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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두 발 달린 건 사람 빼고, 네 발 달린 건 책상과 의자 빼고, 날개 달린 건 비행기 빼고 모두 먹는 중국 음식의 역사

by 사탐과탐 2023.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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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 달린 건 사람 빼고, 네 발 달린 건 책상과 의자 빼고, 날개 달린 건 비행기 빼고 모두 먹는 중국 음식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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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음식이라고 할 수 있죠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중국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겠지만 중화요리가 현재 이탈리아 요리 프랑스 요리와 함께 세계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대중적인 요리임은 부정하기 힘든 것이 현실인데요 

오늘은 이 중국음식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의 음식은 왕실요리와 귀족요리 그리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서민요리가 한데 어우러져 발전한 것이라고 하죠 

신화시대라 불리는 삼황오제시기는 너무 소설이니 건너뛰고 그 이후 하나라 시절에는 의적이라는 인물이 누룩을 활용해서 술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상나라 시기에는 탕왕의 비를 따라온 이윤이라는 사람이 세발솥과 도마를 가지고 탕왕에게 요리를 올리면서 국정에 관한 조언을 하자 이윤을 마음에 들어한 탕왕이 그 자리에서 재상으로 등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요리사가 중국문헌에 등장했던 최초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주나라 시절에는 130종류나 되는 식물과 200여 종류의 동물 그리고 물고기가 요리재료로 등장하며 다양한 향신료와 양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던 시기라고도 하죠

다음은 기원전 770년부터 시작되는 춘추전국시대입니다

춘추좌씨전을 보면 식사를 손으로 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봤을 때 춘추전국시대에는 아직 숟가락이 없었고 젓가락은 국의 건더기를 집어먹을 때만 사용한 것으로 짐작되죠

 

지금은 중국에서 고기를 이용한 요리 중 대표적인 것이 돼지고기 요리이지만 당시에는 사육 기술이 아직 발달하지 못한 것을 고려해봤을 때 돼지고기보다 개고기를 더 많이 먹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공자와 그의 후예들이 지은 경전인 '예기'를 보면 공자가 키우던 개가 죽자 제자에게 사체를 먹지 말고 묻으라고 시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당시에 개고기를 먹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죠

 

이 시기에는 다양한 가축들을 식재료로 사용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말과 소 양 닭 개 돼지는 군주나 제후의 의례에 주로 사용되는 귀한 식재료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국시대 모사들의 책략 모음집인 전국책을 보면 제나라 선왕이 '태뢰'를 대접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태뢰가 바로 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소와 양 그리고 돼지를 바치는 일이라고 하네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논어'를 보면 공자의 식습관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공자가 회는 가늘게 썬 것을 좋아하고 생선은 상한 것은 먹지 않는다라고 되어있는 걸로 봐서 이 시절부터 이미 생선회를 먹었을 거라고 짐작되죠

지금의 중국요리하면 불맛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 당시에는 생식이 매우 일반적이었다고 하는데요

이때까지는 아직 철제 요리도구가 대중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음식을 가열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번거로운 작업이었던 데다가 당시의 냄비나 사발등도 열전도율이 낮은 도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차라리 육류나 생선등을 적당히 썰어서 소금만 뿌린 채로 먹는 것을 선호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공자도 육회를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예기'에 의하면 당시 중국인들은 회의 양념으로는 파와 겨자를 육회 양념으로는 간장을 사용했다고 하죠

다만 기생충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생식 문화는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참고로 지금은 중국요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식재료가 바로 새우지만 이 시절까지만 해도 새우는 그리 인기 있는 식재료가 아니었다고 하네요

 

다음은 4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왕조를 유지하며 식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한나라 시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한나라 사람들은 서역으로 진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주식으로 기장이나 보리를 먹어야만 했지만 시베리아로부터 제철 기술이 도입되면서 농업 생산성이 크게 올랐고 장건이 실크로드를 개척하면서 이란과 이라크 등지에서 포도와 석류 오이 호두 그리고 향채와 녹두 파 밀 등 많은 것들이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식탁은 무척이나 풍성해졌다고 합니다

 

밀가루를 의미하는 면(麵)이라는 글자가 한나라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하죠

장건이 두 번째로 서역을 방문하고 돌아온 기원전 115년 그가 다시 한나라로 귀국할 당시 서역에서도 사절들이 잇달아 장안을 방문했는데 밀가루의 등장과 보급 시기를 고려하면 이때 생산성 높은 외래종 밀이 분식 문화와 함께 서역으로부터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다만 밀가루 음식이 서민들에게 본격적으로 퍼진 것은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후한 중기 무렵부터라고 하네요

 

2세기에 지어진 사민월령이라는 책을 보면 입추에는 '자병'과 '수요병'을 먹으면 안 된다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자병은 바로 중국에서 쓰이는 면의 원형으로 짐작되고 수요병은 지금의 수제비와 비슷한 음식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1970년대 호남성에서는 마왕추라는 대형 고분이 발굴됐는데 이 마왕추는 기원전 2세기 무렵 사망한 지방 귀족의 무덤으로 식량에서부터 조리된 식품까지 다양한 부장품이 발견되면서 당대의 식문화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됐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부장품들을 살펴본 결과 당시 육류로는 소 양 돼지 말 개 사슴 토끼등을 사용했고 조류는 닭과 꿩 오리 참새 기러기 심지어는 백조나 학까지 먹었으며 어류는 잉어와 붕어 쏘가리 등 주로 민물고기가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고기를 조리하는 방법으로는 구이를 해 먹거나 채소를 넣고 고깃국을 끓이는 방법도 있었고 바싹 마를 때까지 졸이는 방법이나 육회로 먹는 방법까지 있었다고 하네요

중국인의 식탁에 빵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후한시대 말기에서 삼국시대로 접어들 무렵입니다

 

이때 등장한 빵은 '호병'이라 불렸는데 평평하고 둥근 모양으로 인도에서 먹는 난과 비슷한 형태였다고 하죠

서진의 사마표가 한나라의 역사에 대해 기록한 '속한서'에 의하면 후한의 영제가 이 호병을 무척 좋아했으며 낙양 귀족 사이에도 유행했다고 합니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인 분식이 주식이 되려면 발효라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수죠

위나라와 서진의 관리였던 하증이라는 사람은 미식가로 유명했는데 그는 '증병(지금의 찐빵)'이 부풀려져 모양이 열십자로 갈라지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요

 

발효시키지 않은 빵은 열십자로 갈라지지 않으므로 하증이 먹은 빵은 이스트를 이용해 발효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데 이 하증이라는 인물은 278년에 사망했으므로 적어도 3세기엔 이미 중국에 발효 기술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맥적은 고기에 양념을 한 통구이 음식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것은 맥족에게서 유래한 요리로 위진시대 때 중원지역에 전해졌다고 하죠

오호십육국에 대해 기록한 진서에 의하면 맥적은 당시의 귀족과 서민이 모두 즐겨 먹는 대중적인 요리라고 돼있는데 아쉽게도 그 정확한 조리법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특이하게 사슴 머리를 이용한 요리가 크게 유행했다고 하는데 사슴의 머리를 삶아서 썰고 돼지고기와 함께 다시 끓인 후 생강과 귤껍질 산초 식초 소금 발효된 콩을 곁들여먹는 음식이었다고 하죠

특이한 조리법과 진귀한 재료가 들어가서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네요

 

마지막은 송나라입니다

북송대의 도시생활에 대해 기록해 놓은 '동경몽화록'을 보면 음식 중에서도 특히 외식 요리에 대한 기록이 많다고 하죠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 책에 나오는 요리가 70종 가까이나 되는데 그중에 돼지고기와 소고기가 들어간 요리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소는 농사를 짓는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먹지 않았을 수 있다고 쳐도 돼지고기까지 먹지 않은 것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 일까요?

그 이유는 당시 송의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무척 저급한 음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북송의 유명한 시인이자 정치가인 소동파가 돼지고기의 가격이 진흙처럼 쌌다고 표현할 만큼 저렴해져서 고양이 사료로 돼지고기를 먹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시인 이태백도 술안주로 닭과 오리 거위 생선 소고기와 양고기등 많은 고기를 먹었지만 유독 돼지고기만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송나라의 문물에 대해 기록한 '송회요집고'에 따르면 1077년 북송의 궁중 수라간에서 1년 동안 양고기는 43만 근을 사용한 반면 돼지고기 사용량은 겨우 4천 근에 불과했다고 하네요

 

위나라가 멸망한 이후 300여 년의 전란 끝에 통일된 나라인 수나라가 세워지고 한족인 이 씨가 당나라를 세웠지만 오랜 세월 만주족의 영향을 받아 온 당나라는 양고기가 돼지고기보다 고급스럽다고 여기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지체 높은 사람들은 돼지고기는 백성들이나 먹는 음식으로 생각했고 그런 분위기가 당나라에 이어 송나라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나라 때 명의라고 소문난 손사막은 돼지고기를 많이 먹으면 풍이 생길 수 있으며 근육과 뼈에도 좋지 않다는 악평을 남겼고 그 외 유명한 문학가들도 돼지고기를 좋지 않게 보는 말을 많이 남겼다고 하죠

 

그렇게 송나라시절에는 돼지고기가 천대받은 반면 양고기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하네요

송나라 사람들은 특별한 날이나 외출을 하는 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걸 즐겨서 서민들도 많은 식비를 쓰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평소에 외식을 즐겨했다고 하죠

때문에 대도시에서는 수많은 식당들이 생겨났는데 수도인 개봉의 경우 전문적인 식당의 수가 무려 72개나 되었고 과자나 음료 과일이나 후식을 파는 노점 그리고 유명한 술을 유통하는 주조장과 다양한 차를 파는 전문찻집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송나라는 무역이 발달해 여러 나라의 식재료가 들어온 데다 오늘날의 중국요리와 다를게 거의 없는 다양하고 고도로 발달된 요리법까지 갖추고 있어 마라탕이나 훠궈 딤섬 소롱포 탄탄면등 많은 요리가 유행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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