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의 병력으로 40만의 당나라군을 무찌른 토번 최고의 명장이었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은 비운의 명장 가르친링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현재의 티베트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과거에는 이 티베트도 강력한 통일왕국인 토번 제국을 건국하면서 오히려 한족들을 위협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이 토번제국시절 수십만이 넘는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치면서 토번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하나라고 칭송받는 가르친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7세기 무렵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해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등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정벌하는데 한창 힘을 쏟고 있던 중이었죠
이때 당나라의 서쪽에서는 4세기 무렵부터 힘을 키워온 토번부족에서 손챈감포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나 티베트 일대를 통일한 후 수도를 라싸로 정하고 토번 왕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토번은 명재상 가르통첸의 아들 가르친링이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그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죠
당시 당나라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그리고 유럽의 지중해를 잇는 동서교역 루트인 비단길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비단길 쪽에 안서도호부라는 걸 설치해서 관리를 했다고 하는데요
그 안서 지역 중에서도 4개의 요충지를 안서사진이라고 불렀습니다
667년 가르친링이 황주와 강주 일대를 약탈해 버리자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던 당나라는 뜻밖의 뒤통수를 맞게 되면서 크게 분노했죠
이에 당나라는 안서사진에서 군대를 육성하면서 토번을 상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당의 생각을 읽은 가르친링은 668년에 안서사진을 선제공격해서 오히려 그곳에 있던 당군을 박살 내버렸죠
당나라는 점점 거슬리기 시작하는 토번을 응징해버리고 싶었지만 토번에 집중하면 고구려에 뒤통수를 맞게 될까 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끈질기게 저항하던 고구려가 668년에 결국 멸망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동안 기회만 노리고 있던 당나라는 한반도에 투입됐던 병사들과 장수들을 빼내서 서쪽에 있는 토번과의 접경지대로 보내기 시작했죠
670년 당고종은 설인귀를 대장으로 삼아 10만 군대로 토번을 공격하게 했고 그들을 막기 위해 출진한 가르친링은 대비천이라는 지역에서 당나라군과 한판 승부를 벌인 끝에 그들을 박살내버리고는 왕효걸 등 부대의 주요 장수들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가르친링은 동생 가르찬파에게 병력과 양들을 내어준 뒤 당군의 선봉대와 만나면 싸우는 척만 하고 퇴각하라는 계책을 사용했고 설인귀가 거짓 승리에 신이 나서 무작정 가르찬파를 쫓는 동안 가르친링은 설인귀의 부대와 떨어진 후방부대를 격파해 버렸고 뒤늦게 속은 것을 알고 병력을 돌려 공격해 오는 설인귀의 기병대마저 박살낸다음 침착하게 설인귀부대의 남은 병력까지 마저 섬멸해 버렸다고 하네요
그런데 가르친링은 놀랍게도 사로잡은 당나라의 포로들을 죽이지 않고 다음부터는 토번을 침공할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는 그들을 다시 당나라로 보내주는 대인배다운 모습을 보여줬다고 하죠
기세가 오른 가르친링의 토번은 이후 안서사진의 요새를 모두 점령해 버리고는 그 일대를 모두 토번의 영토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당나라에 수많은 부를 가져다주었던 비단길이 끊기게 되었으며 그 일로 인해 분노한 황제는 설인귀를 파직시켜 버렸죠
그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토번때문에 분통이 터지던 당나라는 670년 또 한 번 뜻밖의 일격을 당하게 되었으니 바로 신라의 문무왕이 당을 공격하면서 나당전쟁이 시작된 것인데요
당나라는 가르친링과의 전투에서 한반도에서 활약하던 정예병과 장수들을 날려버린 데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자라나는 토번 또한 견제를 해야 했기 때문에 신라와의 전쟁에 전력을 쏟을 수가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죠
그나마 과거 한반도 원정에 참가했던 설인귀나 고간 이근행 등을 다시 보내서 신라와의 전쟁에 투입시켰지만 그마저도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전투에서 신라군에 박살이 나면서 나당전쟁은 당나라의 패배로 끝이 나게 됩니다
당나라가 신라와 전쟁을 치르는 중에도 가르친링은 계속해서 당나라를 견제하며 약탈을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에나당전쟁이 끝난 2년 뒤인 678년에 당나라는 무려 25만의 군사를 일으켜 토번을 침공해 왔지만 숭풍령전투에서 가르친링에게 또다시 참패를 하고 말았죠
당시 당나라를 이끌던 총사령관 이경현은 추격하던 토번군에 사로잡힐뻔했지만 갑자기 500명의 결사대가 나타나 토번군을 기습하는 바람에 간신히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는데 이때 결사대를 지휘하던 장수가 바로 백제 부흥 운동의 주역 중 하나였던 흑치상지라고 합니다
이후에도 토번은 여러 차례 당을 습격했지만 흑치상지에게 막혔는데 토번뿐 아니라 당나라 내의 반란군과 돌궐등을 격파하며 공을 세우던 흑치상지는 689년 누명을 쓰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게 되죠
685년 가르친링은 재상이었던 형 가르친 네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토번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당시 토번에서는 대대로 군사권은 가르가문이 그리고 내정은 톤미 가문이 맡고 있었는데 가르친링의 아버지인 가르통첸부터 재상자리마저 가르 가문이 가져가면서 토번의 군사와 내정 모두 가르 가문이 장악하게 되었죠
그렇게 재상자리에 오른 가르친링은 전선에서 수도로 복귀해 당분간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 시절 당나라에서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3대 왕 고종이 죽은 후 그의 아내였던 측천무후가 실권을 쥐고 있었죠
가르친링이 전선을 떠나 수도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된 측천무후는 689년 10만의 대군을 보내 토번이 점령한 안서사진을 침공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가르친링은 즉시 군사들을 끌고 인식가라는 강으로 이동해서 당나라군과 대치를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그 지역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당군은 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는데 이를 본 가르친링은 몰래 강을 건너 추위에 떨고 있던 그들을 기습해 대승을 거뒀죠
패전소식을 들은 측천무후는 크게 화를 내며 총사령관인 위대가를 유배 보내고 부사령관으로 참전했던 염온고를 참수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가르친링에게 연달아 패배를 하긴 했지만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 데다 당항족과 강족등 이민족의 항복까지 받으면서 생각보다 빠른 시간만에 다시 힘을 모은 당나라는 692년 왕효걸이라는 장군에게 30만 대군을 주며 또다시 안서사진을 공격했죠
당시 안서사진을 지키고 있던 장수는 가르친링을 따라다니며 활약하던 명장 가르다고리였습니다
당나라군을 지휘하는 장수 왕효걸은 670년 대비천 전투에서 가르친링에게 패한 후 포로로 잡혀있다가 풀려난 경험이 있었는데 그때 토번군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알아낸 약점을 공략하면서 가르다고리가 이끄는 15만의 토번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안서 4진의 모든 진을 점령하는 공을 세우게 되죠
그 소식을 듣고 놀란 가르친링은 서 돌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가만있으면 다음은 자기들 차례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서돌궐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를 쳤지만 왕효걸에게 대패하게 됩니다
그렇게 당나라는 다시 과거의 위상을 되찾아가는 듯했지만 695년 가르친링이 또다시 당나라의 임조라는 땅을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졌죠
3년 전 무려 15만이나 되는 토번의 군대를 박살 내버렸는데 그 짧은 시간 안에 다시 힘을 회복해서 자신들의 영토를 위협하는 토번을 보고 큰 위협을 느낀 측천무후는 왕효걸에게 30만 금아군을 비롯한 정예병과 지원군 10만 명을 포함해 무려 40만이 넘는 대군을 내주며 돌궐을 치라는 명을 내립니다
당의 침공소식을 들은 가르친링은 급히 토번 각지에서 병사들을 모아봤지만 다른 나라와의 국경지역에도 병사들을 배치해야 했기 때문에 간신히 3만 명의 병력만을 겨우 모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소라한산이라는 곳에서 대치하게 된 양군은 698년 7월 전투를 벌였고 당나라의 압승이 예상되었던 것과 달리 가르친링은 압도적인 병력을 자랑하는 적군을 상대로 끈질기게 버텨내더니 699년 3월에는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기적적인 대승을 거둬냈죠
아쉽게도 전투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아서 가르친링이 어떻게 역전승을 이뤄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소라한산 전투의 결과 토번의 위상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당나라는 스스로 자신들을 동쪽조정이라 칭하고 토번을 서쪽조정이라고 칭할 정도로 토번의 힘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크게 분노한 측천무후는 왕효걸을 평민으로 강등시켜 버렸고 이후 당나라는 이민족들에 대한 공격을 섣불리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해낸 영웅 가르친링의 앞날은 토번의 새로운 황제 치둑송첸이 즉위하면서부터 암울해지기 시작했죠
699년 토번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한 치둑송첸은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 그때까지 토번을 장악하고 있던 가르가문과 톤미가문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르친링과 그의 가문은 치둑송첸이 황제가 되기 전 후계자 다툼을 할 때 치둑송첸이 황제가 될 수 있도록 그를 지지해 줬는데도 치둑송첸은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바로 가르가문의 뒤통수를 때려버렸죠
치둑송첸은 가르친링이 자리를 비운사이 사냥을 핑계로 군사를 모은 다음 가르친링의 직속수하 2000여 명을 죽인 후 가르친링을 불러들였습니다
죽으러 오라는 거나 마찬가지인 황제의 명령에 가르친링은 기가 막혔지만 토번을 위해서는 자신이 죽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지 동생인 가르첸바와 아들 가르궁린을 당나라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청해호 근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네요
이후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당나라를 공격한 치둑송첸은 당나라로 망명한 가르친링의 아들 가르궁린에게 여러 번이나 박살이 났다고 하죠
가르궁린이 토번군의 침공을 막아낸 것뿐만 아니라 돌궐과의 전투에서도 활약하는 등 많은 공을 세우며 당 현종의 총애를 받은 것과 달리 가르가문의 뒤통수를 친 치둑송첸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만을 반복하다 704년 톤미 가문을 치기 위해 남만으로 원정을 가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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