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역사 탐구

요시와라 유곽. 일본에서 제일 유명한 유곽촌에 숨겨진 비극적인 비밀

by 사탐과탐 2022. 9. 7.
반응형
요시와라 유곽은 과거 일본의 유명한 성XX 장소 였는데요
그곳에서 일하는 여인들에게는 비극적인 사연이 있었습니다
요시와라 유곽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집창촌이란 집단적으로 매춘이 이루어지는 거리, 즉 성매매를 할 수 있는 업소가 모여있는 곳을 말하는데요 

오늘은 일본 에도시대 때 있었던 거대한 유곽촌인 요시와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요시와라는 현재의 도쿄도 다이토구 센조쿠 4번지와 3번지 위치에 있었던 곳으로 18세기에는 이곳에 약 1,750명의 여성이 살았다고 하죠 

 

1893년에는 무려 9,000명이 넘는 여성이 요시와라에 살았다는 기록마저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이곳은 교토의 시마바라 유곽, 오사카의 신마치 유곽과 함께 3대 유곽으로 꼽혔으며 그중에서도 요시와라는 일본에서 제일 유명한 유곽촌이었다고 하네요 

요시와라는 '갈대밭'이라는 뜻을 가졌는데 실제 요시와라가 처음 지어진 장소 주변이 갈대밭 천지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에도시대 초기에 막부의 공인을 받으며 만들어진 요시와라는 처음에는 에도성에 가까운 시가지에 위치해 있었지만 에도가 급속도로 발전한 17세기 중엽에는 도시 외곽으로 옮겨지게 되죠

ㅅㅅ만 하면 끝나는 음침한 이미지를 가진 일반 유곽과 다르게 요시와라는 유곽 외에도 각종 찻집과 초밥가게나 소바 가게 같은 음식점뿐만 아니라 기모노 가게나 가부키 극장 등이 가득한 일종의 번화가였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때문에 요시와라의 전성기 때는 그곳에서 만들어진 헤어스타일과 패션이 일본의 일반 여성들에게도 유행처럼 퍼져나갔고 심지어 정계나 재계 등의 상류층들이 사교 장소로 요시와라에 놀러 가는 일도 자주 있었다고 하죠

 

때문에 이곳에서 일하는 최고등급의 접대부인 오이란뿐만 아니라 일반 유녀들도 최소한의 교양을 배워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돈 몇 푼에 잠자리를 하는 하급 창부는 키리미세라고 불리는 하급 가게에 소속되거나 길거리에서 몸을 팔아야만 했죠

1590년 8월 30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로 입경하고 1603년에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면서 에도 막부를 만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도쿠가와는 당시 촌구석에 불과했던 에도를 재건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시작했죠

이후 자연스럽게 공사를 하러 온 남성 인부를 상대로 한 윤락업소가 에도 근처에 생겨났고 그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허가를 받지 않고 영업하는 불법업소였다고 합니다

이에 막부에서는 도시의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유곽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를 원했지만 막상 옮기려니 마땅한 장소를 찾을 수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었죠

 

이때 교토에서 유곽을 운영하던 쇼지 진에몬이라는 인물이 유곽 주인들의 대표로 나서서 "차라리 유곽을 한 곳에 모아 운영해달라"라는 청원을 냈고 막부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1617년에 니혼바시 근처에 그 터를 세우게 되는데요

그렇게 1618년 11월에 세워진 것이 바로 요시와라 유곽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요시와라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막부의 명령에 의해 요시와라는 에도 외곽으로 옮겨졌고 이후 요시와라는 에도 시대 말기까지 전성기를 누렸죠

 

당시 일본은 조선과 중국에 비해 성적으로 좀 더 개방적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여성의 정조관념에 대해서만은 엄격한 이중잣대가 존재했습니다

또한 당시 피임 기술과 성병을 치료하는 의술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먹고살기 힘든 경우가 아니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려는 여성은 거의 없었죠

때문에 요시와라 유곽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전부 인신매매의 피해자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에는 아동인권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이 강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래서 가난한 집안에서는 먹여 살려야 할 입을 줄이거나 빚을 갚기 위해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어린 딸들을 인신매매 업자에게 팔아넘겼고 업자들은 어린 소녀들을 유곽에 팔아넘겼습니다

또한 피임하는데 실패해서 임신을 한 매춘부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들도 유곽의 소유물이 되었는데요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유곽의 종업원으로 여자아이는 매춘부로 키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요시와라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전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성매매를 하게 되었고 거의 대부분이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일을 했죠

그러다 보니 요시와라에 있는 유곽의 주인들은 그녀들이 먹는 식비부터 치장하는 비용이나 방세 등을 전혀 지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재산을 모으기는커녕 가족들의 빚을 갚기도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을 하던 도중 성병에라도 걸리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시름시름 앓다가 유곽에서 쫓겨났는데 오갈 곳이 없어진 그녀들은 돗자리를 들고 거리에서 매춘을 하거나 아예 도시 밖으로 나가 뗏목 같은 것을 띄우고 강가에서 매춘을 하는 '요타카'가 되는 최악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하죠

그러다 결국 죽음을 맞게 되면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대충 멍석에 말아서 강가나 절 근처에 버렸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화장품의 주 재료였던 수은과 납에 중독되거나 좁은 가게 안에서 비위생적인 집단생활을 하면서 면역력이 떨어진 탓에 죽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죠

이런 사정으로 인해 요시와라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평균 수명은 23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보통 15살이 되면 요시와라에서 정식으로 일을 시작했다고 하니 옛날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짧았다는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요시와라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수명은 그중에서도 심각하게 짧았다고 볼 수 있죠

 

만일 운 좋게 살아남는다고 해도 20대 후반이 되면 상품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 빚을 다 갚았다는 이유로 요시와라에서 내쫓아버렸습니다

어릴 때부터 매춘과 가무만 배웠으니 달리 먹고살 길이 없었던 그녀들은 어쩔 수 없이 요시와라에 남아 다른 매춘부들의 시중을 들거나 유곽의 잡일을 해야만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한번 요시와라에 몸을 담게 된 사람은 나이가 들거나 죽을 때까지 유곽에 묶여서 쓸모가 없어질 때까지 착취당하다가 죽으면 길가에 버려져 이름 없는 시체로 잊혀지는 운명이었습니다

때문에 현대의 일본 자료에서도 요시와라 유곽은 자발적으로 일하거나 싫으면 그만둘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현대적인 공창 제도가 아니라 막부가 묵인한 인신매매와 성매매의 소굴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것은 메이지 시대의 일본 법원 또한 인정한 사실이라고 하죠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요시와라의 인기가 시들해졌고 요시와라가 잘 나갈 때는 매춘부들 뒤에서 연주만 했던 게이샤가 인기를 끌면서 정계와 재계의 인물들도 요시와라가 아닌 게이샤의 마을 '하나마치'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침체기를 맞이하면서 한물간 것으로 취급된 요시와라는 일반적인 사창가로 전락한 후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다 1957년 4월 1일 성매매 방지법이 시행되면서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죠

 

현재 요시와라가 있던 곳은 소프랜드 같은 변종 성매매 업소들이 생겨나며현대적인 사창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비극적인 사연들로 가득차있던 요시와라 유곽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