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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폭군 간신 탐구

임해군. 선조의 첫째 아들로 동생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길 정도로 성격이 포악했던 왕자

by 사탐과탐 2021.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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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첫째 아들 임해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말 성격이 포악해서 오죽하면 선조가 동생인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주었죠.
백성이고 고위 관리들이고 괴롭히지 않은 사람이 없는 인물입니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조차 백성들을 괴롭히다 큰 곤욕을 치르기도 하죠.

 

 

1592년 5월 23일. 선조 25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고 약 17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공격한 임진왜란이 발발했습니다.

이에 선조는 첫째 아들이던 임해군에게 함경도로 가서 병사를 모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렇게 임해군은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죠.

 

그는 함경도에 도착 후, 이복동생이던 순화군과 합류한 뒤 모으라는 병력은 모으지 않고 그곳의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녔습니다.

결국 왕자들의 횡포를 참다못한 국경인과 국세필, 그리고 함경도의 백성들은 그들을 붙잡아 일본군의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줘버리는 일이 벌어졌죠.

 

임해군의 패악질이 얼마나 참기 어려웠으면 오죽하면 백성들에 의해 붙잡혀 적군에 보내졌으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왕자들이 적군의 인질이 되어 버렸으니 조선도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된 것은 확실했고 이후 몇 차례의 협상 끝에 겨우 풀려날 수 있었죠.

 

오늘은 전쟁통에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백성들까지 괴롭히고 포로까지 되었던 선조의 첫째 아들 임해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572년 9월, 선조와 공빈김씨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선조에게는 서장자이기도 했고 선조가 죽고 나서 다음 왕이 되는 광해군의 친형이었죠.

하지만 그의 나이가 5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공빈김씨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의인왕후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어머니 공빈김씨를 기억하고 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의인왕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해군은 성격이 더럽고 굉장히 난폭했으며 공부도 게을리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했죠.

그는 어릴 적부터 개망나니짓을 하고 다녔는데요.

백성들을 폭행하거나 죽이는 건 기본이었고 남의 땅이나 노비 등 재산을 갈취하는 것 또한 빈번히 발생했습니다.

 

문제는 그럴 때마다 선조가 혼내지는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이었죠.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었고 선조는 임해군의 성격이 방탕하고 포악하다는 이유로 동생이었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임해군은 광해군이 세자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두 형제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갈라지고 말았죠.

 

그렇게 임해군은 함경도로 병력을 모으기 위해 떠났지만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는 등 고초를 겪었고 이후 자신이 전쟁 포로가 되었었다는 점을 굉장히 괴로워하며 잊고 싶어 했지만 평안도에서 만났던 기생은 잊을 수 없었던 것인지 그녀를 한양으로 데려와 오랜 기간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골 때리는 왕자였는데요.

 

어쨌든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임해군은 더 망나니짓을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아까 말했다시피 백성들을 폭행하고 죽이는 행위는 여전했으며 심지어는 백성들의 닭이나 돼지 등을 빼앗는 좀도둑 짓도 했을 정도였죠.

돈을 많이 모은 상인들에게는 온갖 누명을 씌워 돈을 바쳐야만 풀어주었으며 어떤 여인의 남편을 죽인 뒤 그 여인을 남자종과 결혼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큰어머니였던 하원군의 아내에게 욕하면서 난리를 치기도 했고 어쩌다 시비가 붙기라도 하면 상대가 누군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하들을 시켜 집단폭행을 일삼기도 하는 등 왕자의 신분을 이용해 계속해서 온갖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문제는 아버지 선조의 행동이었는데 임해군이 무슨 짓을 해도 감싸주었죠.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횡포는 조정 관리들도 피해 갈 수 없었는데요.

지방의 관리가 한양에 용무가 있어 오기라도 한 날에는 수행원을 붙잡아두고 관리를 협박해 많은 재물을 빼앗기도 했죠.

또한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을 중간에서 강탈하기도 했는데 이는 나라의 재산을 중간에서 빼돌린 것으로 도적이나 산적들이 하는 짓을 왕자가 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아버지 선조의 최측근인 도승지, 유희서를 죽이는 일까지 벌이는데요.

유희서의 첩실이 굉장히 예쁘다는 소식을 들은 임해군은 그녀를 빼앗기 위해 일을 벌인 것이죠.

유희서는 당시 영의정이었던 한음 이덕형의 고종사촌이었는데요.

 

임해군은 부하였던 김덕윤에게 지시해 도적인 것처럼 꾸민 다음 유희서를 살해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덕형은 분노하며 선조에게 상소문을 올렸고 이에 선조는 임해군을 궁으로 불러 크게 화를 내며 질책했지만 임해군은 끝까지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발뺌하는 것이었죠.

 

그러자 또다시 선조는 임해군을 감싸며 처벌은 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유희서를 살해한 김덕유는 결국 체포되었는데 그는 감옥에서 의문사 해버렸고 범인으로 임해군이 지목되기도 했죠.

 

그런데 여기서 선조는 이해할 수 없는 짓까지 하는데요.

임해군을 수사했던 포도대장을 파면하고 감옥에 가둬버렸고 임해군을 고발했던 유희서의 아들 유일은 곤장 100대를 때리고 유배를 보내버렸습니다.

심지어 처음에는 유일을 사형에 처하려고 했지만 유일의 어머니가 아들을 살려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는 바람에 목숨만은 살려주었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아들의 죄를 덮어주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범죄자인 아들을 고발했다고 피해자들과 아들을 수사했던 수사관을 처벌한 것입니다.

이에 영의정이던 이덕형은 선조에게 유일을 사면해달라고 주청했으며 유희서의 죽음에 대한 조사와 함께 임해군을 처벌해달라고 말했지만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죠.

그러자 이덕형은 영의정 자리에서 사직하고 조정을 떠나버렸습니다.

 

어찌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당시 사관은 이때의 일을 "왕법이 시행됐다면 임해군은 당연히 형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총명을 잃고 오히려 개인의 사랑에 빠져 그의 죄악을 모르고 벌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문과 신문의 형벌이 도리어 도적을 잡는 책임을 맡은 중신에게 미치게 했다." 라고 기록하며 선조를 맹비난 했다고 하죠.

 

임해군에게는 눈에 뵈는게 없었습니다.

더욱더 기고만장해진 임해군은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여전히 온갖 악행을 일삼으며 살았는데 무뢰배들은 나중에 임해군이 없을 때도 그를 사칭하고 다녔고 백성들을 괴롭히며 못살게 굴자 선조는 그 무리의 우두머리인 임해군은 벌주지 않고 나머지 무뢰배들만 잡아들여 벌주었다고 하죠.

 

선조는 이런 망나니 같은 임해군을 계속 감싸고만 돌았는데 임해군을 처벌하라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치자 결국 한걸음 물러서게 되었습니다.

임해군이 빼앗은 재물과 노비들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고 그에게 피해를 받은 백성들에게도 배상해 주라고 명하자 백성들이 거리에 뛰쳐나와 눈물을 흘리며 춤을 추었다고 하죠.

 

하지만 선조는 끝끝내 강력한 처벌은 하지 못했고 빗발치는 신하들의 상소에도 죽기 직전까지 그를 감싸주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임해군은 동생인 광해군도 미워했는데요.

광해군 때문에 자신이 세자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자신의 평소 행실이 개막장이어서 세자 자리를 못 준 건데 말이죠.

 

아무튼 광해군 역시 임해군을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친형이라는 놈이 자꾸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기도 하며 온갖 악행은 다 저지르고 다니면서 왕실의 위엄을 계속 떨어트리니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죠.

 

천만다행인 점은 선조도 임해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세자로 책봉하지 않았던 것인데 임해군이 만약 다음 왕이 되었다면 조선 최고의 폭군 타이틀은 임해군이 가져갔을 확률이 높았을 것 같네요.

 

어쨌든 결국 선조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세자였던 광해군이 왕이 되자 임해군의 목숨은 바람 앞에 촛불이 되어버렸는데요.

서인, 북인, 남인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신하들이 임해군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렸고 그가 무사들과 어울려 다니며 사병을 양성하고 있다는 상소도 올라왔죠.

 

그러자 광해군은 임해군을 잡아들이라 명했는데 임해군은 여장을 하고 도망치고 말았고 그렇게 역적 누명이 쓰여 붙잡힌 후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광해군은 임해군의 종들을 모조리 잡아와 임해군이 역모를 꾀했다는 사실을 불라며 고문하기 시작했죠.

 

그러자 지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한 종 한 명이 결국 무기들을 땅에 묻어놨다고 진술하고 말았는데 광해군은 아마 벌써 다 파냈을꺼다 라고 하며 그냥 임해군은 역적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임해군은 교동도로 유배를 보내진 후 1609년 5월, 변사체로 발견이 되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다만 부인 허씨가 관을 열어보니 그의 목에는 새끼줄을 감았던 붉은 흔적이 있었다고 하죠.

 

워낙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보니 그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존재하는데요.

이정표라는 사람이 임해군에게 독을 먹이려다가 여의치 않자 목을 졸라 죽였다는 이야기와 광해군이 암암리에 암살했다 또는 사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훗날 인조 때에 귀양지의 관리가 독살했다는 노비의 증언이 나오기도 했지만 전부 명확한 증거는 없고 현재까지도 사인은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연산군은 세자 시절 때나 왕으로 즉위한 뒤 10년간은 통치를 잘했었는데 반해, 임해군이 만약 왕이 되었다면 연산군은 상대도 되지 않는 최악의 폭군이 탄생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왕자라는 신분을 이용해 온갖 나쁜 짓을 하고 살다 결국에는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의문사를 당한 임해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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