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 출신으로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군주로 알았지만 실제로는 전략, 정치 등 매우 유능했던 조조의 라이벌 원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삼국지에서 최강의 세력인 위나라를 건국한 조조는 어찌 보면 삼국시대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불릴만한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 세력을 일으킬 때부터 삼국이 정립된 후까지 조조에게는 수없이 많은 경쟁상대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조조에게 가장 위협적인 상대라고 하면 역시나 원소를 들 수 있겠죠
그런데 원소는 비록 조조를 위협할 만큼 강대한 세력의 주인이었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너무 너프를 많이 당해서 그저 좋은 가문에서 자란 우유부단한 귀공자로만 알고 계신 분들도 많은데요
하지만 실제 원소는 독선적인 면이 강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탁월한 카리스마와 추진력을 가진 능력 있는 인물이었다고 하죠
그럼 원소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부터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소를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귀공자로만 알고 있죠
그가 대단한 명문가인 원 씨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맞지만 사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시대에서는 극히 천한 신분인 노비였습니다
만약 원소가 양인 출신의 첩과 결혼해서 나온 서자 신분정도만 됐더라도 정실 소속의 자식들에 비해 우선순위는 밀릴 수 있겠지만 본인의 출세에 크게 제약을 받지는 않을 수도 있었죠
하지만 원소는 노비 출신의 첩에게서 나온 얼 자였습니다
때문에 원술이 공손찬에게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낼 때마다 "원소 놈은 원 씨도 아니다" 라는 비하를 서슴지 않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죠
하지만 원소는 출신성분으로 인한 제약을 받았음에도 대단히 잘생긴 외모와 사람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까지 갖고 있었던 데다 몸가짐이 단정하고 위엄과 예절이 모두 넘치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의 주변은 항상 원소와 가까워지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원소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자신을 실질적으로 키워준 아버지 원봉의 정실부인이자 원술의 어머니인 인물이 사망했을 때 20대의 나이로 3년상을 치른데 이어서 호적상의 아버지인 원성의 삼년상까지 무려 6년이나 상을 치르면서 평판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후한 사회에서 어마어마한 명성을 쌓게 된 것이죠
게다가 6년상을 치르는 내내 꾸준히 조문객이 왔음에도 빈틈없는 모습을 보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원소가 인물은 인물이다"라는 식으로 호평을 받으며 그의 명성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수준이 되었다고 합니다
상을 마친 후 낙양에 들어와 벼슬살이를 하던 원소는 동탁이 조정의 전권을 잡고 황제까지 마음대로 바꾸려는 모습을 보이자 황제의 폐위를 반대하며 그와 말싸움을 벌이던 과정에서 이 천하에 힘 있는 자가 어찌 동탁 한 사람뿐이겠냐며 대놓고 동탁의 앞에서 반기를 들고는 그대로 낙양을 빠져나오면서 그때부터 자신의 명성을 전중국에 널리 알리기도 했죠
동탁은 대놓고 자신에게 대항한 원소가 눈에 거슬렸지만 그의 명성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발해태수직을 내리면서 회유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원소는 기어이 동탁을 치기 위한 반동탁연합군을 일으켰고 이에 극도로 화가 난 동탁은 수도에 남아있던 원 씨 일가를 모조리 학살해 버렸죠
일족들을 모두 잃은 원소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원소의 명성은 그야말로 하늘 끝까지 치솟을 정도가 되었지만 막상 원소는 기세 좋게 병사들을 이끌고 낙양 근처의 하내라는 지역까지 왔음에도 동탁군과 제대로 된 전투 한번 벌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후방에 있던 한복이라는 인물때문이었는데요
이 한복이라는 인물은 기주목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동탁에게서 원소를 견제하라는 임무를 받고 있었지만 세상사람들의 동탁에 대한 여론이 너무 나빠지자 반동탁연합군으로 갈아타게 되죠
그렇게 같은 편이 되기는 했지만 원소의 세력이 너무 커지면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될까 두려워한 한복은 계속해서 원소를 견제했습니다
한복은 자신에게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을 하는 능력은 없으니 후방에서 원소에게 군량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해놓고는 막상 전투를 시작하려고 하면 군량을 제대로 보급하지 않으면서 원소의 속을 썩였죠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원소에게 국의라는 장수가 찾아왔습니다
국의는 원래 한복밑에 있다가 반란을 일으킨 상황이었는데 세력이 너무 약해 원소와 손을 잡고 함께 한복을 치고 싶어했죠
그렇게 한복과 싸울 것을 결심한 원소에게 봉기라는 신하가 한 가지 계책을 제안했습니다
한복과 직접대결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니 당시 정예기병대인 백마의종을 끌고 이민족들을 사냥하며 명성을 크게 떨치고 있던 공손찬을 이용하자는 것이었죠
당시 공손찬이 이끄는 기마부대는 무시무시한 전투력으로 그 거친 이민족들이 공손찬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질리게 할 만큼 엄청난 기세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공손찬 본인의 무력도 혼자서 수십 명의 이민족들을 때려잡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이에 원소는 공손찬에게 밀사를 보내 함께 한복이 다스리는 기주를 치자고 했고 공손찬은 동탁을 치러 가려고 하는데 길을 빌려달라는 핑계를 대며 군사들을 일으켜 기주로 진군하기 시작했죠
한복은 급히 군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맞서봤지만 전투에서 크게 패하며 시원하게 가지고 있던 병력을 말아먹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말로만 듣던 공손찬 군의 위력을 직접 경험하고 겁에 질린 한복에게 원소가 한복과 같은 고향 사람인 곽도와 순심 고간 등을 보내서 만약 자신에게 항복한다면 공손찬으로부터 기주를 지켜주겠다며 그를 설득했죠
이에 경무와 관순 저수 등 한복의 측근들은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공손찬을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던 한복은 결국 원소에게 기주목 자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그렇게 원소는 인구수가 거의 600만에 달하던 기주를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없이 오직 외교적 술수와 심리전을 이용한 계책만으로 꿀꺽하는 데 성공하게 되죠
하지만 문제는 이제 기주의 코앞까지 다가온 공손찬이었습니다
삼국지연의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우리가 봤던 것과는 달리 사실 이때 원소는 공손찬을 크게 두려워하며 그의 사촌동생인 공손범에게 발해태수의 지위까지 양도하면서 어떻게든 공손찬과 맞서지 않으려 했죠
하지만 공손범은 오히려 그 발해의 군사를 이끌고 공손찬에게 합류해 버렸습니다
게다가 191년 11월 청주의 황건적 30만 명이 하북의 발해를 침공하자 공손찬은 2만 명의 병사만을 이끌고 나가서 이들을 거의 몰살시켜 버리면서 자신의 명성을 중국 전역에 크게 떨치는 동시에 세력을 더욱 키우게 되었죠
그렇게 기세가 오른 공손찬 군은 원소군을 무찌르며 계교로 병사들을 진군시키면서 부하인 엄강과 전해 추단을 각각 기주와 청주 병주의 자사로 파견해 자신이 그 지역을 다스리겠다는 선전포고까지 해버렸습니다
그렇게 양군은 계교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공손찬이 이끄는 3만의 보병과 1만의 기병은 북방에서 이민족들을 상대로 많은 승리를 거둔 정예군이었지만 원소의 병사들은 급하게 긁어모은 탓에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보병집단으로 머릿수는 비슷했지만 병사들의 전투력 수준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 상대였죠
원소가 믿을만한 거라곤 국의가 데려온 800명의 정예병사들과 여러 개의 화살을 연달아 쏠 수 있는 1천여 명의 강노부대뿐이었습니다
원소의 진영을 살펴본 공손찬은 이를 깔보고 기병을 풀어 공격했지만 기세 좋게 돌격하던 공손찬의 기병대가 국의 부대에게 1차로 저지당하고 그 틈을 노려 원소군의 강노부대가 옆쪽에서 쇠뇌를 퍼붓기 시작하면서 공손찬의 기병대는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죠
기세가 오른 800명의 국의 부대는 공손찬의 수만 대군을 그대로 정면으로 돌파해 공손찬의 진영까지 도착해서는 부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깃발을 뽑아버렸고 원소군의 본대까지 그 뒤를 따라오면서 공손찬 군은 완전히 박살이 났습니다
그런데 전투가 그렇게 원소군의 승리로 끝나는가 싶던 순간 갑자기 반전이 일어났는데요
원소군의 본대가 전부 앞쪽으로 집중돼 공손찬 군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방에 있던 원소의 주변에는 불과 수십 명의 병사들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초반 전투에서 패배해 흩어졌던 공손찬의 기병대 2천 명이 뒤늦게 다시 모여서는 후방에 있던 원소를 찾아내 그를 포위하기 시작한 것이죠
2천 명의 기병대가 화살을 비 오듯이 쏘며 압박해 들어오자 원소의 신하인 전풍은 원소를 근처에 있는 담장 틈에 숨겨서 그의 목숨을 살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원소는 머리에 쓰고 있던 관을 벗어 땅에 내던지면서 "사내대장부라면 마땅히 앞에서 싸우다 죽으면 그만이지 어찌 구차하게 담장 사이로 숨어서 목숨을 구걸하겠느냐"라고 소리치고는 주변에 있던 병사들을 격려하며 공손찬의 기병대와 맞선 끝에 결국 승리를 거두게 되죠
이후 기주와 연주 일대에서 공손찬 군과 원소군 사이의 전투가 계속되다가 192년 12월 원소가 용주라는 지역에서 공손찬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면서 마침내 공손찬의 세력을 기주에서 완전히 쫓아내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다음 해 1월 조정의 중재를 받아들여 원소와 공손찬은 휴전상태에 들어가지만 그해 3월 원소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원소에게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흑산적의 우두머리인 장연과 손을 잡고 업성을 기습해 점령하고 원소의 일가족을 모두 포로로 잡는 사건이 일어났죠
그러자 공손찬도 휴전 약속을 깨고 다시 침공을 해왔으며 원술 또한 흑산적과 손잡고 원소를 치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조조와 손잡고 원술의 진격을 저지한 원소는 이각과 곽사에 패해 자신에게 의지하러 온 여포를 객장으로 삼아 흑산적의 두목인 장연이 이끄는 본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죠
한편 공손찬은 원소와 장연이 싸우는 동안 자신이 원소를 치는 것을 계속 반대하던 유주목 유우를 쳐서 승리한 후 유우를 비롯한 유주의 관리들을 모두 처형했는데요
하지만 유우는 황실의 종친인 데다 평소 주변 백성들은 물론 이민족들에게까지 덕을 베풀면서 그 일대의 사람들 모두에게 칭송을 받고 있었는데 그런 인물을 처형해 버리면서 공손찬은 급격히 민심을 잃게 됩니다
원소는 치밀하게 이 사실을 전략적으로 이용해서 유우의 죽음에 분노하는 여론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고 유우의 아들 유화를 비롯해 유우에게 은혜를 입은 세력들을 모두 자신의 아래로 끌어들이면서 10만이 넘는 병력을 거느리게 되죠
이후 포구에서 펼쳐진 전투에서 공손찬 군이 패하며 무려 2만 명이나 되는 병사를 잃게 되자 이후로 공손찬은 싸울 의지를 모두 잃어버린 채 역경루라는 성에 틀어박혀버립니다
이 역경루라는 성은 공손찬이 나가서 싸우는 것을 포기한 채 아예 안에서 버틸 생각으로 지은 우주방어가 가능한 요새였기 때문에 원소는 몇 년 동안 공격을 시도했지만 역경루를 함락시키지 못했죠
하지만 공손찬은 역경루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갈수록 부하들을 믿지 못하고 나중에는 아예 싸움을 포기한 듯 은둔형 히키코모리 같은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때까지 공손찬을 믿고 따르던 부하들마저 그를 버리고 원소에게 항복을 하게 됩니다
결국 199년 3월 역경루가 함락되면서 공손찬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죠
그렇게 하북4주를 평정한 원소는 이제 조조를 토벌할 마음을 먹게 됩니다
전풍과 저수 등의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원소는 오히려 그들을 감옥에 가둬버리고 조조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면서 마침내 전투가 시작됐죠
이후 백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관우에게 맹장 안량을 잃고 연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난전 중에 문추까지 목숨을 잃게 되면서 원소는 용맹스런 부하를 둘이나 잃게 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안량과 문추를 꺾었지만 원소의 주력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한 도박이라 생각한 조조는 백마와 연진에서 병사들을 물려 관도에 방어선을 마련했고 원소는 압도적인 병력차를 이용해 조조의 진영을 둘러싸고 쉴 틈 없이 공격을 계속 퍼부었죠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조조군이 불리해지던 상황 속에서 원소의 부하 허유가 조조를 몰래 찾아와 지금 원소군의 군량이 오소라는 곳에 모두 쌓여있으니 그곳을 공격하면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제보를 합니다
궁지에 몰려있던 조조는 망설임 없이 오소를 공격했고 오소를 지키던 순우경과 뒤이어 도착한 원소의 지원군까지 모두 격파해 버리면서 결국 관도대전의 결과는 조조군의 대승으로 끝나며 원소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탈출하게 되죠
비록 관도에서 패하긴 했지만 원소의 세력은 여전히 조조보다 우세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원소가 관도에서 패배한 이후 병을 얻었고 조조에게 당한 패배로 인한 화병까지 도지면서 202년 5월 피를 토한 채 사망하게 되죠
만약 원소라는 구심점이 계속 남아있었다면 하북을 정벌하는 일이 몇 배는 더 힘들었을 텐데 원소가 뜻밖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 조조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천운이 따른 셈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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