.

 

그렇게 권력을 휘두른 세월도 고작 14년 밖에 안된다는 걸 보면 권력이란게 정말 무상하기도 한 것 같죠.

고려가 망하기 직전에 왕보다 더 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휘둘렀던 간신 이인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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