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개와 석숭은 서로 자신들이 돈이 많다는걸 자랑하며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돈자랑 싸움을 했었습니다
부자가 돼서 돈을 펑펑 써보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꿈꿔보는 일이죠
하지만 아무리 돈이란것이 어떻게 쓸지 정하는 것은 주인 마음대로라지만 불필요한 곳에 너무 과하게 돈낭비를 하는 것은 보는 사람들의 눈을 찌푸리게 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왕개와 석숭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중국역사에 길이 전설로 남은 돈랄싸움을 하면서 역사서에 자신들의 이름을 남겼다고 하는데요
대체 그들은 어떤 싸움을 한 것인지 지금부터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중국 9주의 하나인 청주에서 태어난 석숭은 어릴 때부터 영특해서 그의 아버지인 석포가 "이놈은 재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큰 부자가 될 운명'이라며 아들에게는 단 한 푼의 돈도 물려주지 않았다고 하죠
서진의 초대황제 사마염에게 중용된 그는 관리로 지내는 동안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 백성들을 착취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오는 사신이나 상인들을 습격해 약탈하고
교역을 위해 장강을 다니는 상선까지 약탈하는 등 나라의 관리가 마치 산적이나 해적들이 할 짓을 저지르면서 무역로를 독점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왕개는 왕랑의 손자이자 사마염의 어머니인 왕원희의 남동생으로 당시 서진의 황제인 사마염의 외삼촌이었죠
하지만 학문이 뛰어나고 검소하기로 유명했던 누나 왕원희와는 달리 천성이 호사스러운 왕개는 사치와 낭비로 유명했다고 하는데요
오죽하면 한심한 손자를 본 할아버지 왕랑이 "내 손녀(왕원희)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게 아쉽다"라고 탄식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정확한 계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왕개와 석숭은 서로가 얼마나 더 사치를 부리나하는 라이벌 관계가 되었다고 하죠
석숭이 은으로 만든 요강을 쓰는 사치를 부린다는 소식을 들은 왕개는 황금으로 만든 세숫대야를 쓰는 걸로도 모자라 아예 집안에 있는 그릇들을 모조리 황금으로 바꾼 뒤 맥아당으로 그릇을 씻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정제된 물엿인 맥아당은 굉장히 귀한 재료였는데 왕개가 집안에서 그릇을 닦을 때 이 맥아당을 쓰는 사치를 부리자 석숭은 자기 집에서 밥을 할 때 짚 대신 밀랍을 땔감으로 써서 불을 피우거나 오색의 꽃초를 태워서 밥을 짓는 걸로 응수했다고 하죠
하루는 왕개가 자기 집문 앞 대로 양쪽으로 무려 40리(약 16㎞)에 걸쳐 붉은색 비단으로 천막을 치는 사치를 부리자 승부욕이 발동한 석숭은 왕개의 것보다 더 비싼 비단으로 50리(약 20㎞)나 되는 길이의 천막을 쳤다고 하네요
석숭이 자신보다 더 비싸고 큰 천막을 친 것을 보고 눈이 돌아간 왕개가 알루미늄과 실리콘이 반반씩 섞여있는 적석지로 천막을 장식하면서 자신은 천막을 장식하는데 이 정도 사치를 부릴 수 있다며 재력을 과시하자 오기가 난 석숭은 당시에 무척 귀한 향신료였던 후추를 천막에 듬뿍 뿌리면서 장식을 하는 어이없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왕개가 외국에서 수입한 최고급 면포인 화완포로 옷을 지어 입고 이를 과시하자 자극을 받은 석숭은 자신의 하인 50명에게 화완포를 지어 입혀주면서 우리 집에서는 하인들도 입고 다닐 정도로 흔한 게 화완포인데 뭐 그런 걸 자랑하듯 입고 다니냐는 식으로 왕개에게 큰 창피를 주었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문제는 이 화완포라는 천이 당시 사람들은 불로 세탁하는 것이라 알고 있었는데 이게 바로 석면이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하죠
석면은 광물이지만 마치 천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전 서양에서는 마법의 천이라고 불리는 일도 있었지만 현재는 이 석면이 침묵의 살인자라고 불릴 만큼 위험한 발암물질로 이 석면을 코로 흡입했을 때는 폐암을 비롯한 심각한 병에 걸릴 수 있다고 밝혀졌으니 만약 화완포가 정말 석면이었다면 왕개는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판 셈입니다
사치를 부리는 데는 역시 먹는 것이 빠질 수가 없죠
왕개는 미녀로 소문난 여자들 중에서도 딱 한 번만 출산 경험이 있는 사람을 돈을 주고 고용해서 돼지들에게 그녀들의 젖을 먹여 기른 후 그 돼지고기를 구워 먹는 것을 즐겼는데 그마저도 다 먹지는 않고 겨드랑이의 살 부분만 먹고 나머지는 모두 버렸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석숭은 닭에게 비단옷을 입히고는 금싸라기와 제호탕만을 먹여 기른 닭고기구이를 먹으며 경쟁심을 불태웠죠
제호는 우유를 정제한 치즈와 비슷한 유제품으로 당시에는 우유를 얻을 목적으로 기르는 소가 없었기 때문에 소가 생산하는 우유는 거의 대부분이 어린 송아지가 먹을 양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우유는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귀한 재료로 여겨졌는데 석숭은 왕개에게 이기기 위해 그 귀한 우유를 닭에게 먹이면서 기른 것이죠
그렇게 여러 번의 재력 대결에서 계속 왕개가 밀리는 모습을 보이자 황제인 사마염은 외삼촌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귀한 산호수를 선물했는데 그 크기가 무려 두 자(약 60cm)나 되는 것이었다고 하는데요
무려 황제의 하사품을 받고 신이 난 왕개는 석숭에게 이 산호수를 보여주며 자랑을 했고 석숭의 하인들도 산호수를 보고는 이렇게 진귀한 보물은 처음 본다며 감탄했죠
그런데 오직 석숭만은 그걸 보고도 콧방귀를 뀌더니 손에 쥔 등긁개를 던져 그 산호수를 부숴 버렸다고 합니다
깜짝 놀란 왕개가 황제께서 친히 하사하신 산호수를 부수다니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며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화를 냈지만 석숭은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자신이 보상해 줄 테니 걱정 말라는 대답을 했죠
그리고는 태연히 하인을 시켜 자신이 갖고 있는 산호수를 모두 가져오게 했는데 그중에는 사마염이 선물한 것보다 크기가 훨씬 크고 더 아름답기까지 한 산호수도 있었으며 왕개가 들고 온 산호수와 비슷한 물건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고 하죠
그렇게 태연한 말투로 마음에 드는 산호수를 가져가라는 석숭의 말에 왕개는 결국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의 하사품인데 그걸 마음대로 부숴버린 상황이니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당장에 석숭과 그 일가족들의 목이 모조리 날아갔겠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마염의 권력이 그리 강하지 못했고 반대로 위나라 시절부터 이어진 명문가들의 저력은 강했기 때문에 석숭이 그렇게 대범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죠
이 둘은 사치를 부리는 것뿐만 아니라 형편없는 인간성으로도 라이벌이라 불릴만했는데 왕개는 악사가 음악을 좀 잘못 연주했다고 그 자리에서 끌어내 때려죽이고 석숭의 경우 손님이 시녀가 주는 술을 안 받아먹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시녀를 끌어내 참수해 버릴 정도의 인간말종이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왕도라는 인물과 그의 사촌형 왕돈이 연회에 참가했는데 왕도는 술을 잘 못함에도 기녀들을 위해 열심히 술을 마셨지만 왕돈은 평소 술을 잘 마셨음에도 그날 일부러 술을 마시지 않는 바람에 그들에게 술을 따르던 기녀 셋의 목이 모두 날아가버렸다고 하죠
그 꼴을 보다 못한 왕도가 사촌형에게 형 때문에 지금 기녀들이 다 죽게 생겼으니 술을 좀 마시라고 타일렀지만 왕돈은 태연한 말투로 석숭이 자기 집 기녀들을 죽이는데 그게 나랑 뭔 상관이냐는 대답을 했는데요
훗날 왕도는 서진이 동쪽으로 피난하고 난 뒤 공신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지만 왕돈은 결국 반란을 일으키면서 역적으로 이름을 남겼으니 이때부터 미리 싹수가 훤히 보였던 셈이라고 할 수 있죠
석숭의 사치는 끝을 몰라서 화장실마저도 침실처럼 화려하게 꾸몄기 때문에 그의 집을 찾아온 손님들은 석숭의 집 화장실을 침실로 착각해서 깜짝 놀라 황급히 돌아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 시절 귀족 저택에 있던 화장실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간이화장실 같은 작은 공간이 아니라 오늘날 고급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내에 탈의 공간과 휴식 공간이 갖춰진 널찍한 휴게실에 가까웠기 때문에 석숭이 그곳의 인테리어를 본관 거실 수준으로 화려하게 꾸며놓은 것이죠
그의 집 화장실 바닥에는 최고급 양탄자가 쭉 깔려 있었으며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자색의 비단을 늘어뜨려 놓은 데다 향기가 나는 방향제를 놓아둔 것은 물론 수십 명의 미녀들을 대기시켜 화장실에 오는 손님들을 시중들 수 있게 해 놓았다고 합니다
거기다 변기에도 오리털을 잔뜩 깔고 손님들이 볼일을 보는 동안 여러 명의 시녀들에게 향수를 들고 있도록 시켜서 악취가 나는 것을 막았는데 그 당시에는 보통 화장실에서 냄새를 막기 위해 하는 방법이라고는 코 안에다 대추를 집어넣어 콧구멍을 틀어막는 원시적인 방법이 다였는데 석숭의 집에 가는 손님들은 어마어마한 사치를 부릴 수 있었던 셈이죠
또한 볼일이 끝나면 시녀를 시켜 손님들의 손을 씻겨주고 새 옷으로 옷을 갈아입게까지 해 줬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받는 손님들이 부담스러워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앞에 나왔던 진상 손님 왕돈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전혀 어색해하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서비스를 받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본 시녀들은 왕돈이 나중에 엄청난 일을 할 거라고 말했죠
다만 재력대결에서는 석숭이 왕개에게 이겼지만 왕개는 온갖 패악질을 부리고 사치를 즐겼음에도 잘 먹고 잘살다 죽은반면 석숭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하는데요
조왕 사마륜의 심복인 손수는 석숭의 심복인 반악이라는 인물에게 과거에 심한 욕을 먹은 데다 여러 차례 싸커킥까지 얻어맞는 갑질을 당하면서 그에게 굉장히 큰 원한을 품고 있었고 석숭 본인에게도 그가 아끼는 기생 녹주를 달라는 청을 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손수는 석숭을 죽일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가남풍을 죽인 사마륜이 혜제 사마충을 폐위시키며 황제가 되자 덩달아 지위가 높아진 손수는 자신의 권세를 이용해 사람들을 마구 죽여댔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석숭은 반악과 함께 회남왕 사마윤, 제왕 사마경 등과 연합해 사마륜을 제거하려 했지만 손수가 이를 먼저 눈치채고는 대군을 이끌고 선제공격을 해 석숭과 반악을 체포해 버립니다
그렇게 석숭은 51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었고 그의 막대한 재산은 전부 몰수되었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사치를 부려대던 석숭의 비참한 최후를 본 사람들이 '죽은 석숭보다는 산 돼지가 낫다'는 속담을 만들 정도였고 다산 정약용도 유배지에서 두 아들을 위해 쓴 하피첩이라는 편지에 석숭의 별장이 있던 금곡원에 지금 무엇이 남아있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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