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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유자광. 얼자로 태어나 천재적인 처세술과 생존력으로 종1품까지 올랐던 간신 또는 입지전적인 인물

by 사탐과탐 2022.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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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노비인 얼자로 태어나 처세술과 생존력 만으로 정승 바로 아래인 종1품까지 올랐던 간신 이자 입지전적인 인물 유자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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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를 쭉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 많았었는데요.

오늘 이야기할 이 사람만큼 뛰어난 처세술을 가졌던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인물은 양반 아버지와 노비 어머니 사이의 얼자로 태어나 정승 바로 아래였던 종1품 숭정대부까지 올라갈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사람이 없을 정도이죠.

 

그는 바로 희대의 풍운아 유자광입니다.

유자광은 세조 때에 관직에 오른 뒤 중종 때까지 총 5명의 임금을 모신 인물이죠.

서자도 아닌 얼자가 어떤 삶을 살았길래 당시 유력한 가문의 양반도 오르기 힘들었던 종1품까지 올라갔을까요?

 

유자광의 아버지는 중추부지사를 역임한 유규였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유규가 백호의 꿈을 꾸고 나서 부인과 동침을 하려 했지만 거절당해버렸고 그러자 부인의 여종과 동침을 하게 되었죠.

그렇게 그 여종이 임신을 하게 되었고 태어난 아이가 바로 유자광이었던 것입니다.

 

어린시절 유자광은 유규의 자식들을 제치고 굉장히 총명함을 보였는데요.

이에 아버지 유규는 그의 총명함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죽이려 했죠.

하루는 비가 엄청 내려 강물이 불어나자 유규는 유자광을 불러 강 건너에 있는 메밀밭에 별일이 없는지 확인하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를 물에 빠트려 없애려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유자광은 큰 나무판자 위에 올라가 무사히 강을 건너 살아남았습니다.

이후 그는 아버지와 이복형제들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도박이나 여자들을 희롱하고 술에 빠져 방탕하게 시간을 보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살기 위해 무예를 익히게 되었죠.

그래서 결국 경복궁의 문을 지키는 갑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고 시간이 지나 1467년, 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난을 일으키자 일생일대의 기회라 여긴 유자광은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자신 한 몸을 바치겠다며 그곳으로 보내달라 청했고 이에 유자광의 패기에 세조는 엄청 흡족해했다고 하죠.

그래서 세조는 유자광을 남이장군의 휘하에 들어가도록 했고 그렇게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며 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난을 평정한 이후에 그는 문이나 지키던 갑사에서 불과 3개월 만에 정5품 병조정랑으로 유례없을 정도의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되었죠.

그뿐만 아니라 세조는 그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는지 유자광에게 문과 과거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요.

 

신숙주는 유자광의 답안이 허접하다고 떨어트렸지만 세조는 답안 작성이 잘 되었다며 유자광을 장원급제로 삼아버렸습니다.

그렇게 그는 병조정랑이 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정3품 병조 참지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버렸죠.

거기다가 이시애 난의 토벌의 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 2등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소신료들은 천한 출신인 유자광에게 이러한 고속 승진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세조는 더 강력하게 '니들이나 잘해라, 유자광은 절세의 인물이다' 라는 말을 하며 대신들의 반발을 단숨에 잠재웠다고 하죠.

 

사실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 등 공신들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다보니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고 그 견제 세력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남이, 강순, 구성군 이준, 유자광 등 신진 무신세력의 힘을 실어주려는 속셈이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공신들의 힘이 커지는걸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예종이 즉위를 하게 되었는데요.

 

예종은 세조가 힘을 실어주던 새로운 세력인 남이, 이준 강순 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걸 눈치챈 유자광은 계유정난의 공신인 한명회, 신숙주 등의 세력에 붙게 되었죠.

애초에 유자광은 세조의 총애를 더 받던 남이를 못마땅해 하고 있었는데 예종도 남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걸 기회로 여긴 유자광은 남이가 자신에게 찾아와 정변을 일으키자고 말했다며 그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거짓 고변을 했습니다.

 

이렇게 유자광의 모함으로 인해 남이, 구성군 이준, 강순 등은 갑자기 역모자로 몰려 유배를 가거나 죽임을 당하면서 신진 무신세력의 대부분이 몰살당하고 말았죠.

그렇게 유자광은 역모를 미연에 막은 공을 인정받아 익대 공신 1등에 책록되면서 무령군 자헌대부에 봉해졌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유자광의 출신이 한미하다보니 세조나 예종의 총애를 받지 못하면 자신도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존의 공신 세력과 신흥 세력의 권력 다툼을 철저하게 이용해 살아남은 것인 동시에 조선 건국 이래 전무후무할 정도의 승진가도를 달린 것이었죠.

그리고 세조에 이어 예종의 신임도 얻게 되었고 당시 신흥 세력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공신 세력의 눈에도 띄게 되면서 정치적 기반도 어느 정도 마련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여전히 주변의 대신들은 얼자 출신인 유자광과 가까이하는 것을 꺼려 했었으며 그가 뭔 짓만 해도 공격을 받기 일쑤였죠.

어쨌든 예종과 왕실에서는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할 수 있었는데 그게 어느 정도였는지 한 가지 일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부하였던 박성간이 유자광이 반역을 꾀하는 중이라고 고변한 일이 일어났는데요.

이에 유자광은 의금부로 잡혀가 고문과 심문을 당하고 있었죠.

하지만 성종 대신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가 유자광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풀어주라 명했고 오히려 박성간이 그를 무고한 죄로 참형을 당하고 말았죠.

그만큼 신하들에게는 왕따였지만 왕실에서는 신뢰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자광은 개무시 당하는 일도 발생한 적이 있는데요.

그가 함양지역을 유람하던 중, 그곳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시 한 편을 함양 정자의 현판에 적어 달아놨는데 사림의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부임한 후, 유자광이 써놓은 시가 붙어있던 현판을 보고 너무나 졸렬한 글이라며 불태워 버리는 일이 발생했죠.

 

이에 유자광은 자신을 조롱한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사림에 원한을 품게 됩니다.

하지만 당장은 그들을 완전히 쳐낼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참고 기다리기로 했죠.

시간이 흘러 예종이 죽고 나서 성종이 왕이 된 후부터 그의 권세는 조금씩 삐걱대기 시작하는데요.

 

어쨌든 유자광은 성종의 눈에 들어 도총관까지 임명되긴 했지만 한명회와 갈등을 빚어 파직되기도 하고 부정부패 사건이 터져 공신적을 박탈 당하기도 했죠.

또한 대신이던 현석규를 임사홍과 함께 디스하다가 결국 또다시 관직을 박탈 당하고 이후 4년 뒤에 다시 관직을 제수 받는 등 다사다난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죠.

 

그리고 아무리 여러 왕의 총애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는 얼자 출신이었지만 세조의 총애 덕분에 과분한 관직을 제수 받은 인물로 찍혀 사림 출신 대신들뿐만 아니라 훈구 대신들에게도

지속적으로 탄핵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유자광의 끈질긴 생명력은 그 누구도 끊어내질 못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왕위에 즉위하자 그의 처세술은 가장 빛을 발하게 됩니다.

양반들 중에는 자신의 편이 없다고 절실히 느낀 유자광은 왕의 총애를 받아야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걸 느끼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성종의 실록을 집필하던 과정에서 실록 편찬의 총책임자 이극돈은 사관 김일손이 쓴 한 사초를 발견하게 됩니다.

김일손은 그의 스승이던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적어놨었는데 조의 제문 내용이 바로 세조와 계유정난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던 것이죠.

 

그러자 이극돈은 이 사실을 연산군에게 알려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던 차에 유자광을 찾아가 어찌할지 의논을 했습니다.

그러자 유자광은 그동안 자신을 개무시해 원한을 가지고 있던 김종직과 사림파를 일거에 제거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고 즉시 연산군에게 김일손의 사초 내용을 보고했죠.

 

그리고 동시에 김종직이 지었던 현판을 모조리 없애게 했으며 김종직의 당기를 떼어 불살라버렸습니다.

세조를 부정하는 것은 연산군을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격분한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일으켜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시신의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를 당했고 김일손도 사형을 당했으며 사림파를 대거 숙청해버렸죠.

 

안 그래도 왕의 권위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던 연산군은 즉위하고 나서 한시도 빠짐없이 반대만 하고 안된다고만 하던 사림파를 제거해 버리기 좋은 명분이 손에 굴러들어왔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유자광도 과거에 개무시 당한 복수도 하고 연산군의 신임도 얻기 위해 앞장서서 사림파들을 역적으로 몰아넣어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죠.

 

이 사건을 통해 연산군은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유자광 역시 공을 인정받아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의 오른팔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려고 했던 유자광이었지만 폭군으로 흑화한 연산군은 여러 차례 그를 겁박하기도 하고 갑자사화 중에는 유자광에게 "너는 폐비가 죽을 때 뭐 했냐?"라고 화를 내며 감옥에 가두기까지 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연산군을 믿고 의지하기에는 부담이 컸죠.

 

또한 너무 막장으로 치닫는 연산군의 모습에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눈치챈 유자광은 성희안과 박원종 등 중종반정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에게 붙어 결국 연산군을 쫓아내고 중종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게 됩니다.

그렇게 유자광은 또다시 공신으로 책봉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문제는 연산군을 몰아내며 조정에 대거 진출한 사람들이 그와 거의 원수지간인 사림파였으며 연산군과 친하게 지냈던 세월도 있긴 있으니 중종과 반정공신들 조차도 그를 불신했던 것입니다.

이후 그는 사림파에게, 연산군과의 친했던 관계를 지속적으로 공격받아 결국 그는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귀양을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죠.

 

그리고 귀양지에서 병까지 얻으며 결국 눈이 멀어 장님이 되었고 불과 5년 만에 74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야사에 의하면 꿈에서 남이의 혼령이 나타나 유자광의 눈을 뽑았는데 그 뒤부터 장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죠.

그렇게 생존과 처세의 달인이던 얼자 출신 유자광의 마지막도 쓸쓸하고 비참하게 끝이 난 것입니다.

 

현재 그는 간신이라는 평가와 간신까지는 아닌데 그런 이미지가 덧씌워진 불행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둘 다 받는 중인데요.

얼자 출신인데도 이시애의 난과 남이의 옥, 무오사화, 그리고 중종반정 등 역사적으로 큼지막한 일들을 겪으면서 계속해서 살아남아 높은 자리에 오른 걸 보면 정말 대단한 입지전적인 인물인 것 같기는 하지만 자신이 살아남으려고 남을 희생시킨 것은 간신이라 불릴만하기도 하네요.

 

조선시대 처세술과 생존력 만렙이던 유자광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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