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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상상을 초월하는 조선시대의 과거시험.

by 사탐과탐 2022.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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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은 종9품의 관료 자리도 알고 보면 굉장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얻어낼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엄청난 경쟁률을 뚫었던 종9품들.. 상상을 초월하는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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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관료들의 계급이 정1품에서 종9품까지 나누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종9품의 관료들은 조정에서 늘 잔심부름만 하는 모습만 보일 뿐 아니라 별다른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보잘것없는 자리처럼 느껴질 때가 많죠.

 

하지만 은근히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은 이 종9품의 관료 자리도 알고 보면 굉장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얻어낼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상상을 초월하는 조선시대의 과거시험 준비과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공무원을 뽑을 때 시험을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고대사회에서는 나랏일을 돌보는 관료들을 뽑을 때 시험보다는 혈연이나 지연, 학연 등으로 인재를 뽑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고 하죠.

그러다가 고려의 4대 왕인 광종이 중국의 수나라로부터 과거제도를 들여왔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부터는 인재를 뽑는데 이 과거제도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과거시험에 미친 듯이 올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하죠.

왜냐하면 양반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집안에서 4대 내에 과거에 급제한 조상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인데요.

그리고 고려와 달리 조선시대는 과거제도가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더욱 여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난이도나 과정, 경쟁률 어느 면에서도 만만한 게 없어 수십 년을 공부해도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죠.

과거시험은 문과와 무과 잡과로 나누어져 있는데 오늘 다룰 내용은 이 중에서도 문과시험에 대한 것입니다.

 

문관을 뽑는 시험인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소과 합격자는 초급 문관에 임명될 수 있었으며 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과 성균관에 들어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죠.

이중 소과는 초시와 복시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먼저 초시에서 각 도별로 1차 합격자를 먼저 뽑은 뒤 복시에서 최종 합격자를 가렸는데 3년에 한번 전국에서 생원 100명, 진사 100명 만을 뽑았다고 하네요.

 

이렇게 소과를 통과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죠.

성균관에 하루 출석할 때마다 1점의 출석점수를 주는데 1년에 300점 이상을 채워야 대과시험중에서도 1차 시험에 해당하는 초시를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극 속에서는 김진사 박생원같은 사람이 워낙 흔하게 나오다 보니 별거 아닌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 사람들도 500대1 이상의 미친 경쟁률을 뚫어낸 고인물들이었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후의 시험 과정이 워낙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조선 중기 이후에는 진사, 생원 신분만 가진 채 양반 직위를 유지하고 그다음 시험은 아예 포기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요즘 시대에는 재수생이나 삼수생만 돼도 주변에서 눈치를 주거나 스스로 위축되는 경우가 많은데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워낙 악명이 높다 보니 20수생 40수생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고 하죠.

 

1887년 고종 시절에 관료가 된 박문규라는 사람은 무려 83세의 나이로 대과에 도전해 급제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난이도의 대과 시험을 치렀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과에 최종합격한 사람들에게는 종9품의 관직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조선시대에서 공무원이 승진하는 것은 현재의 공무원들과 비슷하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고 합니다.

종9품에서 정1품까지 오르려면 17계단이라는 오랜 과정이 걸리는데 한 계단을 오르는데만 최소 3~4년이 걸렸다고 하죠.

 

그런데 만약 대과 시험에 합격할 수만 있다면 종6품에서 정9품까지의 벼슬을 받고 관직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를 쓰고 대과 시험에 매달리는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음서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고위 관료의 자제들은 문과시험에 급제하지 않고도 관직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은 승진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과거에 도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하네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시험에 도전하는 양반들은 보통 5살부터 하루의 대부분을 과거시험 준비에 쓰게 되는데 최종 급제자의 평균연령이 35세 정도라고 하니 보통 30년 정도를 과거시험을 준비하는데 쓰는 셈이죠.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로 나눠져있는 대과 시험 중 초시와 복시만 통과해도 관리가 될 수 있지만 어찌 보면 왕이 직접 주관하는 시험인 전시가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 있었는데요.

 

왜냐하면 전시의 성적 순위에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관직의 등급이 결정됐기 때문입니다.

최종 급제자 33명 중 1등인 장원급제자는 종6품 2등과 3등에게는 정7품이 주어졌으며 4~10등은 정8품, 11~33등은 정9품의 관직을 받게 되죠.

 

석유급들만 모인 고인물시험에서 전국 11등을 해야 겨우 정9품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극에서 늘 시키는 일만 하는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보이던 종7품~종9품의 관리들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으시나요?

 

지금까지 조선시대 과거제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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