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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이야기들

윤심덕. 불후의 명곡 '사의 찬미'를 녹음하고 바다 한가운데서 김우진 작가와 사라져버린 사건

by 사탐과탐 2021.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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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은 일제시대 조선인 최초의 소프라노 이었습니다.
그녀는 불후의 명곡인 '사의 찬미'를 녹음한 이후 친분이 있었던 김우진 작가와 바다 한가운데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는데요.
당시 그 둘의 행방에 대해 정사 스캔들로 소문이 나며 엄청난 이슈였다고 하는데..

 

 

1926년 8월 5일, 동아일보에서는 남녀 두 명이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2일 전인 8월 3일 밤 11시에 일본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 연락선 도쿠주마루호가 다음날 새벽 4시쯤 쓰시마섬을 지나고 있었죠.

 

그런데 여자 한 명과 중년 남자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자기 함께 바다에 몸을 던진 것입니다.

그 즉시 배를 멈추고 그 인근 바다를 수색했지만 뛰어내린 남녀는 찾을 수 없었죠.

승객 명부와 대조해 본 결과 남자는 전남 목포에 살던 30세 김수산씨였고 여자는 경성부에 살던 30세 윤수선씨 였습니다.

 

하지만 훗날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일은 조선인 남녀가 함께 스스로 세상을 떠난 최초의 사건이었죠.

그러나 이 동아일보의 기사는 의문점이 많았는데요.

오늘은 이 의혹이 많은 사건의 주인공, 윤심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윤심덕은 일제강점기의 성악가이자,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였죠.

그녀는 '사의 찬미'가 대표곡으로 그녀가 죽고 나서 사회적 관심 덕분인지 '사의 찬미'는 전대미문의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평양에서 4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죠.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진남포로 이사를 가 살았는데 아버지는 나물장사를 하고 어머니는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부모님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 자식 교육에 힘썼죠.

 

그러다보니 윤심덕은 숭의여학교, 언니와 여동생은 이화학당, 남동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윤심덕은 어려서부터 성격도 활발해서 '왈녀'라고 불릴 정도였고 둘째였지만 남매들이 모두 그녀를 따랐을 정도였으며 동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을 정도로 형제들끼리 우애도 좋았죠.

 

또 독특한 점은 이 형제들이 모두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것인데요.

여동생은 피아니스트에 남동생은 바리톤 성악가였습니다.

윤심덕 역시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해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들어갔지만 나중에는 운명처럼 음악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그녀는 조선총독부에서 뽑는 관비 유학생에 발탁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도쿄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도 윤심덕의 활발한 성격은 장점이 되어 키도 크고 외모에도 자신감이 넘쳐 도쿄의 남자 유학생들과 친하게 잘 지냈다고 하죠.

 

1921년에는 유학생들과 만든 동우회의 조선순회공연에 참가했는데 거기서 극작가이자 와세다 대학 유학생인 김우진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김우진은 아내와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었죠.

거기서 김우진과 처음 만난 윤심덕은 그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는데 그러다보니 그녀와 김우진은 서로 연인관계다 라는 소문이 나게 됩니다.

 

(김우진과 윤심덕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 둘의 지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둘은 절대 연인관계가 아니었다고 하죠.

어쨌든 1924년, 그녀는 학업을 마치고 다시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음악무도대회에서 독창 공연을 시작으로 성악가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한국인 최초의 소프라노로써 명성을 쌓기 시작했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생활이 힘들자 음악선생이나, 배우 등도 겸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교사로 임용이 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는 항상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결혼이 파투 나기도 하는 등 개인적으로는 힘든 삶을 살고 있었죠.

 

그러던 1926년, 윤심덕은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오사카에 있는 닛토 레코드사에 가게 됩니다.

거기서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왈츠 <다뉴브강의 잔물결>의 음악소리에 맞춰 다른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를 녹음하게 되죠.

원래 이 노래를 녹음 하려던 계획은 없었지만 다른 노래들을 녹음하던 중에 윤심덕이 갑자기 이 노래를 녹음하길 원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녀는 음반 녹음을 하기 위해 일본에 와있는 동안 당시 일본에 있었던 김우진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렇게 둘은 또 연락하며 지내게 되었죠.

그러던 그해 8월 3일 밤, 김우진과 윤심덕은 무슨 이유에서 인지 함께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도쿠주마루호에 탑승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인 4일 새벽 4시가 되자 배는 쓰시마섬 앞바다를 통과하고 있었죠.

일등석을 순찰하던 선원은 객실문 한곳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하고 손전등으로 안을 비춰보니 승객은 없었고 짐만 있었습니다.

뭔가 불길한 마음에 객실 안을 들어가 불을 켜보니 팁 5원과 메모지가 남겨져 있었는데 메모에는 '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주시오,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 서대문정 윤수선' 이라고 적혀있었죠.

 

뭔가 큰일이 났구나 싶었던 선원은 즉시 조타실로 향했고 그렇게 배는 멈춰져 배 안과 밖을 수색했지만 둘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배는 예정 시간보다 반나절이나 늦게 부산에 도착했고 배에서 내린 승객들은 탑승했던 수에 비해 두 명이 부족했죠.

훗날 그 둘은 김수산, 윤수선이 아니라 김우진, 윤심덕이라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윤심덕은 당시 최고의 소프라노로 엄청난 인기몰이 중이었고 김우진은 목포의 알아주는 부자였던 김성규의 장남으로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앞길이 창창한 극작가였죠.

이에 여러 신문들은 '정사(情死) 사건'이라며 대서특필 했지만 사실 이것이 정사 사건이 확실한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기사에서는 김우진과 윤심덕이 서로 껴안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바다에 몸을 던지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그리고 선원이 새벽 4시에 열린 방문을 발견했을 뿐 그들이 언제 바다로 투신했는지, 투신한건 맞는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사실은 8월 3일 김우진과 윤심덕이 일본에서 같은 배를 탔다는 것과 8월 4일 쓰시마섬을 지날 무렵, 그들은 배 안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승객 명부를 대조해 보니 김우진과 윤심덕이 내릴 땐 없었다는 것 이 세 가지 밖에 없었죠.

 

목격자도 없고, 유서도 없으며, 두 사람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었지만 신문들은 모두 둘은 연인관계였고 어떤 이유로 인해 같이 동반 자살한것이다 라고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게 현재까지도 정설로 여겨지고 있는데요.

 

김우진과 윤심덕의 가족들이나 지인들은 동반자살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며 그 소문에 대해 부정했고 심지어 자살했다는것 조차 부정했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두 사람이 실제로 연인관계가 맞는지 지인들에게 물은 결과 모두가 둘은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다고 대답했죠.

설사 연인관계였다고 해도 갑자기 둘이 같이 동반자살을 한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갑자기 조선행 배를 탄 것도 의문스러운 점이고 또한 둘 다 조선에 가는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것, 굳이 가명을 쓰면서 배에 탑승한 것 또한 풀리지 않는 의문점입니다.

그러다보니 죽음을 가장했다는 생존설이 제기되기도 했고 아니면 사고로 바다에 떨어졌다거나,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라는 의혹이 생기기도 했죠.

 

사의 찬미가 포함된 윤심덕의 마지막 음반은 그녀가 죽고 나서 일주일 후부터 일본과 조선 전역에 대대적으로 발매 되었는데 이 사건과 관련되어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그녀의 음반이 불티나게 팔리자 '사의 찬미'의 음반 판매를 위해 레코드사와 짜고 죽음을 가장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습니다.

 

(사의 찬미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던 중 1931년 이탈리아에서 잡화점을 하는 동양인 부부가 있는데 그들이 김우진과 윤심덕이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죠.

그러자 김우진의 동생은 조선총독부를 통해 주이탈리아 일본대사관에 확인 요청을 했지만 그런 사람은 없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1934년, 로마에서 악기상을 하는 김우진과 윤심덕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나타났지만 그 또한 거짓말이었다는게 밝혀지기도 했죠.

그런데 타국으로 둘이서 죽은척하고 사랑의 도피를 했다면 배를 탈 때 굳이 다른 이름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 또한 말이 안 된다고 합니다.

 

김우진의 가족들은 현상금을 걸면서까지 시신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두 사람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죠.

여전히 그냥 따로 자살한 것이다, 사고 난 것이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등 많은 의혹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지만 어쨌든 분명한 것은 1926년 8월 4일 이후 그 둘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 미스테리한 사건은 훗날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졌죠.

과연 그 둘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최고의 소프라노, 윤심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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