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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마비키. 자기가 낳은 자식을 일부로 죽여야만 했던 매정하고 잔혹스러운 일본의 풍습

by 사탐과탐 2021.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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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비키'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본인들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기가 낳은 자식들을 부모가 일부로 죽여야만 했던 일본의 옛 풍습입니다.
이런 매정하고 잔혹스러운 마비키 풍습은 정부에서 금지시켰음에도 에도시대부터 메이지유신을 거쳐 20세기까지 이어져왔다고 하는데요.

 

 

일본 에도시대에는 '마비키'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솎아내다라는 뜻을 가진 이 마비키는 갓 태어난 아기를 엄마가 무릎으로 목을 졸라 죽인 끔찍한 풍습이었죠.

 

솎아내기는 주로 농사를 지을 때 식물의 밀도를 줄여 나머지가 더 잘 자라도록 하는 방법인데요.

다른 아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갓 태어난 아기를 솎아낸 것이죠.

엄마가 무릎을 사용한 방법 외에도 젖은 종이로 아기의 입과 코를 막는 방법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방법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죠.

 

그 외에도 에도시대 중기 이후에는 마비키를 금지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흉년이 들거나 기근이 발생하면 농촌 등지에서는 영유아를 압살하거나 교살 익사 생매장 등의 방식으로 마비키를 행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 마비키 풍습은 영락없는 범죄이지만 당시에는 잘못된 행동이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7살 미만의 아이들은 인간이 아닌 신의 아이라고 생각했고 언제라도 신에게 돌려보낼 수 있다고 여겼으며 단지 자신의 아이로 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죄의식 조차 없었다고 하죠.

그러다보니 마비키는 솎아내다의 의미도 있었지만 '아이반환' 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아이를 신에게 다시 돌려준다는 뜻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위생이 좋지 못했고 의료환경조차 열악하다 보니 유아 사망률은 현재의 비해 굉장히 높았는데 그래서 7살이 되기 전에 죽으면 신이 다시 데려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마비키 풍습으로 인해 에도시대 말기에는 한 가정 당 평균 자녀수가 3명을 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피임하는 기술이나 방법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렇다보니 여성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임신하는 경우는 허다했죠.

그만큼 마비키의 규모는 엄청났는데요 현재 지바현인 일본의 옛 가즈사국에서는 10만 농가에서 마비키 당하는 아이의 수는 해마다 3~4만 명에 달했고 현재 아키타현인 데와국에서는 해마다 7~8만 명에 육박했다고 하죠.

 

전국적으로 보면 규모가 얼마나 되었을지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과거 에도시대의 일본에서는 왜 이런 일이 성행했던 것일까요?

에도시대에는 전쟁이 종식되고 평화의 시대가 오면서 인구수가 매년 증가하고 있었죠.

 

한 가정에 새로운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은 굉장히 기쁜 일이지만 당시 일본 백성들에게는 전 가족의 생사가 걸린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도막부의 관리들은 참깨기름과 백성의 세금은 짜면 짤수록 나온다고 하면서 매년 세금을 늘렸고 그럴수록 일본 백성들의 부담은 늘어났죠.

 

이때 조선의 경우에는 세율이 10%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던 반면 일본의 세율은 무려 50%~70%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관리들의 만행과 이와 같은 엄청난 세금을 감당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키기 일쑤였는데요.

에도시대에만 무려 3천 번이나 되는 민란이 일어났을 정도였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는 민란이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일어난 셈이죠.

이 정도로 당시 일본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고 과도한 세금과 지배층의 가혹한 착취로 인해 가난한 일본 백성들에게는 아이가 태어나 봤자 양식만 축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으며 그렇다보니 아이를 기를 여유가 없다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마비키를 행했습니다.

 

어느 정도 자라기만 해도 노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키우기까지 필요한 식량마저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막부와 다이묘들 때문에 이 마비키 풍습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죠.

 

마비키로 인해 가장 많이 희생된 아이는 둘째나 셋째 아들들이었습니다.

딸이 태어나면 훗날 결혼을 해서 출가하기도 하고 아니면 게이샤 또는 매춘으로 팔려가기도 했기 때문에 마비키를 당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죠.

그리고 쌍둥이를 낳게 되면 재수가 없거나 불길한 징조로 간주되어 둘 다 마비키를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마비키를 한 아이의 어머니들은 처음에는 정신적으로 굉장히 고통스러워했으나 이게 두 번 세 번이 되자 적응이 되어버려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고 하죠.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일본 정부에서도 마비키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런 악습을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아이를 죽이면 안 된다고 선전하는 동시에 과거에는 부모가 자식을 죽이더라도 비교적 가벼운 죄로 취급되었지만 이제부터는 흉악한 살인죄로 간주하여 마비키를 단속하고 강력하게 처벌하기 시작했죠.

이러한 일본 정부의 노력으로 마비키는 점점 근절되었고 일본의 인구는 매년 급속하게 늘어났습니다.

 

법으로 금지시키고 있다고 하지만 거의 250~300여 년간 행해져오던 풍습이 단기간에 바로 사라질 수는 없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마비키가 몰래몰래 계속 행해져 왔는데요.

어떤 마을에는 모든 집 자식이 1남 1녀만 있었다고 하죠.

이것은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는 한 절대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마비키를 철저히 금지했던 메이지유신 이후에 이 마을의 가족 구성원이 이러했던걸 보면 일본의 일부 지역에서는 계속해서 마비키가 행해져 온 것이라 볼 수 있죠.

거기다가 1930년대까지 홋카이도에서는 여전히 마비키가 행해지고 있었다는 기록과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할 때까지도 작은 마을에서는 여전히 이 악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굉장히 끔찍한 풍습이다 보니 일본은 이 마비키 풍습이 외부로 새어 나가는걸 막으려고 하기도 했고 가족들이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라는 변명을 하고 있기도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일본의 자장가에는 마비키를 연상시키는 내용이 있는데 "자장자장 잘 자거라 자지 않으면 강에 버린다. 자장자장 잘 자거라 자지 않으면 묻어 버린다" 라는 구절입니다.

이 가사 중 강에 버린다 묻어버린다가 마비키를 뜻하는 은어라고 하죠.

 

아이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것 같은 너무 섬뜩한 자장가네요.

일본에 있었던 그들이 지우고 싶어 하던 과거 마비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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