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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조모. 신하인 사마소에게 반기(?)를 들었던 위나라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황제

by 사탐과탐 2023.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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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인 사마소에게 반기(?)를 들었던 위나라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황제 백주대낮에 신하들에게 죽임당한 비운의 황제 조모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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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왕이나 황제가 세상을 떠나면 언제 어디서 뭐 때문에 죽었는지 그리고 이후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 할 이 황제는 그냥 정사에도 뜬금없이 '260년, 향년 20세의 나이로 죽었다' 라고만 되어 있죠

사실 이 황제는 당시 최고 권세를 누리던 사마소를 죽이려 하다가 끔찍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대해 쉬쉬하며 이처럼 어이없게 기록되어 있는것입니다

 

이런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인물은 바로 위나라의 황제 '조모' 이죠

고평릉 사변이후 사마씨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서 황제보다 더 강력한 권세를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54년 2월, 황제이던 조방이 사마사를 죽이려던 계획을 세우다 그만 발각되어 버렸고 얼마안가 사마사에 의해 강제로 폐위되어 버렸죠

 

사마사는 이후 조모를 황제로 옹립했습니다

그런데 대게 이런 경우엔 권력가가 마음대로 휘두르기 쉬운 좀 어리숙한 인물을 황제로 옹립하기 마련인데 조모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릴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었기 때문에 굉장히 총명했고 재능도 뛰어나 많은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있었죠

심지어 사마사가 종회에게 조모가 어떤 인물인지 물은적이 있는데 종회는 "그의 재능은 진사왕(조식)과 같고 무용은 태조(조조)와 같다" 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거기다가 석포는 "위무제의 환생이다"라고 했을정도로 굉장히 똑똑했다고 하죠

또한 조모는 증조할아버지였던 조조에 관심도 많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조조가 어떠했는지 물어보는 경우도 많았고 조조에 대해 들은 조모는 그를 굉장히 존경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군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황제로 즉위하고나서 황실에서 사용하는 여러 비용들을 줄이고 각종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운 것들을 없애버렸죠

 

또한 백성들과 군사들을 위로했으며, 억울한 백성들을 두루 살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사마사에게 황금 도끼를 하사 하면서 조정에 들어올 때 종종걸음을 하지 않게 했고 어떤 일을 상주할 때는 환관이 관직과 이름을 말하지 않고도 입조할수 있게 했으며 검을 찬 채 신발을 신고 황제를 알현할수 있도록 해주었죠

이후 조모가 나이가 들면서 사마씨에 대항해 황권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이미 모든 권력이 사마씨에 넘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힘없는 꼭두각시 황제가 될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심지어 신하들은 조모와 직접 만나는것 조차 굉장히 어려웠으며 조모는 사마씨가 하라는대로 황명만 내릴뿐 모든 결정은 사마씨가 처리할 정도였죠

하지만 조모 역시 사마씨의 전횡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는데요

사마사가 관구검의 난을 토벌하고나서 복귀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군대를 이끈건 그의 동생 사마소였죠

이를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 조모는 사마소에게 낙양까지 올 필요없이 병력을 이끌고 허창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사마소가 허창으로 들어가면 조모는 신속하게 사마씨의 세력을 제거해 버린뒤 다시 황제로써의 권력을 차지할려는 속셈이었죠

하지만 이때 사마소의 심복이던 종회가 황제의 말을 들으면 안된다며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향해야 한다는 조언을 했고 그러자 사마소가 결국 대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오게 되면서 조모 역시 죽은 사마사의 모든 지위와 권한을 사마소가 이어받은것에 대해 허락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조모의 사마씨 축출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죠

한편 조모는 학문의 수준이 조씨 일가 중 최고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던 조식과 같은 수준이라는 평가답게 공부에도 열정적이었는데요

그는 고작 16살의 나이에 태학을 다니던 여러 유생들과 박사 유준, 마조 등을 토론으로 눌러버리기도 했으며 사마망, 왕침, 배수, 종회 등과 모여 학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를 쓰기도 했는데 그만큼 시도 잘썼다고 합니다

 

이후 256년, 조모는 다시 황권을 강화 시키기 위해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데요

바로 사마소에게 제왕의 상징인 곤룡포와 면류관을 선물했고 대도독의 칭호까지 하사했으며 사마사가 받았던 황금 도끼와 입궁할때의 특권을 내렸죠

그리고 258년에 사마씨의 횡포에 대항해 제갈탄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소가 이를 진압한 일이 있었는데요

이때 조모는 사마소를 상국에 임명하고 진공(晉公)에 봉했으며 구석(九錫)의 예를 내려 그의 공을 치하했던 것입니다

(구석 : 황제가 특히 공로가 큰 신하에게 하사하던 아홉 가지 물품)

 

그러자 사마소는 이를 거절했는데 조모가 9번이나 하사했지만 사마소는 이를 모두 거절했던 것이죠

사실 진공의 작위와 구석의 예를 받기엔 사마소의 공적이 부족했지만 조모는 이를 이용하기 위해 사마소에게 일부러 하사했던 것입니다

이때 만약 사마소가 조모가 내린 모든걸 넙죽 받았다면 잘못했다간 공적도 없는 주제에 황제를 겁박해 작위를 받아낸것처럼 보여 역적이 되어 토벌군을 불러 모을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조모는 이것을 노렸던 것인데 사마소 역시 보통은 아닌지라 조모의 의도를 간파했고 이걸 9차례나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하에게 9차례나 거절당한 조모의 권위는 땅으로 추락해버려 황제로써 실권이 전혀 없고 완전 허수아비 황제인것으로 인증해버린 상황이 되어버렸죠

그러다보니 조모의 분노와 초조함은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모는 사마씨의 권세를 비판하는 잠룡시를 쓰기도 했는데요

 

현재 조모가 지었다는 잠룡시는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삼국지연의에는 알수없는 사람이 지은 잠룡시가 있긴 하죠

연의에 나온 잠룡시에는 조모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259년 정월날, 황룡 두마리가 영릉현의 우물속에서 나타났는데 백성들은 이를 길조라고 생각했다고 하죠

하지만 조모는 황룡이 우물에 숨어있는것은 길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서 잠룡시를 지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잠룡이 우물속에 웅크리고 있으니 미꾸라지와 뱀장어가 날뛰네 이빨을 감추고 발톱을 숨긴모습이 내 신세와 같다" 라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연의에서는 이 잠룡시의 내용을 들은 사마소가 굉장히 불쾌해 했다고 묘사하고 있죠

어쨌든 똑똑한 황제는 사마소 입장에서도 굉장히 불편한 존재이긴 했습니다

조방을 폐위한뒤에 어리고 다루기 쉬운 황족을 황제로 올리는것이 사마소 입장에서는 정말 좋은 선택이었지만 황제로 옹립할만한 사람이 조모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냥 적당히 있다가 때되면 황위를 선양해주고 끝내면 좋을텐데 조모는 영민 했던탓에 황족의 실권을 되찾기위해 계속해서 사마소에게 반항했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러한 조모와 사마소의 관계는 결국 최악으로 치닫게 되는데요

260년 4월, 조모는 또다시 조서를 내려 사마소를 상국과 진공으로 임명하고 구석의 예를 내리려고 했지만 사마소가 또 다시 거절했던 것이죠

사마소도 적당히 거절해야지, 자신의 명령을 개똥 취급한 사마소에 결국 조모는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사마소가 모든걸 받아들여 수여식을 하게 되면 그때 참석한 사마소를 공격할 작정이었는데 사마소의 거절로 또 다시 계획이 틀어지자 조모는 자신의 명령이 전혀 먹히질 않고 언젠가는 사마소에 의해 폐위되고 모욕 당할것에 대해 항상 마음속이 불안했기 때문에 성미가 급했던 조모의 인내심이 끊겨버린 것이죠

 

그리고 갑자기 왕침, 왕경, 왕업을 불러들여 "짐은 이대로 폐위당할 치욕을 계속 겪을순 없소 오늘이야말로 경들과 함께 사마소를 치러 나가겠소"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왕침과 왕업은 입꾹닫 하고 있었고 왕경은 춘추시대 노나라 소공의 예를 들며 조모를 말렸죠

하지만 조모는 왕경의 조언을 듣지 않았으며 "일은 결정 되었소. 만약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무엇이 한스럽겠소?" 라며 일을 강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조모의 생각은 사마소가 자신을 함부로 죽일수 없을것이라 여겼고 만약 자신이 죽거나 다친다 하더라도 사마씨를 역적으로 몰수도 있고 그만큼 사마씨는 막대한 타격을 받을것이라 생각했죠

하지만 이미 병권은 모두 사마씨가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조모는 일을 도모할 병력을 모을수가 없었고 모은 병력이라고는 노복이나 환관들을 모은 수백명 뿐이었습니다

한편 왕침과 왕업은 왕경에게 조모에게 들은 이 이야기를 자신들과 함께 사마소에게 가서 알리자고 말했지만 왕경은 거절했죠

 

그러자 결국 왕침, 왕업만이 사마소에게 달려가 모든걸 일러 바쳐 버리면서 조모의 계획이 모두 들켜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계획이 탄로났다는 사실도 모른채 조모는 수백명의 병력을 이끌고 사마소를 치러 나갔죠

하지만 얼마안가 사마소가 보낸 가충의 정예 병사들과 맞딱뜨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겁먹은 조모의 병사들이 도망치자 조모는 스스로 검을 뽑아 가충의 병사들과 싸우게 되었죠

 

하지만 장병들은 감히 황제를 공격할수 없어서 이리저리 몸을 피하고 있었는데 이때 가충의 부하이던 성제가 어떻게 하냐고 가충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가충은 "사마소님께서 너희들을 보살펴 주신것은 오늘을 위해서였다. 뭘 망설이는가?'라며 다그쳤고 그제서야 병사들은 조모를 공격하기 시작했죠

이때 조모가 무엄하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 순간 성제가 조모를 향해 달려들었고 성제의 창이 조모의 몸을 꿰뚫어 버렸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황제였던 조모는 백주대낮에 사마소의 심복이던 가충, 성제, 성쉬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고 말았죠

이 소식을 들은 사마소는 크게 놀라 땅에 쓰러지며 "천하의 사람들이 나를 뭐라 하겠는가!" 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지만 정사에 기록된건 '향년 2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라고만 나온것이죠

 

하지만 이 엄청난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서 곽태후는 "조모가 미쳐서 나를 죽이려 했는데 사마대장군이 막아주었다" 라는 조서를 반강제로 쓰게 되었고, 그렇게 정사에 첨부 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모가 죽은 다음날 왕의 예로 장례를 치뤘고 그의 시신을 안장하러 가는 길엔 볼품없이 낡은 수레 몇대만 뒤따랐으며 심지어 아무런 깃발도 없었다고 하죠

 

이후 황제 시해에 대한 비난이 끊임없이 빗발치자 사마소는 "황태후를 보호하고 황제의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는데 성제 이 역적놈이 제멋대로 황제를 시해한 것이다" 라고 변명하면서 조모를 죽인 성제, 성쉬 형제를 처형하면서 꼬리자르기를 시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조모의 반란(?)은 허무하게 막을 내리게 되었죠

이후 사마소에게 이 사실을 밀고한 왕침과 왕업은 이후에도 잘먹고 잘살았으며 왕경은 조모를 부추긴 죄를 물어 온 가족들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마소에 의해 조환이 다음 황제로 옹립되었지만 그에게 충성하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으며 위나라는 실질적으로 멸망해 버린 상태가 되었죠

이후 사마소가 죽고나서 아들 사마염이 지위를 이어받은뒤 조환을 협박해 제위를 찬탈했으며, 서진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만약 조모가 고평릉 사변없이 정상적으로 황위를 물려받았다면 정말로 망해가던 위나라를 재건했을수도 있을것 같네요

 

지금까지 조조가 세운 위나라의 실질적 마지막 황제 조모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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