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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폭군 간신 탐구

궁예.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 나는 미륵이니라, 이 두 마디면 끝나는 그분

by 사탐과탐 2022.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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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승려에서 왕까지 되었지만 마지막엔 이상한 소리만 해대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궁예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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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

2000년대 초반 한 사극에서 우리에게 엄청난 임팩트를 줬던 왕이 남긴 유명한 대사죠.

 

그는 자신의 신하가 불경한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신하를 철퇴로 때려죽일 것을 명령하는데요.

심지어는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까지 죽여버리는 패륜을 저질렀고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신하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게 되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떠돌이 승려에서 왕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면서 결국 폭군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궁예입니다.

 

궁예는 869년 음력 5월 신라의 47대 국왕인 헌안왕의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궁예는 태어날 때부터 이빨이 있었고 태어날 당시 무지개를 닮은 흰빛이 그가 태어난 집의 지붕 위에 생겨났다고 하죠.

당시 신라에서는 단오(음력 5월5일)에 태어난 아이를 불길하게 여기던 문화가 있었는데 궁예가 태어난 날 이러한 일까지 생기자 사람들은 더없이 불길한 징조라 여겼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아버지인 헌안왕에게 궁예를 죽일 것을 청했는데요.

그렇게 왕명을 받아 궁예를 죽이러 온 신하는 궁예를 포대기에 싸서 높은 누대에서 던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누대 아래로 떨어진 궁예를 그의 유모가 밑에서 받으면서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아기를 받는 과정에서 유모의 손가락이 눈을 찌르는 바람에 궁예는 한 쪽 눈을 실명했고 유모는 그대로 궁예를 데리고 멀리 도망가 그를 길렀다고 하네요.

이런 출생의 사연 때문인지 궁예는 평생 신라를 적대적으로 대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어린 소년 시절부터 성격이 괄괄한 탓에 늘 말썽을 피우며 다녔다고 하는데요.

 

궁예가 10살이 되었을 무렵 유모는 항상 말썽을 일으키는 궁예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며 "네가 어린 나이에 죽는 것이 안타까워 목숨을 걸고 너를 구해와 여태까지 길렀는데 너는 매일 소동을 일으켜 나에게 걱정만 끼치는구나 이러다 네 정체가 알려지면 우리 모자는 둘 다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했죠.

 

그 말을 들은 궁예는 울면서 "그러면 제가 집을 나가서 더 이상 어머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집을 나와서 세달사라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는데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선종이라고 지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궁예의 승려 시절에 대해 '승려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배포가 뛰어났다"라고 전하는데요.

기록으로 봤을 때 승려 활동보다는 무술을 갈고닦는데 더 열중했던 것으로 짐작되죠.

 

진성여왕 대에 일어난 원종·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신라 말기에는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신라 정부는 지방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되었고 그 틈을 타고 각지에서 군벌들이 일어나게 되었죠.

891년 궁예도 세달사에서 나와 당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던 기훤의 부하가 됩니다.

하지만 기훤은 궁예의 재능을 높게 사지 않으며 오만하고 무례한 태도로 그를 대했는데요.

 

궁예는 기훤이 자신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그의 밑에 있어봐야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래서 다음 해에 기훤을 떠나 북원에서 위세를 떨치던 양길에게 항복합니다.

양길은 기훤과 달리 궁예를 높게 평가했고 그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며 북원 동쪽 땅의 정벌을 맡겼죠.

궁예의 군대는 북원 동쪽의 주천(지금의 강원도 원주시)과 내성(강원도 영월군) 등을 빠르게 점령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궁예는 병사들과 함께 고생하며 상을 주거나 처벌하는 일에 모두 공정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죠.

당시 궁예가 어떻게 병사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면서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궁예는 강원도 일대와 황해도 경기도 지역을 점령한데 이어 897년에는 서울과 인천지역까지 차지하게 되는데요.

이렇게 궁예의 세력이 커지면서 한때 그의 상관이었던 양길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에 양길이 자신의 군사를 모아 궁예를 치려고 했지만 궁예는 그런 양길의 허를 찌르며 오히려 자신이 먼저 선제공격을 했고 크게 패한 양길의 세력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죠.

 

901년에는 마침내 스스로 왕위에 오르면서 국호를 고려라 정했고 지금의 개성에 해당하는 송악을 수도로 삼게 됩니다.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쓴 것은 송악을 비롯해서 경기도 북부 지역과 황해도 지역의 호족과 백성들이 옛 고구려 남부 지역 출신으로 스스로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고려라는 이름도 바로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지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904년에 궁예는 국호를 갑자기 마진으로 바꿔버리고 무리를 하면서까지 수도를 철원으로 옮겨버리는데요.

그 과정에서 청주 지역의 사람들을 수천 명이나 철원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궁예가 무리하게 수도를 옮겼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갈리는데요.

아마도 자신이 기반을 다지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던 왕건을 중심으로 한 송악의 호족세력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을 적대하는 세력이 되자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철원은 한 국가의 수도로는 적합하지 못한 곳이었는데요.

왜냐하면 그곳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철원 주변을 흐르는 한탄강의 수량이 너무 적기 때문에 배를 띄우기 어려웠고 농사를 짓는데 쓸 물을 구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었지만 궁예의 상승세에는 변함이 없었는데요.

남쪽으로는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지역과 충청남도 공주지역까지 세력을 넓혔고 북쪽으로는 대동강 이남의 황주 일대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렇게 거칠 것이 없어진 궁예는 911년에 국호를 태봉으로 바꾼 뒤부터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데요.

궁예는 스스로를 살아있는 미륵이라고 칭하며 밖으로 나갈 때마다 각종 보석으로 치장한 호화로운 모습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의 두 아들은 보살이라 부르게 했으며 직접 불교 경전을 짓기도 했는데요.

당시 석총이라는 스님이 이 불경을 보고 "하나같이 요사스러운 말뿐이라 평가할 가치도 없다"라며 혹평을 해버립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분노한 궁예는 석총을 불러낸 후 철퇴로 죽여버리게 되죠.

이외에도 후백제에서 건너온 형미라는 승려를 죽이는 등 정통 불교의 근본을 부정하는 행동을 계속하며 불교계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게다가 자신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는 관심법을 쓸 수 있다는 억지를 부리면서 신하와 백성들을 협박하기 시작했죠.

 

그는 관심법으로 들여다본 신하가 불충한 마음을 품었다며 몽둥이로 때려죽여버렸는데요.

아마도 이 부분이 드라마에서는 각색이 돼서 기침한 신하를 철퇴로 때려죽이는 장면으로 나왔던 거 같네요.

궁예는 심지어 자신의 부인인 강 씨마저 부정한 여인이라는 누명을 씌워 죽여버렸습니다.

한나라의 왕비를 죽인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 처벌 방식도 불에 달군 쇠몽둥이를 다리 사이에 갖다 대는 잔인한 방법이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궁예의 잔인함에 치를 떨게 되죠.

 

궁예가 가장 믿던 신하인 왕건조차 이 관심법을 피해 갈 수는 없었는데요.

궁예가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품은 것을 자백하라고 억지를 부리자 왕건은 죽을죄를 지었으니 용서해달라며 빌었고 궁예는 "과연 경은 정직한 사람이다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라며 왕건을 용서하고 상까지 잔뜩 내렸다고 하죠.

 

도대체 왜 궁예는 이런 억지를 부렸던 것일까요?

당시 궁예는 자신의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여러 지역의 호족들을 받아들였죠.

때문에 신하들 간의 갈등이 심했던데다 나라의 경제까지 악화되면서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다고 하는데요.

그런 상황에서 궁예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큰 궁궐을 짓고 공포정치를 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비극으로 끝나게 되죠.

918년 6월 궁예의 폭정을 참다못한 신하들이 왕건을 왕으로 즉위시키려는 군사정변을 일으켰고 궁예는 변장을 한 채 어느 산골마을까지 간신히 도망쳐 나오게 되는데요.

 

하지만 배고픔을 참지 못해 주변의 보리 이삭을 먹다가 그 지역 백성들에게 들켜버렸고 결국 분노한 백성들의 손에 처참하게 맞아죽었다고 합니다.

궁예가 꽤 능력 있는 지도자이자 왕이었던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죠.

일개 떠돌이 승려라는 보잘것없는 신분에서 양길의 밑으로 들어간 후 능력을 인정받고 장수로 이름을 널리 떨쳤던 것을 보면 군사적인 재능과 통솔력, 카리스마는 뛰어났던 인물로 짐작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궁예를 폭군이라고 기록한 역사서도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몰아낸 사람들이 작성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봤을 때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점도 있죠.

그렇지만 어찌 됐든 궁예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너무나 무리하고 과격한 수단들을 썼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선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자들은 모조리 죽였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죠.

 

그리고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죄 없는 승려들을 죽이고 자신의 교리만을 강조하며 불교계를 억압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을 비롯해 신하들마저 마음대로 죽여버렸는데요.

게다가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는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매기고 무리한 건설공사를 시키며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들이 정신병에 걸려 미쳐버려서 저지른 짓이든 아니면 철저하게 정치적인 계산을 한끝에 이루어진 것이든 간에 결코 정상적인 행위라고는 볼 수 없겠죠.

 

그는 과연 사리사욕만을 챙긴 폭군에 불과했던 걸까요?

아니면 세상을 바꿔보고자 행동했던 개혁가였을까요.

지금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궁예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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