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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폭군 간신 탐구

폐비윤씨. 모전자전, 역대 최악의 폭군인 연산군의 어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by 사탐과탐 2021.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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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악의 폭군인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는 처음엔 착했지만 연산군을 낳고 나서 정신병이 걸린 것 같이 이상하게 변했는데요.
연산군과 같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폐비윤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고 일컬어지는 연산군은 야사에 의하면 사약을 먹고 죽은 어머니 폐비윤씨의 피가 묻은 적삼을 보고 눈 돌아가서 온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켰다고 말하는데요.

 

조선시대 왕들은 태조 이성계를 닮아서인지 체격이 크고 우람했던 것에 비해 연산군은 키는 크지만 말랐고 여자 같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고 하죠.

야사에 의하면 연산군이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 한 신하가 거울을 보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어머니 폐비 윤씨를 닮았다는 뜻이기도 한데요.

조선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 된 아들을 낳았던 어머니, 폐비윤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녀는 단종 3년인 1455년에 아버지 윤기견과 어머니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양반 가문이었지만 자신이 직접 베를 짜서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아갔죠.

 

그러나 그녀의 외모는 정말 아름다웠는데 야사에서는 그녀를 마치 선녀 같았다고도 하고 그녀가 나타난 것만으로 주위가 고요해지고 서늘해질 만큼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종의 아내였던 공혜왕후는 몸이 굉장히 허약했고 결혼 한 지 6년이 지나도록 임신 소식이 없자 대신들은 성종에게 후궁을 들일 것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473년 3월, 윤씨가 간택이 되어 숙의의 품계를 받아 후궁이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녀는 후궁이 된 이후로도 검소한 생활을 이어나가 성종과 왕실 어른들에게도 총애를 받았는데요.

아름다운 외모에 성격 또한 착했으며 예의도 발라 다른 후궁들과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러다 1년의 시간이 지나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성종은 새로운 중전을 간택하지 않고 모두에게 평이 좋고 자신도 평소 눈여겨보고 있었던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승격하게 되었죠.

 

하지만 숙의 윤씨는 그런 성종의 결정에 "저는 본디 덕이 없으며 과부의 집에서 자라 보고 들은 것도 없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선택하신 뜻을 저버리고 거룩하고 영명한 덕에 누를 끼칠까 두렵사옵니다." 라고 하며 중전이 되기를 거절했고 여기서 성종은 더 마음에 들어 하며 그녀를 중전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윤씨는 임신 6개월이 되어가던 상황이었는데요.

1477년 11월이 되자 마침내 왕실 모두가 기다리던 아들인 성종의 적장자이자 원자, 연산군을 낳았죠.

그런데 그렇게 착하던 윤씨가 연산군을 낳고 나서부터 별안간 성격이 난폭해지기 시작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는 자신의 명을 재촉하는 악수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어느 날 성종의 아버지였던 덕종(의경세자)의 후궁, 귀인권씨의 집에 투서 하나가 날아들었는데 그 내용이 어마무시한 것이었죠.

내용은 당시 성종이 총애해 마지않던 소용정씨와 숙의엄씨가 중전이던 윤씨와 원자인 연산군을 해치려고 한다는 내용의 투서였던 것입니다.

 

일국의 왕비와 다음 왕이 될 수도 있는 왕자를 해한다는 것은 역모에 준하는 일이었으므로 즉각 조사에 들어갔고.

조사 결과는 어처구니없게도 중전 윤씨가 소용정씨와 숙의엄씨를 질투해 어머니인 신씨와 자신을 보필하던 궁녀들, 주변인들을 시켜 그녀들을 해하고자 했던 자작극임이 드러나고 말았죠.

 

또한 성종은 어느 날 윤씨의 처소에 들렀다가 굿을 하는 방법과 저주를 거는 방법이 적힌 서책과 알 수 없는 주술들을 써놓은 종이 그리고 극약인 비상이 묻은 곶감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는 윤씨가 중전이 되고 연산군을 낳은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1477년에 벌어진 일인데 이에 성종과 자성대왕대비는 중전 윤씨의 도덕적 결함을 이유로 들어 폐위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대신들은 원자를 낳은 왕비를 폐위해선 안 된다고 하여 실행하지 못했고 빈으로 강등시키는 것에 대한 것조차 대신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굿과 저주에 대한 서책과 비상을 궁내로 들여온 나인 삼월과 사비는 죄를 피하지 못했는데요.

삼월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사비는 장 100대를 맞고 지방의 관비로 내쳐지게 되면서 사건이 마무리되었죠.

 

그러나 2년이 채 안 되어 그녀는 결국 폐서인 되어 궁 밖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계속해서 온갖 패악질을 일삼고 너무나도 감정 기복이 심해 밥을 먹다가 갑자기 화를 내며 상을 엎어버리는 등 알 수 없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거기다가 윤씨는 항상 비상가루를 옷 속에 넣어 다녀 후궁들은 항상 독살의 위협에 시달렸고 또한 후궁들에게 말하기를 "비록 지금은 너에게 죄를 줄 수가 없지만 장차 반드시 너를 족멸시킬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하죠.

 

또한 계속해서 "내가 오래 살아 장차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라는 말을 계속 했는데 이는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왕위를 이어 받으면 모두를 죽여버리겠다는 의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임신을 못 하게 하거나 몸을 마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적은 책을 숨겨놓았다가 대비에게 들키기도 했으며 나무패에 말뚝을 박는 등의 주술행위까지 한 것이죠.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궁내에 쳐진 장막을 보면서 마치 초상집 같다는 말을 했는데 궁에서 초상을 치른다면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와 대비였던 인수대비 그리고 왕이었던 성종이 죽었을 때인데 이 말 역시 윗전에 보고되면 목숨을 보전하기 힘들 정도의 굉장히 심각하고 불경스러운 말이었죠.

 

그리고 스스로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쳐넣는 가장 심한 행위는 바로 성종의 면전에서 그의 눈을 뽑고 발자취까지 없애버리며 팔도 끊어버리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전부터 성종이 심기를 불편해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윤씨는 굉장히 기뻐했다고 하고 성종이 거처하는 처소에 무단으로 침입을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왕이 먹는 음식을 만드는 곳에는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는데 그곳까지 마음대로 드나들었다고 하죠.

 

상황이 그렇다보니 중전인 윤씨가 성종의 음식에 비상을 넣을까 두려워 윤씨가 지나가는 곳에는 성종이 먹을 음식 등을 두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습니다.

애초에 비상을 궁내에 반입한 자체가 죄였고 성종에게 행한 이 모든 것들은 명백한 반역행위였죠.

오죽하면 훗날 인수대비는 성종이 윤씨가 가지고 있던 비상에 의해 해를 입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을 정도였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참고로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내서 그녀를 폐위시켰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사실 야사이고 실록에는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어쨌든 참을 만큼 참았던 성종은 드디어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요.

윤씨를 폐서인 시켜 궁 밖으로 내쫓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었습니다.

 

중전의 위치에 적장자인 원자까지 낳은 상황에서 다른 큰일만 없다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아들이 왕위에 오를 것이고 자연스레 왕실에서 최고 어른이 되어 편하게 살수 있었는데 갑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패악질을 부려 스스로 명을 재촉한 것이죠.

 

아무튼 1479년 6월, 성종은 대신들을 소집해 윤씨를 폐서인 하는 교지를 내렸고 이에 대신들은 이번에도 원자가 계신데 어떻게 어머니인 윤씨를 내쫓냐며 엄청나게 반대를 했지만 성종은 뜻을 굽히지 않고 윤씨를 폐위 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신하들의 반대가 너무나도 거셌기 때문에 성종과 인수대비 그리고 자성대왕대비까지 윤씨를 폐위했어야 하는 이유를 신하들에게 설명해야 했었는데요.

 

성종은 신하들에게 앞서 이야기했던 폐비윤씨의 악행들을 하나하나 다 설명했고 마지막에는 "내가 살아있을 때야 괜찮겠지만 내가 죽으면 분명히 피바람이 불었을 거다" 라고 마무리하며 신하들에게 폐위의 정당성을 밝히기까지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폐비 윤씨는 쫓겨난 후로도 죄를 전혀 뉘우치지 않자 쫓겨나고 3년 후인 1482년 8월 16일, 성종은 마침내 폐비 윤씨를 사사하라는 명을 내렸고 그렇게 윤씨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그런데 후궁들이 윤씨를 모함했다는 이야기도 야사에 실려있지만 당시에 후궁들에게 중전마마라 하면 쳐다보기도 어려웠을 정도로 절대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이 또한 말도 안 된다고 하죠.

 

그 유명한 장희빈도 인현왕후 앞에서는 찍소리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록에 기록돼있는 그녀의 악행만 보아도 쫓겨나 사약을 받기엔 충분했죠.

그렇지만 이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고 어머니 폐비 윤씨의 폐출과 사사에 관련된 사람들은 모조리 잡혀와 국문을 당하고 처형 당했는데 한명회는 부관참시 당했고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지고 간 이세좌는 처형 당했으며 성종의 후궁이던 귀인정씨와 귀인엄씨 또한 고문을 당한 뒤 죽임을 당했죠.

 

그리고 연산군에 의해 윤씨는 제헌왕후로 추존되기도 했지만 중종반정 이후 다시 시호와 능호는 모두 삭탈 되었습니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목숨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긴 했지만 어쩌다 난폭하게 성격이 변해버려 호의호식 할 수 있었던 삶을 제 발로 차버렸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조선시대 최악의 폭군 연산군의 어머니이던 폐비윤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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