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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짐 크로우 법. 흑인노예 해방 후 그들을 계속해서 차별하기 위해 만든 악법

by 사탐과탐 2022.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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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노예 해방 후 흑인들은 계속해서 차별을 받았었는데요
그들을 계속해서 차별하기 위해 만든 악법 짐 크로우 법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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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에 개봉했던 영화 그린북 이라고 아시나요?

이 영화의 줄거리를 대충 보면 완벽한 천재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와 그리고 그의 운전기사인 다혈질에 깡패 같은 '토니'가 당시 흑인에게는 위험했던 미국 남부 투어 공연을 떠나 일어나는 흑인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이 그린북이라는 것은 사실 흑인 전용 가이드 북을 말하는데 1950~60년대에 흑인들이 여행을 할때 이용을 할수 있었던 호텔과 레스토랑, 주유소 등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죠

왜 그런책을 가지고 여행을 했냐하면 당시 백인들이 이용했던곳에 흑인이 가면 아무 이유없이 흑인 이라는 이유로 집단 구타를 당할수도 있었고 심지어 불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미국의 흑인 노예 해방이후에도 계속 되었던 흑인 차별과 그에 대한 법률 짐 크로우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당시 백인들이 이용하는 장소의 입구에는 "개와 흑인은 출입금지" 라고 버젓이 적혀있었는데 미국에서는 1964년까지 이러한 것들은 당연한것으로 여겼고 심지어 합법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인종차별 법은 바로 '짐 크로우 법' 이라고 불렀습니다

짐 크로우는 1830년대 뮤지컬쇼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딴것이었죠

토마스 대디 라이스라는 백인 배우가 까만칠을 하고 흑인 처럼 행세하며 부른 '점프 짐 크로우' 라는 노래가 대중들에게 많이 불리며 유행하기 시작했는데요

 

애초에 백인들이 얼굴을 검게 칠하고 흑인 역할을 하는 쇼에서는 그들을 비하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리고 그들을 비하하는 노래마저 유행하자 '짐 크로우' 라는 말이 흑인들을 경멸하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미국 남부에서 터지고 있었는데요

 

남북전쟁을 하기전 미국 남부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흑인 노예들이 목화밭에서 노동을 착취 당하고 있었고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를 하면서 남부에 있던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어 버렸던 것이죠

하지만 남부 백인들의 머리속에서는 여전히 흑인들은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흑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자유인임을 인정할수 없었고 한자리에서 밥을 먹는다던지, 함께 같은 건물에서 숙박을 한다던지 하는건 너무나도 불쾌한 것이었죠

 

그렇게 연방정부(북군)는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들을 어느정도 까지는 보호해주다가 1877년 복구 작업이 끝나면서 연방군의 남부에 대한 군정도 끝났고 그렇게 연방군은 남부에서 철수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1876년부터 남부의 주들과 도시들에서는 백인과 흑인이 같이 공공시설을 이용할수 없도록하기 위한것 뿐만아니라 계속해서 흑인들을 차별하고 억압하기 위해 흑백 분리 정책법인 '짐 크로우' 법을 만들었던 것이죠

 

바로 합법적으로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고 차별할수 있도록 한것이죠

거기다가 흑인들에게 합법적으로 경제적, 교육적, 사회적 불이익을 주는것을 제도화 해버린 것입니다

이에 흑인들은 '분리 되었지만 평등하다' 라는 얼토당토안한 말로 차별당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이 법의 내용을 보면 학교나 공공건물, 공공장소 등에 출입할 때 백인이 사용하는 문과 흑인이 사용하는 문이 달랐고 식당에서도 흑인은 백인과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을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이나 물을 마시는 음료대도 백인용과 흑인용으로 엄격히 구별되었죠

흑인교회 백인교회가 따로 있었으며 심지어 죽어서 묻히는 묘지도 따로 썼어야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죄를 지은 백인과 흑인도 구분지어서 투옥되었고 버스나 기차를 탈때도 흑인은 맨 뒷자리에 앉았어야 했죠

그러다 혹시나 백인이 버스에 타면 흑인은 그 자리를 양보했어야 합니다

또한 백인이 운영중인 여러 상점들에는 "개와 흑인은 출입금지" 라는 팻말이 붙기 시작했죠

 

물론 이 모든것은 합법이었고 만약 흑인이 이것들을 지키지 않을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는 바로 학교나 공공시설, 의료시설,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 등에서 백인들 것이나 흑인들 것이 비슷하다면 서로 분리되어 이용 하더라도 다 평등하다고 주장했던 것이죠

그러나 문제는 흑인들에게 제공되는 시설이나 서비스의 질은 백인들에게 제공되는 것에 비해서 정말 하찮은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짐 크로우 법과 인종차별에 대해 반발하는 흑인들도 많았었는데요.

그렇게 경찰에 붙잡혀 구금되는 흑인들도 많았고 미국 법원에서의 수많은 판결들 역시 짐 크로우 법을 지지 하고 있었죠

1892년 6월에 인권운동가 호머 플레시 라는 사람이 루이지애나주의 한 기차의 일등석을 예약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차를 타고 자신이 예약했던 자리에 앉자마자 기차의 차장은 그에게 다가와 일등석은 백인만 이용할수 있다고 하면서 당장 흑인 칸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죠

그러자 플레시는 내돈 내고 내가 일등석을 예약했는데 왜 자리를 옮겨야 하냐며 차장의 명령을 묵살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결국 플레시는 보안관에 의해 체포되어 벌금을 내야 했고 법을 어겼다며 재판까지 받게 되었죠

 

1심 재판에서 존 하워드 퍼거슨 판사는 플레시가 흑백분리를 규정한 열차법을 위반했다고 보고 25달러의 벌금형을 내렸습니다

이에 플레시는 흑인 인권 단체와 함께 루이지애나 대법원에 항소 했지만 패소해버렸고 또다시 인종차별을 금지한 수정헌법 위반이라며 연방 대법원에 올렸지만 최종심에서 9명의 연방 대법관들이 7대1의 압도적인 판결로 퍼거슨 판사의 판결에 손을 들어주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대법원에서는 철도회사가 백인 승객들이 타는 객차와 흑인 승객들의 객차를 분리한것을 두고 '분리되긴 하지만 똑같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합법이라고 판결 내렸던 것입니다

연방군이 철수하고나서 주 정부의 권력을 되찾은 남부 백인들의 횡포를 연방정부와 대법원이 눈감아주었던 것이죠

 

이 대법원의 판결은 법이 대놓고 흑백 차별을 인정한 것이었고 미국 사법 역사상 최악의 판결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이 플레시 판결 이후로 흑인들은 더 심한 차별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수정헌법 14조 '적법 절차 조항'과 '평등 보호 조항' 도 정부 활동에만 국한된다고 판결이 나버리자 백인들은 대낮에 길에서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기도 했고 집단린치 사건도 일어나는 등 여러가지 흑인 차별 문제가 무분별하게 일어나 버린것이죠

 

이와 동시에 남부의 여러 주에서는 '한방울 법(one drop rule)'을 제정해 유색인종의 피가 한방울이라도 섞여 있으면 백인이 아니라고 정해버렸습니다

그렇게 핍박을 받아도 남부에서 살고 있던 흑인들은 그곳을 벗어나기도 어려웠는데요

북부에서는 남부에서 흑인들이 차별받고 있다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척 해버렸으며 그곳을 벗어나 도망쳐 오던 흑인들을 받아들일 의지도 없을뿐만 아니라 그들을 받아들일 조건도 갖추지 못했었기 때문에 흑인들은 극심한 차별과 폭압에도 남부에서 계속 사는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1896년에 있었던 이 '플레시 대 퍼거슨 재판' 판결을 뒤집어 버리는 사건이 58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후에 일어나게 되는데요

1951년 미국 캔자스 주 토피카에 살고 있던 여덟살의 초등학생 린다 브라운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집에서 가까운 학교를 놔두고 약 1.6km 떨어진 흑인들만 다니는 학교를 매일 걸어서 다녀야 했던 것이죠

 

이에 린다의 아버지 올리브 브라운은 집에서 가까웠던 초등학교로 전학을 신청했지만 그 학교의 교장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이 신청을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열받은 올리브 브라운이 토피카 시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걸게 되었죠

이 사건 소송은 결국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가게 되었는데요

 

1954년 5월 17일, 대법원이 만장일치로 '공립학교의 인종차별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브라운의 손을 들어줬고 3년이라는 긴 소송은 끝을 맺게 되죠

아무리 평등한 시설이나 교육 커리큘럼을 제공한다고 해도 인종을 분리시키는것 자체가 인종차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기존에 공고히 박혀있었던 '분리하되 평등하다'라는 논리를 허물고 '분리하면 무조건 불평등하다' 라는 법리를 제시 한것이었죠

얼 워런 대법원장은 빠른 시일내에 남부에 존재하던 불평등한 인종분리를 통합하라고 했지만 남부의 주에 속한 백인 학교 3000여개 중에서 고작 600여개만이 통합했고 대다수의 학교들은 이 판결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브라운 판결은 교육에만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공시설이나 공공장소의 인종분리까지 폐지하지는 못했지만, 인종차별 철폐에 있어서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 이었죠

이 판결은 1896년에 있었던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의 대법원 판결을 완전히 뒤집은 사건이 되었고 이 판결이 도화선이 되어 여러 시설이나 흑백 분리 정책의 철폐를 주장하는 민권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일이 있고나서 1년후인 1955년 12월, 흑인들의 민권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벌어졌죠

그 사건은 바로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서 살고 있던 로자 파크스 라는 흑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 인데요

 

어느날 그녀는 버스를 타고 좌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 후 한 백인이 그 버스를 타게 되었고 백인 운전사는 그녀에게 백인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라고 요구했죠

이에 로자는 운전사의 요구를 거부했는데요

결국에는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구금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재판 과정중에서 그는 인종차별주의자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당하기 일쑤였고 백인기자들은 그녀와의 인터뷰 중 "몸을 판 경험이 있느냐" 라는 모욕적인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심재판에서 그녀는 10달러의 벌금형을 받았지만 즉시 항소했고 결국 1956년 12월 결국엔 승소를 하게 되죠

하지만 그녀는 일자리에서도 해고 당하고 말았고 계속해서 살해 협박에 시달리게 되면서 결국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동생이 사는 북부의 디트로이트로 도망치듯 이사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그녀에 대한 탄압은 흑인들을 더욱 단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주도로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이 벌어졌죠

그러자 흑백차별에도 적당히 순응해오던 몽고메리시의 흑인들은 382일동안 버스승차를 거부 하며 차별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흑인 민권 운동은 미국 전역으로 번지게 되면서 결국 짐 크로우 법은 1964년에 비로소 폐지되기에 이르렀죠

 

이때 흑인 인권 개선 운동을 주도한 마틴 루터 킹은 그해에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로자가 체포되었던 거리는 그녀의 이름을 따 ‘로자 파크스 가’로 바뀌었다고 하죠

흑백 분리 정책이던 짐 크로우 법은 비록 없어졌지만 현재까지도 미국 뿐만아니라 수많은 나라에서 여전히 많은 인종차별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아시아인에게 묻지마 폭행을 하는 등 아시아인 혐오가 극에 달했다고 하던데 피부색에 따라서 차별하고 혐오하는건 왠지 이해가 안가기도 하네요

 

미국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차별을 받았던 흑인들과 그들을 옥죄던 법 '짐 크로우 법'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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