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역사 탐구

덕혜옹주. 평생 독살의 위험과 정신병으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by 사탐과탐 2022. 3. 12.
반응형
어렸을때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가게 된 이후부터 평생 독살의 위험과 정신병으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12년 5월 25일, 일제에 의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덕수궁에 갇힌 채 감시당하고 고립된 삶을 살던 고종에게 한줄기 빛 같은 존재가 등장합니다.

바로 고종이 59세에 얻은 너무너무 예쁜 막둥이 딸 덕혜옹주가 태어난 것이죠.

그는 덕혜옹주를 너무 사랑했는데요.

 

한날은 유모이던 변복동이 누워서 덕혜옹주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고종이 옹주를 보러 나타났는데 이에 예를 갖추려고 유모가 일어나려 하자 고종이 "됐다, 애 깬다, 가만히 누워있어라" 라고 했다고 하죠.

 

일제에 의해 손발을 묶인 채 비참하게 살던 고종에게 웃음을 주는 존재라고는 덕혜옹주밖에 없었죠.

그래서 태어난 지 50일째 되던 날엔 아예 자신이 기거하던 함녕전으로 데리고 와버렸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시간이 흘러 덕혜옹주가 유치원에 다닐 나이가 되자 고종은 덕수궁 내에 있는 준명당을 황실 유치원으로 만들어 주었고 덕혜옹주 혼자 공부하면 재미가 없으니 대신들이나 지인들의 자식들을 데려와 옹주와 함께 공부하도록 만들어주기까지 했죠.

또한 애지중지하던 덕혜옹주가 행여나 걸어 다니다 다치기라도 할까 봐 150m 정도밖에 안되는 짧은 거리도 가마를 타고 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종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었는데요.

바로 덕혜옹주를 자신의 호적에 올리기가 힘들었던 것이죠.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로 덕혜옹주를 호적에 올리려면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일제는 대한제국 황실의 대를 끊으려고 했기 때문에 덕혜옹주가 태어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르는척하고 그녀를 황적에 올리는걸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자 고종이 직접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을 덕수궁으로 초대했고 덕수궁 유치원에서 놀고 있는 덕혜옹주를 그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딸이라며 소개해 준 것이죠.

그러자 더 이상 모른척할 수 없던 데라우치는 어쩔 수 없이 덕혜옹주를 황적에 올릴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 총독 관저로 돌아간 후 부하들에게 "오늘 멋지게 한방 먹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면서 덕혜옹주가 기댈 곳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비극적인 삶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죠.

1925년, 그녀의 나이가 13살이 되자 황족은 일본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명목하에 인질이 되어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보내진 것입니다.

 

이에 영친왕 부부는 자신들의 집에서 덕혜옹주를 지내게 하면서 학교에 통학하게 하고 싶어 했지만 일제의 반대로 옹주는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해야만 했죠.

그렇게 13살의 어린나이에 가족들 모두와 떨어진 채 일본학교의 기숙사에서 살게 된 덕혜옹주는 아버지가 독살됐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독살의 위협을 항상 느끼고 있었죠.

 

그러다보니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마실 물을 보온병에 넣어 다녔는데요.

하루는 같은 반 학생이 덕혜옹주에게 왜 항상 보온병을 들고 다니냐며 묻자 그녀는 독살당할까봐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덕혜옹주는 일본에 온 후로 계속해서 신경쇠약에 시달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던 1929년 5월 30일, 친어머니이던 귀인 양씨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요.

덕혜옹주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그녀에게 상복을 입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죠.

그 이유는 일본 황실에 속해있는 덕혜옹주가 신분이 낮은 귀인양씨의 장례에서 상복을 입고 예의를 갖추는 건 옳지 않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친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조차 슬퍼할 수가 없었고 상복을 입을 수도 없었던 것이죠.

 

이 이후로 덕혜옹주는 몽유병과 조현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일본은 슬슬 그녀를 결혼 시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죠.

사실 덕혜옹주가 8살이 되었을 때 나중에 덕혜옹주마저 영친왕처럼 일본인과 결혼을 시켜야 한다는게 싫었던 고종은 황실 시종인 김황진에게 옹주의 배필이 될만한 남자를 알아보라 했었습니다.

 

그렇게 김황진은 조카였던 김장한을 데려와 덕혜옹주와 약혼을 시켰는데요.

하지만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일본에 발각이 되어버렸고 일본은 김황진을 궁에서 쫓아내 버리면서 약혼도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렸죠.

 

그리고 그녀를 일본인과 결혼시키려 한 것입니다.

이에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는 어린 옹주마저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며 극렬히 반대를 했지만 1931년 5월 8일 결국 대마도의 백작 소 다케유키와 결혼을 하게 되죠.

 

민족 감정 때문인지 이 결혼 사실에 1931년 5월 1일 조선일보에서는 남편의 얼굴을 삭제한 결혼사진을 게재하기도 했고 소 다케유키가 애꾸눈이다, 키 작은 추남이다, 곱추다, 옹주를 폭행한다 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조선 왕실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했다는 루머도 돌 정도로 백성들조차 이 결혼식을 굉장히 싫어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소문과는 다르게 소 다케유키는 도쿄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해 영문학자이자, 시인, 화가, 대학교수를 지낸 엘리트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을 싫어하던 조선인들에게는 일단 왕녀와 백작의 결혼이므로 신분 차이가 크고 또한 조선은 대마도를 항상 밑으로 봤기 때문에 옹주의 남편감이 좋게 보일 리 없었죠.

 

어쨌든 결혼하고 1년 후에 두 사람 사이에서 마사에(정혜(正惠))라는 딸도 태어났고 평범하게 사는가 했지만 덕혜옹주의 조현병이 재발하면서 부부 사이도 파탄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옹주가 갑자기 나타나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 그냥 가기도 하고 어쩔 때는 환청을 듣고 뜬금없이 계속해서 큰소리로 웃기도 하는 등 이상 행동을 했다고 하죠.

 

또한 영친왕의 부인이던 이방자 여사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신경쇠약과 피해 망상을 겪었는데 사람들이 별 뜻 없이 한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엄청 신경을 쓰기도 했으며 무언증이나 감정이 무뎌져 멍하게 있는 등 여러 가지 이상한 증상이 있었다고 하죠.

그러나 당시 정신병에 대한 부정적 사회 분위기와 의료 수준도 미비한 시대라 그녀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평생 정신병을 달고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1945년이 되고 일제가 패망하면서 미군정이 들어섰는데요.

하지만 계속해서 덕혜옹주의 증상이 심해지자 1946년 결국 소 다케유키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켜버렸죠.

그런데 정신병원의 병원비가 장난 아니었습니다.

당시 대졸 초임 평균 연봉이 약 6,500엔 정도였는데 병원비는 한 달에 약 1만 엔에 달했던 것이죠.

 

그러나 황족이라는 이유로 국가에서 지원을 받던 덕에 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1947년 미군정이 신적강하를 통해 일본 천황의 직계자손들을 제외한 황족들과 귀족들은 모두 평민으로 강등시켜버리면서 황족들이 가지고 있던 특권들도 없애버리자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부부도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1955년,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와 합의를 본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 이혼을 하게 되었죠.

 

그녀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요.

이혼을 한 해에 딸 마사에 (정혜)는 와세다 대학을 나온 후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이자 시인이던 스즈키 노보루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평범하게 사는듯했던 딸은 결혼한 다음 해인 1956년 8월 26일 아침, 자살을 할 것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일본의 어느 산으로 들어간 뒤 실종이 되었죠.

이에 소 다케유키가 신고를 해 일본 경찰이 사라진 것으로 예상되는 산을 수색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실종된 후 오랜 시간이 흘러 사망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정신병원에 있던 그녀를 찾아낸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요.

그는 바로 과거 고종이 덕혜옹주와 결혼을 시키려고 했던 김장한의 형 김을한 이었죠.

김을한은 덕혜옹주가 현재 일본 정신병원에 있다고 기사를 써서 한국에 알리는 한편 그녀를 다시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제국 황실이 돌아오면 나라를 뒤흔들만한 정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대한제국 황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며 황족들의 국적회복과 귀국 요청을 전부 거부하고 있었죠.

그래서 덕혜옹주를 비롯한 일본에 있던 대한제국 황족들은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도 나중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며 다행히 괜찮아졌는데요.

더 이상 대한제국 황족들이 정치적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판단해 귀국을 허락했던 것이죠.

그렇게 덕혜옹주는 한국을 떠난 지 37년 만인 1962년, 드디어 고대하던 고국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창덕궁에서 순정효황후 윤씨가 보낸 상궁들과 친척들이 김포공항으로 마중을 나왔고 당시까지 살아있던 유모 변복동도 함께 그녀를 마중하러 나왔는데요.

입국장에서 덕혜옹주가 나오자 모두 큰절을 올리면서 연신 아기씨를 외쳤으며 유모 변복동은 덕혜옹주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통곡을 했습니다.

 

당시 정신이 온전치 못하던 덕혜옹주는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창덕궁으로 돌아오자 어릴 적 기억이 났는지 궁을 돌아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죠.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냈는데요.

가끔씩 정신이 돌아올 때 마사에를 외치기도 하고 아리랑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72년, 전 남편이던 소 다케유키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낙선재로 찾아와 덕혜옹주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덕혜옹주의 병세가 악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그의 부탁을 거절했고 이에 소 다케유키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하죠.

그렇게 낙선재에서 살다가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수강재에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재 그녀와 대한제국 황족들의 평가는 엇갈리는데요.

일본에서 그들이 차별을 받으며 어렵게 살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고 실제로는 일본 황족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죠.

당시 조선 백성들의 삶은 지옥과 같았지만 조선 황실은 이왕가라는 직함과 왕공족이라는 신분을 새로 받아 일본의 상류층으로 일본 황실 다음가는 부를 이루며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것에 최고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친일을 한 것이라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평가도 존재하고 비록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하지만 고작 13살의 어린나이에 강제로 일본으로 가 아버지 어머니와 떨어져 누군가가 통제하고 강제한 삶을 살며 늘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던 덕혜옹주를 동정하는 평가도 있긴 하죠.

 

어쨌든 나라가 망한 뒤 아무것도 못하던 고종에게 한줄기 빛이 되고 유일하게 큰 웃음이 되었던 덕혜옹주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