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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폭군 간신 탐구

신숙주. 자신을 아껴준 군주의 후손을 배신한 변절자의 대명사

by 사탐과탐 2022.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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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는 명재상이라는 밝은 면과 배신자라는 어두운 면을 모두 가진 사람으로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뒤 세조의 신하가 되어버린 변절자의 대명사입니다.
신숙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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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역사 속 인물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비난받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욕을 먹는 사람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와 주인을 배신한 변절자들입니다.

 

매국노의 아이콘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이완용이라면 변절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람은 아마도 조선의 명재상인 신숙주일 텐데요.

대체 신숙주는 어떤 짓을 했길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인지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뽑히는 세종 그런 세종의 곁에는 황희나 김종서 등 유능한 신하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세종이 미래를 책임질 인재들이라 칭찬하며 진심으로 인정했던 사람들이 바로 집현전 학사들인데요.

그중에서도 신숙주는 성삼문과 함께 세종이 자신의 후계자인 문종과 단종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지목했던 당대의 인재였습니다.

 

신숙주는 세종 시절에 일부러 책을 읽기 위해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궁궐 숙직을 도맡아 했을 만큼 지독한 독서광이자 소문난 수재였다고 하죠.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하루는 어느 집현전 학자가 늦게까지 책을 읽다 잠든 모습을 보고 세종이 자신의 옷을 덮어 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신숙주라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때 세종이 덮어 준 옷이 사극에서 흔히 보이는 곤룡포였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하지만 곤룡포는 오직 왕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기 때문에 곤룡포를 벗어 준다는건 곧 왕권을 넘겨준다는 의미와도 같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실제로 곤룡포를 덮어주었다면 신숙주는 그 날로 처형감이었기 때문에 곤룡포가 아닌 일반적인 가죽옷을 덮어줬을 것으로 짐작되죠.

 

신숙주는 중국어와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 등 무려 8개 국어를 구사하며 굉장히 뛰어난 언어능력을 보였는데요.

자연스럽게 그는 외국과의 교류에서 중책을 맡게 됐죠.

일본 통신사로도 가게 되었는데 일본에서도 신숙주의 재주는 화제였다고 합니다.

일본의 관리들은 물론 만나는 사람마다 신숙주에게 시를 부탁했고 신숙주는 별다른 준비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시를 써주었다고 하네요.

 

그가 특히 자주 갔던 곳은 요동인데 성삼문과 함께 무려 13차례나 다녀왔다고 하죠.

당시 요동에는 귀양 온 명나라의 언어학자인 한림학사 황찬이 있었습니다.

신숙주는 그에게 언어에 대한 지식을 배웠는데 그를 가르치는 황찬마저 신숙주의 재주와 노력에 감탄했다고 하네요.

 

이후 신숙주는 세종의 명으로 훈민정음 창제 작업에도 참여하게 되는데요.

세종은 신숙주를 높이 평가하며 아들인 문종에게 "신숙주는 크게 쓸 인물이다"라고 자주 칭찬했다고 합니다.

신숙주는 집현전에서 같이 연구하던 성삼문과 친하게 지냈으며 안평대군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하죠.

 

세월이 흘러 세종과 문종이 사망하고 뒤를 이어 단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요.

그 당시 조선은 원래 있던 왕이 사망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 명나라에 그 사실을 알리고 그들로부터 임명장을 받아오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단종이 즉위한 후에는 수양대군이 사신으로 명나라로 가게 되었고 수양대군은 가는 길에 그를 보좌할 인물로 신숙주를 선택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야심가 수양대군은 일찍부터 집현전 출신 학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마음을 쏟고 있었고 신숙주 역시 그 대상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숙주는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로 갔고 두 사람은 그 여정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는데요.

마침 수양대군과 신숙주 두 사람은 1417년생 동갑내기인데다.

서로 죽이 잘 맞았는지 함께 다녀오는 길에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하죠.

 

이때 얼마나 많은 친분을 쌓았던지 후에 수양대군이 왕이 되고 신숙주가 정승이 된 후에도

세조는 신숙주에게 집현전 학사 시절의 호칭인 '신 수찬'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썼던 호칭인 '신 서장'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고 하네요.

1453년 마침내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이 일어납니다.

 

흔히 사람들은 수양대군과 한명회 홍윤성 등 계유정난을 주도한 인물들 중에 당연히 신숙주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죠.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닌데요.

1453년 10월10일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계유정난 당일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숨 가쁘게 진행됐던 거사의 자초지종이 적혀있습니다.

이 기록 속엔 한명회를 비롯해 정난에 직접 가담한 수십 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신숙주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죠.

 

거사 며칠 전인 9월 29일 자 기록에는 측근들이 와서 수양대군을 뵙고 ‘10월 10일에 의거하기로 약속하였다’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에도 한명회와 권람 홍달손 등의 이름만 나올 뿐 신숙주의 이름은 찾을 수 없습니다.

신숙주는 평소 다른 당파 사람들과도 두루두루 친분이 많았기에 애초에 쿠데타 전에는 세조가 쿠데타에 동참하라는 제안을 하지 않았고 쿠데타가 성공한 후에 그를 회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네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계유정난이 성공한 이후로 신숙주는 완전히 수양대군의 오른팔 노릇을 하게 되었죠.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한다는 여론을 주도하기까지 하면서 왕위에 오른 세조로부터 1등 공신에 봉해집니다.

이런 행적 때문에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했던 사육신들도 한명회, 권람, 윤사로와 더불어 신숙주를 처단 1순위로 올려놓았던 것인데요.

특히 성삼문은 신숙주를 따로 언급하면서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라며 분노했다고 하죠.

 

1456년 성삼문과 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자 신숙주는 정승들과 함께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을 서인(庶人)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을 뿐만 아니라 단종과 금성대군을 처형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는데요.

자신을 그토록 아껴줬던 세종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신숙주의 행동은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충격적이었는지 변하기 쉬운 녹두나물에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죠.

그렇게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변절자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세조에게 협력하고 집현전 동료인 성삼문의 처형을 주장하며 부귀영화를 누린 정인지나 최항, 정창손처럼 세조의 정변을 도운 집현전 선배들이 어찌 보면 계유정난 당시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인 신숙주보다 더 적극적으로 배신행위를 한 것이지만 후대 사람들의 평가는 신숙주에게 좀 더 가혹했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정인지나 최항, 정창손은 세종 말기부터 이미 고위직 관료들이었고 신숙주의 동기들인 사육신들은 단종을 지키려다 사망한데 비해서 신숙주만 수양대군 편에 붙어서 출세한 후 영의정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그에게 비판이 집중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신숙주의 능력과 업적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평가가 있어야겠지만 그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군주를 배신했다는 점 역시 명백한 사실이죠.

문종은 세종의 적자이며, 그 아들인 단종은 세종의 적장손으로서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왕이었는데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왕이 치명적인 폭정이나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이와 같이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왕위를 빼앗는 것은 용납되기 어렵습니다.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는 그러한 명분이 전혀 없이 일어난 사건이었으며 심지어 단종은 혈통마저도 역대 최고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죠.

그런데 그런 왕을 아무 이유 없이 폐한 행위는 유교적 관점인 당시로서도 미친 짓이었고 유교 사회가 아닌 오늘날 사람들의 시선으로 봐도 좋은 평가를 내리기 어렵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단종을 복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때도 세조 측에 일말의 명분이라도 있었다면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단종 복권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되죠.

하지만 그들의 쿠데타에는 이해의 여지나 명분이 전혀 없었으며 핑계로 댈만한 실정이나 폭정도 전혀 없었습니다.

폭정과 실정을 저지른 연산군이나 광해군과는 달리 단종은 17살에 살해당해서 애초 저런 폭정이나 실정을 펼칠 기회조차도 전혀 없었죠.

 

신숙주에게 내려진 배신자라는 평가는 신숙주에 대해 재조명이 이루어지는 현대사회에서도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재조명하고 인정하고 있지만 신숙주의 배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요.

 

신숙주가 유능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가 자신을 아껴준 군주의 후손을 배신한 것도 변함없는 사실이죠.

신숙주는 명재상이라는 밝은 면과 배신자라는 어두운 면을 모두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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