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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열녀. 나라에서 주는 혜택 때문에 가족들이 남편을 잃은 여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참혹한 이야기

by 사탐과탐 2021.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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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남편이 죽은 여자는 재혼이 법으로 불가능 했었습니다.
또한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충, 효, 열을 너무나 강조하다보니 여성들에게 열을 행하라며 반 강제적으로 정절을 지키라 말하며 열녀로 뽑히면 나라에서 엄청난 혜택도 주는것이었죠.
그러다보니 이 혜택 때문에 과부에게 죽음을 강요했는데요.
그 열녀에 비참한 삶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요즘에는 돌싱들을 주위에서 많이 볼수 있는데요.

사회적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인지 이혼과 재혼이 예전처럼 치부가 되는 사회가 아니죠.

하지만 불과 20여년전만해도 이혼한 연예인은 TV에 나올수 조차 없었고 이혼한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받기 일수였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혼을 하면 이런 황당한 대우를 받아야 했을까요?

 

태종 13년이던 1413년, 태종은 전국의 이름난 효부와 열녀를 추천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너도나도 믿겨지지않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올리기 시작했죠.

그 이유는 자신의 마을이나 가문에서 열녀가 선택되면 세금혜택이나 여러 이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효부나 열녀로 선택받기위해 억지로 손가락을 잘라 효부인척 사연을 올리기도 했고 안동의 김씨부인은 남편을 구하기위해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스토리를 조정에 올리기도 했죠.

열녀란 굳은 절개를 가졌던 여성들에게 붙였던 말인데요.

이 열녀들은 굉장히 잔혹한 삶, 또는 죽음을 강요받았죠.

 

오늘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열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 고려시대나 삼국시대때의 여성들의 지위는 꽤나 높았죠.

여성들에 대한 제약도 많지 않았고 남녀가 만나 연애를 하는것과 결혼하는 것도 흔한일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남편이 일찍 사망했을때 여자는 다른남자와 재혼하는것 또한 별일아닌일로 여겨졌죠.

 

삼국시대때는 전쟁이 굉장히 자주 일어났고 이에 많은 남자들이 일찍 죽었지만, 열녀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은걸 보면 이때까지만 해도 여성이 정절을 지키느니, 수절을 지키느니 하는 말은 그리 흔하지 않았던것 같은데요.

그러나 고려 말부터 여성의 정절에 대해 많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유학이니 성리학이니 하는 학문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었죠.

 

성리학에서는 강조하는 것이 세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충, 효, 열(烈)이었습니다.

열이란 바로 절개를 뜻하며, 정절이나 순결을 지키는것을 의미했죠.

 

열녀라는 단어는 중국 전국시대에 처음 등장했는데요.

바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나왔죠.

 

이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고난 뒤 유교적 가치관이 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하고 정절을 지키는것이 강조되었죠.

그러다보니 남자로부터 강제로 겁탈을 당했다 하더라도 피해자인 여성을 보호해주고 지켜주지 못할망정 그녀는 정절을 잃은 더러운 여자가 되어 손가락질 받은것입니다.

 

성종은 "여성이 절개를 잃는것이 목숨을 잃는것보다 더 큰 문제다" 라고 할 정도였으며

거기다가 경국대전에 여성의 재혼을 법적으로 금지시켜 버리는 법률을 넣어버렸죠.

행여나 남편을 잃은 여자가 비밀리에 다른남자와 정을 통하거나 재혼을 한다면 그녀의 자식은 양반의 신분이어도 관직에 나갈수 없었으며 사회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조선에서는 더욱더 유교 질서를 강화시키기 위해 언문삼강행실열녀도, 열녀전, 여칙, 여훈 등의 책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널리 반포하기도 했죠.

또한 정절을 지키고 이를 몸소 실천한 여자들에게는 열녀(烈女)라는 칭호를 내리고 그 열녀가 나온 마을 입구에는 그녀를 기리고 칭송하고자 열녀문이라는 기념문을 세웠습니다.

 

그만큼 조선에서는 열녀를 장려하기 시작한것인데요.

여기까지만 보면 열녀란 것이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열녀로 뽑히고 열녀문이 세워진다는 것은 굉장한 혜택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죠.

 

조선 초까지만 해도 남편이 일찍 사망하게 되었을때 다른 남자와 재혼하지만 않으면 열녀로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내는 남편의 3년상을 하는게 당연시 되었고 그 이후에도 평생을 상복을 입고 다니면서 자신이 남편을 잃은 과부임을 드러내고 다녀야 했죠.

 

하지만 이때까지만해도 과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았는데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부터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유교적 질서관이 흔들리게 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이 질서를 바로잡고자하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을 겪으며 목숨을 바쳐 부모님을 구한 효자의 사례나 남편을 위해서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열녀들의 사례를 전국적으로 찾아내 포상하기 시작한 것이죠.

바로 여자가 절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나라에서 상을 준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사람 목숨을 파리목숨 마냥 여긴것이 어이가 없는 대목이죠.

그러나 열녀를 배출한 가문은 그것을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한 나라에서는 열녀의 집안에 정문(旌門)이라는 문을 세워 줬으며 그 집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고 게다가 집안에 젊은 남자가 있으면 벼슬을 내려주기도 했죠.

 

이 혜택들은 후손들에게까지 지속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열녀로 꾸며 신청하는 경우가 속출했습니다.

또한 이 포상을 노리고 가족들이 남편이 일찍 죽은 과부에게 각종 방법으로 자살을 강요하기도 했고 심지어 과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기위해 일부러 잔인하게 괴롭히기도 했으며 더 막장인 경우는 가족들이 과부가 된 여인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가족들이 몰래 동네 남자들을 시켜 과부를 집단으로 겁탈하도록 했고 이 충격으로 과부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끔 하는 인간임을 포기한 사악한 행위도 일삼았죠.

이런식으로 나라에서 주는 혜택을 받기위해 전국적으로 열녀붐이 일어나게 되었고 열녀에 대한 보고가 엄청나게 늘게 되었습니다.

 

조선후기 성해응이 쓴 <절부변부인전>에는 수군절도사 이유수가 병에들어 쓰러지자 그의 아내이던 변씨가 자신의 다리를 베어 그 피를 남편에게 먹였고 하지만 남편이 사망을 하자 변씨는 스스로 독약을 먹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또한 실학자 안정복의 <열녀숙인조씨정문>에는 병조좌랑을 지낸 정광운의 아내 조씨는 남편의 삼년상을 다 치루고나서 독약을 먹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가족들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타 다시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남편이 죽고나서 스스로 목을 찔렀다던가, 식음을 전폐하고 방안에서 굶어 죽었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엄청나게 올라온것이죠.

이중에는 허무맹랑한 스토리도 많아서 진위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이런식으로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으면서 정절을 지켰거나 남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여성들이 열녀로 선정되어 포상을 받았습니다.

거기다가 전란의 화마가 온세상을 뒤덮었을때도 정조를 잃지 않기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여인들, 죽어가는 남편을 위해 자신의 피와 살 등을 먹여가며 남편을 살린 여인들 역시 열녀로 인정 받았죠.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환향녀들에게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가족들이나 남편, 아버지에게 버림받거나 죽음을 강요받았죠.

이렇게 열녀, 정절, 절개 라는것들 때문에 남편을 잃은 과부들의 삶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진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다산 정약용은 "남편이 죽는다고해서 여자가 따라죽을 필요가 전혀 없다. 그렇게 되면 여자만 불쌍해질뿐이다. 또한 재가를 하지못하는 과부는 생활력이 없어 굶어 죽을수도 있다." 라고하며 열녀에 대해 반대를 하기도 했죠.

 

하지만 과부에게 가해진 죽음의 강요는 조선이 망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고 열녀라는 말도안되는 제도는 결국 1894년 갑오개혁때 여성의 재혼을 허용하게 되면서 비로소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열녀라는 명칭은 비록 사라지게 되었지만 조선시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최근까지 이혼과 재혼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좋지 않았죠.

지금은 성격이 맞지 않거나 해서 이혼하는 경우는 매우 흔해졌고 사회적 인식도 많이 개선이 되어서 다행인것 같기도 하네요.

 

조선시대때 남편잃은 과부들에게 강요된 희생과 고통, 열녀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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