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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등애. 삼국지 후반을 대표하는 명장이자 목숨걸고 산을 타고 넘어가 촉나라 유선의 항복을 받아낸 인물

by 사탐과탐 2023.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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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후반을 대표하는 명장이자 목숨걸고 산을 타고 넘어가 촉나라 유선의 항복을 받아낸 인물 등애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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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 제갈량의 의지를 이은 강유는 몇차례에 걸쳐 북벌을 감행하지만 계속해서 한 인물에게 막혀버리는데요

그 인물은 농부 출신의 장군이었던 사람이었죠

이 사람은 삼국지연의에서는 강유의 라이벌로 묘사되기도 했고 훗날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 아무도 생각치 못한 계책으로 촉나라를 멸망시키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그는 바로 삼국지 후반 최고의 명장 중 한명으로 일컬어지는 '등애' 이죠

어릴적 등애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여남으로 가서 농사를 짓고 송아지를 기르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12살쯤 되었을때 곽현신이라는 사람의 마부가 되었는데요

어느날 곽현신과 함께 긴 거리를 가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곽현신은 등애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먼훗날 대단한 인물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하죠

그런데 그만큼 등애 또한 출세욕이 강했다고 하는데요

 

평소에 지형을 살피고 큰 산이나 연못을 보게 되면 어디 어디에 군영을 설치해야 좋을지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작전을 펼치면 좋을지 연구하는것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말을 심하게 더듬었기 때문에 말더듬이가 무슨 군사니 작전이니 하냐고 주위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고 하죠

말 더듬는것 때문에 그는 처음 벼슬길에 올랐을때 출세할수 있는 벼슬이 아닌 농사에 관련된 하급 관리직을 맡게 되었는데 이후 그의 뛰어난 능력 덕분인지 출세를 거듭해 훗날 인구수와 공물의 통계를 내어 보고 하는 자리인 상계리 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그가 상계리로 지낼때 중앙 정부로 보고를 하러 간 자리에서 뜻밖에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는 바로 사마의 였습니다

그때 등애는 사마의의 눈에 들게 되어 이후 상서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죠

그렇게 그는 중앙 관료로써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등애는 굉장히 큰 공을 세우게 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어느날 수춘 지역을 시찰하게 된 등애는 물이 없어서 경작을 할수 없는 넓고 비옥한 땅을 발견한것 입니다

그는 만약 운하를 뚫어 그곳에 물을 끌어올수만 있다면 군량을 대량으로 생산할수 있고 군사와 식량을 운반할때도 육로가 아닌 수로를 이용할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당시 위나라는 오나라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선 허창에서 군량을 조달했어야 했기 때문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운하를 뚫으면 이곳에서 경작이 가능해지고 그러면 허창에서 군량을 조달하면서 드는 비용이 절약 될 뿐만아니라 군량도 자체생산이 가능해질수 있었던 것이죠

또한 수로가 뚫리면 군사들의 이동도 빠르게 할 수 있으니 대운하는 모든면에서 위나라에게 이득이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등애는 언제나 농사를 잘 지으면 군사들을 잘 먹일수 있게 되고 그러면 군사들의 전투력이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등애가 올리는 모든 보고서의 첫문장이 바로 이 글이었다고 하죠

그는 전쟁에 있어서 보급과 농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등애는 사마의에게 운하를 건설하자는 <제하론(濟河論)>을 지어 사마의에게 보고했고 그것을 본 사마의는 굉장히 흡족해하며 즉시 대운하를 뚫기 시작했다고 하죠

운하가 완성된 이후 효과는 생각 한 그대로 였으며 수해도 줄었고 군사와 식량을 보내기에도 굉장히 편리해 졌다고 합니다

 

또한 이곳에서 경작을하며 수만명이 상시 대기하기 때문에 오나라에 대한 방어와 견제를 동시에 할수도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훗날 서진시기에 이때 등애가 만든 둑과 보가 너무 많아 관리가 어려워졌고 이 때문에 폐해도 굉장히 많이 생기긴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249년, 위나라에는 큰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사마의가 정변을 일으켜 당시 정권을 잡고있던 대장군 조상과 그 일파를 몰살시켜버린 고평릉 사변이 일어난것이죠

그렇게 조씨 가문이 정권을 잡고있던 위나라는 사마씨 가문이 모든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후패는 사마씨에 대항해 옹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곽회에게 패배해 촉나라로 도망쳤고 강유는 그의 항복을 환영하며 북벌을 준비하게 되죠

 

이후 등애는 강유의 라이벌(?)로써 그의 북벌을 모두 막아내다시피 하는데요

249년, 강유가 옹주를 공격해 들어가면서 국산에 두개의 성을 쌓아 구안과 이흠에게 그곳을 지키라 명했죠

그러자 곽회와 진태는 등애에게 명령해 성의 보급을 끊었고 결국 성을 지키던 구안과 이흠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구원군으로 국산으로 향하던 강유는 곽회와 진태군에 의해 패퇴해버렸죠

 

그러자 곽회는 강유가 퇴각한 틈을 타 강족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동시켰는데 이때 등애는 강유가 분명히 다시 돌아올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등애가 백수 북쪽에 병력을 주둔시킨지 3일째 되던날 정말로 강유의 군대가 다시 나타났는데요

강유는 등애의 병력을 보고 요화를 시켜 등애를 상대하게한 뒤 자신은 얼른 도성(洮城)을 공격하려고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이를 간파한 등애는 대치하던 요화 몰래 군을 신속하게 움직여 도성에 먼저 도착했고 그렇게 강유의 군대를 막아낼수 있었습니다

이 공으로 그는 토구장군에 임명되고 관내후에 봉해졌죠

이후 등애는 사마사에게 흉노의 세력을 둘로 나누어 그들의 힘을 약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책략을 건의하기도 했고 전쟁보다 중요한것은 농사라는걸 강조하며 농업을 장려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는데 사마사는 등애의 능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마다 등애의 건의를 대부분 받아들여줬다고 합니다

 

그러던 255년, 조상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던 문흠은 다행히 고평릉 사변때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사마씨의 정권아래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에 떨고 있었는데요

마침내 문흠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이던 관구검과 손잡고 사마씨에 대항해 반기를 일으키게 되었죠

그러자 등애는 군사를 이끌고 서둘러 낙가성을 점거한뒤 그곳에 부교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사마사가 토벌군을 이끌고 도착했을때 등애가 만들어 놓은 부교 덕분에 빠르고 편하게 낙가성에 들어갈수 있었죠

이후 문흠이 군대를 이끌고 낙가성에 도착했고 아직 사마사의 대군이 당도하지 않았을거라 생각한 문흠은 그곳을 공격해 들어갔지만 결국 사마사와 등애의 대군에 의해 패배해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관구검과 문흠이 반란을 일으켰을때 오나라의 손준 역시 위나라가 혼란한 틈을타 군사를 일으켰는데요

이에 제갈탄과 등애는 얼른 군사를 이동시켜 그들 마저 막아냈으며 그 해 강유가 또 다시 옹주자사이던 왕경을 적도성으로 몰아넣고 포위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곧장 그곳을 향해 진군했죠

 

그러자 결국 강유는 또다시 포위를 풀고 물러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이제 강유는 다시 공격해오지 못할것이라고 말했지만 등애는 반드시 강유는 다시 올것이라며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하고 있었죠

이듬해인 256년, 강유가 기산으로 출병했을때도 등애가 든든히 방비를 했던탓에 남안으로 군사를 돌려야했고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강유와 등애는 맞붙었지만 결국 강유는 또 다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강유는 진서대장군이던 호제와 연대해 위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호제가 갑자기 알수없는 이유로 오지 않았고 결국 강유는 다시 후퇴하다가 등애의 추격군에 의해 단곡에서 대패해버렸죠

이때 촉나라군은 수천명의 병사가 죽고 10여명의 장수들마저 잃고 마는 뼈아픈 패배를 맛보게 되죠

그 이후 257년에도 등애는 강유군의 공격을 잘 방어해냈고 강유는 262년에도 위나라로 쳐들어 갔지만 등애의 견고한 방어를 뚫지는 못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해가 나 263년이 되었을때 계속해서 공격해 들어오는 강유의 침략에 스트레스를 받던 사마소는 결국 반대로 촉나라를 공격해 들어갈 계획을 세웠죠

당시 등애는 촉나라 정벌을 찬성하지 않았지만 정벌이 확정되고 나서는 자신도 참전하게 됩니다

그렇게 꾸려진 촉나라 정벌군은 마침내 촉나라로 쳐들어가기 시작했는데 패퇴를 거듭하던 강유는 검각이라는 요새에 틀어박혀 결사 항전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검각에서 강유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위군이 더이상 진군을 못하고 있을때 등애는 한가지 괴상한 계책을 내죠

그것은 바로 음평을 넘어 검각을 우회해 뒤쪽으로 침투하면 강유도 검각에서 퇴각할수 밖에 없을것이라는 계책이었습니다

하지만 검각 주변 산세는 너무 험악해서 일반적으로는 우회하기는 불가능할 정도의 지형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터무니없는 도박과 같은 계책이었죠

 

등애가 이 계책을 말하자 제갈서는 말도 안되는 계책이라며 응하지 않고 종회에게 가버렸고 그렇게 등애는 혼자 정예병들로 꾸려진 별동대를 이끌고 산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등애는 60대 중후반의 나이였는데 미친듯이 가파르고 길도 없는 험난한 낭떠러지 산을 무거운 갑옷과 칼, 창 등을 짊어진채로 길을 뚫고 계곡에는 다리를 만들면서 넘어야 했으니 등애에게도 병사들에게도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죠.

심지어 급격한 경사를 내려갈때는 몸에 모포 따위로 몸을 둘둘 말고 내려갔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보급마저 힘들어져 작전이 실패하기 직전에 결국엔 산을 넘을수 있었고 검각을 우회하는데 성공하게 되었죠

이때 등애가 넘어온 총 거리는 약 700여리로 거의 280km에 달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지칠대로 지친 등애군을 기다리는건 마막이 지키고 있던 강유관이었는데요

등애는 강유관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를 하라 명하자 부하장수이던 전속은 등애에게 병사들이 다 지쳐있으니 며칠 쉬고 진군해야 한다고 말했죠

 

그러자 등애는 화를 내며 전속을 죽여버릴려고 했지만 주위 장수들의 만류로 그러지는 않았고 이후 전속은 산길에 버려진뒤 나중에 종회군에 합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일로 전속은 등애에게 원한을 품게 되죠

이후 준비를 마친 등애군은 강유관으로 향했는데요

등애군은 험준한 산을 넘어오느라 너무나 지쳐있었고 보급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남은 식량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 불보듯 뻔했죠

 

그런데 그곳을 지키던 마막은 방심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위나라 군사가 나타나자 깜짝 놀라며 성문을 열고 항복해 버린것입니다

얼떨결에 성내로 들어간 등애군은 전열을 재정비할수 있었고 이후 등애는 군을 이끌고 면죽관으로 향하게 되었죠

그곳에서 제갈첨이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면죽관마저 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촉나라의 수도인 성도로 진군을 개시하자 어쩔줄 모르던 유선은 자신의 몸을 묶은뒤 등애의 진영으로 찾아가 항복하면서 결국 촉나라는 멸망하고 말았죠

 

이후 등애는 그곳에 머물면서 촉나라의 안정을 위해 힘썼는데 약탈을 못하게 막았으며 항복한 사람들을 후하게 대해줬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뤄낸 것에 너무 도취된 탓인지 경관을 쌓아 자신의 공을 과시했으며 연회자리에서 촉의 신하였던 사람들을 모아놓고 "나 아니었으면 너네는 다 죽었을 것이다. 강유는 위대한 영웅이지만 나를 상대하다보니 곤궁한 상황에 처한것이다" 라며 으스댔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등애는 사마소에게 자신이 촉땅에 머무르며 그곳을 잘 관리하면 오나라의 항복을 유도할수도 있고 이곳에서 나오는 경제력은 훗날 오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자산으로 삼을수 있다는 등의 여러 가지 방안에 대한 상소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사마소가 너무 큰 일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자 등애는 춘추를 인용해 "장수는 국가에 이익을 줄수 있는 경우엔 독단적으로 행동할수 있다고 합니다" 라고 말하며 오나라를 정벌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마소의 의심만 더욱 부추기는 결과가 되었죠

 

결국 종회는, 등애에게 모반의 조짐이 보인다고 보고했고 264년, 사마소는 등애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게 등애와 그의 아들 등충은 어느날 잠을 자고 있다가 새벽녘에 갑자기 들이닥친 위관의 군사들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죠

위씨 춘추에 따르면 이때 등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충신이거늘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백기의 잔혹한 운명이 오늘 또 재현되었구나"라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실제로 모반을 일으킨 종회와 강유가 죽자 등애의 부하장수들은 등애의 오해가 풀린것이라 여겨 그를 강제로 구출했는데요

그러자 위관은 종회와 함께 등애를 모함한것이 밝혀지면 보복당할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등애에게 원한을 품고있던 전속을 부추겨 등애와 등충을 죽여버리고 말았죠

그렇게 촉나라를 멸망시킨 영웅 등애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가 누명을 쓴거라고 판명이 났지만 사마소에게 찍혀버린 등애와 그의 가족들은 결국 죽임을 당하거나 변방으로 쫓겨나 버렸죠

 

이후 273년, 단작과 번건이 사마염에게 등애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사마염은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그의 장손이던 등랑을 낭중에 임명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노량해전에 참전했던 명나라 장수 등자룡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전 수석인 등소평이 등애의 후손이라고 하죠

등애는 뛰어난 능력으로 사마의의 눈에 들어 내정이든 외정이든 삼국지 후반기 최고의 공적을 이룬 인물이지만 자기 관리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잘 대처하지 못했던 탓에 숙청되고 말았던 비운의 인물인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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