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여왕은 신라 말기의 여왕이었는데요.
이미 망해가던 신라를 더 빨리 망할 수 있도록 등 떠민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유명한 이유는 삼촌과 놀아나고 미소년들과 밤마다 즐겼기 때문인데요.
그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신라를 망하게 한 사람으로 손에 꼽히는 인물입니다.
이 인물은 신라의 왕이었는데요.
그가 왕위에 있으면서 수많은 반란과 농민봉기가 일어났고 도적이 들끓었으며 신라가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죠.
한 나라를 망친 최악의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인물은 바로 진성여왕입니다.
하지만 진성여왕이 더 유명한 이유는 바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군데 다 기록되어 있는 그녀의 은밀하고 문란한 사생활 때문이죠.
어쨌든 당시 신라는 이미 곪을 대로 곪아 있었던 상태라 신라가 망한 모든 책임이 진성여왕에게 있다고 볼 수는 없는데요.
그래서인지 그동안 망조에 뒤덮인 신라의 문제들이 진성여왕 때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더 많긴 하죠.
하지만 그녀는 왕으로써 무너져가는 신라를 개혁하기엔 모자람이 많았는데요.
진성여왕은 대체 어떤 왕이었을까요?
그녀의 아버지인 경문왕이 왕이었던 시절 신라에서는 이미 많은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죠.
심지어 874년엔 경문왕이 있던 궁궐까지 반군이 침범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거기다가 매년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었고 그 뒤를 이은 왕인 헌강왕과 정강왕 때도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고 백성들은 삶에 지쳐 도적이 되는 등 신라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으며 이때부터 이미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신라의 귀족들은 정신 못 차리고 여전히 사치스럽고 방탕한 삶을 이어 나갔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늘 연회와 잔치에 절어있는 그들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죠.
백성들은 계속해서 굶어 죽어가는데 귀족들은 재산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무력을 사용했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정강왕은 과거에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위기에 빠져있던 신라를 구해낸 기억을 떠올렸고 이에 총명했던 여동생인 김만(金曼)을 다음 후계자로 점찍었던 것이죠.
그렇게 왕이 된 지 2년 만에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정강왕은 "여동생 만이 총명하니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처럼 잘 해낼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김만이 신라의 51대 왕으로 즉위했는데 그녀가 바로 진성여왕이죠.
진성여왕의 외모는 장부와 같이 골격이 다부지고 컸다고 하는데요.
정강왕은 죽기 전 신라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승부수로 진성여왕을 선택했던 것이었죠.
진성여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전국의 죄수들을 사면하고 모든 주와 군의 1년 동안의 조세를 면제해 주기도 했는데요.
이는 바로 선덕여왕이 즉위하고 한 행동과 같았죠.
그러나 문제는 선덕여왕 때에는 1년 동안 세금 면제를 해주어도 미리 쌓아두었던 돈이 많았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었는데 진성여왕이 세금 면제를 해주었을 때 신라의 국고는 이미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죠.
말 그대로 돈도 없으면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해버린 것이었습니다.
더 웃긴 사실은 불과 2년 후에 재정난에 부딪치자 백성들에게 세금 내라며 독촉을 하기까지 했다는 것이죠.
거기다가 진성여왕이 즉위하고 나서 그녀의 유모였던 부호부인과 삼촌이었던 상대등 김위홍(金魏弘)이 정권을 잡아 권력을 휘둘렀는데요.
김위홍과 부호부인은 부부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진성여왕은 삼촌이던 김위홍과 근친상간을 벌였고 이는 훗날 두고두고 진성여왕을 욕하는데 사용이 되었죠.
하지만 당시 신라는 골품제의 특성상 근친혼을 장려할 정도였고 김유신도 조카와 결혼했으며 김춘추의 부모님은 5촌 사이였을 정도로 굉장히 흔했습니다.
그래서 진성여왕과 김위홍의 근친상간 이야기는 당시엔 그렇게 비정상적인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죠.
어쨌든 그녀는 김위홍에게 대구라는 화상과 함께 신라의 노래인 향가를 수집해 책을 만들게 했는데 그게 바로 <삼대목> 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진성여왕의 업적이라고 내세울 만한 게 이것 밖에 없을 정도인데요.
더 안타까운 점은 현재 이 책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죠.
시간이 흘러 김위홍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밤마다 은밀히 미소년 2~3명을 궁에 불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매일 밤을 여러 명의 남자들과 어울려 음탕한 시간을 보냈다고 하죠.
그리고 함께 밤을 지새운 남자들에게 중요한 직책을 줘 나라의 정사를 맡겨버렸고 진성여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안하무인이 되어버린 미소년들은 사람들에게 뇌물을 강요하며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고 온 조정은 극도로 문란해졌죠.
그러자 여기저기에 진성여왕을 비방하는 방을 붙여놓는 사건이 발생했는데요.
극대노한 진성여왕은 방을 붙인 자를 당장 잡아들이라 명했지만 잡지 못했죠.
그러던 어느 날 한 신하가 진성여왕에게 "방을 쓴 자는 분명히 지식인이지만 뜻을 펴지 못한 자의 소행인 것 같습니다. 그는 왠지 대야주에 숨어사는 왕거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죠.
이에 진성여왕은 즉시 왕거인을 잡아들였고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왕거인은 억울함에 시를 한수 지었는데 갑자기 마른하늘에 구름과 안개가 끼더니 천둥번개가 치며 우박이 쏟아져 내리자 겁을 먹은 진성여왕은 얼른 그를 풀어주었죠.
이듬해인 889년에는 또 사고가 터지고 마는데요.
여러 주와 군에서 세금을 내지 않아 국고가 텅텅 비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진성여왕은 관리를 각지로 파견해 세금을 걷도록 독촉을 했죠.
2년 전에 세금 면제해 줄 때는 언제고 이제는 세금 내라고 난리를 친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먹고살기 힘들던 백성들을 점점 더 궁지로 몰아넣자 산으로 도망가 도적이 되기도 했고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죠.
이때쯤 사벌주 (현재 경북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나는데요.
진성여왕은 영기에게 군사를 내어주고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에 영기는 군을 이끌고 반란군 토벌을 위해 진군했는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반란군의 규모가 너무 커서 영기는 겁을 먹고 더 이상 진군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죠.
중앙에서 파견된 관군은 반란군에 완전 쫄아서 어버버 대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 지역 촌주 우연은 적은 수의 군사로 반란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원종과 애노의 난은 진압이 되었는지 사라져버렸는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관군의 지휘관이던 영기의 그런 행동에 개빡친 진성여왕은 그를 참수해 버렸고 전사한 촌주 우연의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했죠.
이 원종과 애노의 난은 더 이상 신라 정부에서 지방을 통제할 능력과 힘이 없다는 걸 만천하에 드러내버린 사건이 되었고 후삼국시대를 연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신라의 상태가 그렇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나 그야말로 한반도는 군웅할거의 시대가 펼쳐지죠.
891년 10월에는 북원의 군벌 양길이 궁예에게 군사를 내어줘 북원 동부락과 명주 관내를 습격하기도 했고 다음 해인 892년에는 견훤이 무진주를 점령한 뒤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도 했죠.
이후로도 궁예는 계속해서 여러 지역을 공격해 훗날 철원 등 10여 개의 군현을 자신의 땅으로 삼아버렸습니다.
이때 궁예와 견훤이 후고구려, 후백제를 공식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후삼국시대의 기틀은 진성여왕이 신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이미 완성되다시피 해버렸죠.
하지만 진성여왕의 무능함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미 국력도 쇄했고 민심도 흉흉했기 때문에 신라 정부의 영향력은 경주 인근까지 밖에 끼치질 못했으며 나라는 손 쓸 틈 없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죠.
894년에 최치원이 시무 10조를 올리자 진성여왕도 개혁이 필요하다 생각했는지 그것을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는데요.
하지만 이 개혁은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조차 되지 않았고 실패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또한 신라 정부의 영향력은 이미 지방에는 미치지 못했고 경주 근처에만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는데 896년에는 붉은 바지로 옷을 통일한 '적고적' 이라는 도적들이 경주 서쪽까지 약탈할 정도로 경주의 치안마저 엉망이었죠.
하지만 진성여왕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손놓고 있다가 결국 왕위에 오른지 11년이 된 해인 897년 6월, 자신이 부덕해서 나라가 이렇게 됐다고 하며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는데요.
큰 오빠였던 헌강왕의 서자인 요(嶢)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북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 그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6개월 후인 12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진성여왕의 사망할 당시 나이가 29살에서 33살 사이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그렇게 굉장히 젊은 나이로 사망을 한 것입니다.
그녀는 신라 역사상 유례없이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난 데다가 갑작스럽게 요절한 걸 봐선 반란이 있었다는 설도 있고 오랜 기간에 걸친 근친혼으로 신라 왕실에 있던 유전병이 발병했을 수도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장례에 대한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내용이 다른데요.
삼국사기에는 황산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되어있고 삼국유사에는 화장한 뒤에 뼛가루를 서훼 또는 미황산에 뿌렸다고 되어있죠.
신라가 망한 건 모두 진성여왕 탓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녀가 왕위에 오르고 난 뒤 이룬 업적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보니 그녀의 탓도 전혀 없는 건 아니겠네요.
확실한 건 당시 곳곳에서는 반란과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나라 상황이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던 점인데 이런 모든 상황을 수습할 만한 역량이 진성여왕에겐 없었다는게 그녀가 신라를 망하게 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모두 떠안아야 했던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이미 망국의 길로 접어든 신라의 등을 떠밀었던 여인 진성여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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