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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유금필. 그가 없었다면 왕건도 고려도 없었다!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왕건이 고려를 세울수 있게한 일등공신이자 고려 최강의 무장

by 사탐과탐 2024.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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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없었다면 왕건도 고려도 없었다!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왕건이 고려를 세울수 있게 한 일등공신이자 고려 최강의 무장 유금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무시무시한 장수들이 많았습니다

 

고작 13명의 부하들로 몽골군을 쳐부순 김경손

한반도 최강의 소드마스터라고 불렸던 척준경

그리고 여요전쟁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

고려말 최강의 장수로 일컬어지던 이성계 등

많은 장수들이 고려에 존재했었죠

 

하지만 오늘 이야기 할 유금필도

최강의 무장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는데요

 

그는 혼자서 후백제군을 작살내버렸던 인물로

고려 초 미친수준의 전공을 세웠던 인물입니다

 

유금필은 기병이나 수군 할거 없이 모두 잘 다루며

평생 패배를 모르고 살았던 그런 장수였죠

 

실제로 고려를 세운 왕건도 여러번의 대 위기가 있었고

그 위기때마다 유금필이 왕건을 구해내지 않았다면

왕건도, 고려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유금필이 없었다면

견훤의 후백제가 후삼국을 통일했을것이라는 말이 있을정도이죠

 

오늘은 왕건의 칼이 되어 최전방에서 맹활약을 거듭했던

유금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유금필은 신라 북부에 있던 평산 출신인데요

 

정확한 출생년도가 알려져 있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대의 역사가들의 추정에 의하면

880년대 이전에 태어났을것이라고 하죠

 

그는 원래 궁예의 수하장수였습니다

 

하지만 훗날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을때

왕건의 부하가 된것으로 추정하고 있죠

 

이를 추정만 하는 이유는 이전까지는 유금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고려의 1등 개국공신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왕건이 고려를 세웠을 당시까지만해도

유금필의 전공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같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이후 고려 최고의 영웅이 될 정도로

왕건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부하장수가 되는데요

 

유금필이 본격적으로 기록에 나타나는 시점은 923년 정도쯤 부터이고

이때부터 그의 눈부신 맹활약이 시작됩니다

 

당시 고려는 신라와는 동맹관계였지만

이미 신라의 힘은 너무나도 약해진 상태였고

반면 최대의 적으로는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가 있었죠

 

이때 후백제의 군사력은 고려의 두배에 달했다고 하는데요

 

영토의 크기는 고려가 더 넓었지만

한강 유역의 최대의 곡창지대를 후백제가 모두 차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력을 바탕으로 더욱 강한 군사력을 지니게 된것이었죠

 

거기다가 고려의 북쪽에는

이민족들이 호시탐탐 고려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으로 압박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북쪽의 말갈족이 자꾸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며 위협을 가하자

왕건은 유금필에게 북방 이민족 문제를 해결하라는 명을 내렸고

그렇게 유금필은 병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게 되었죠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성대한 연회를 열어

말갈의 추장 300여명을 불러 대접한뒤

이들이 거나하게 취했을 무렵

그들에게 이제 고려에 복종하라고 큰소리로 위협을 가해

단숨에 말갈족 추장들을 굴복시켰으며

포로로 잡혀있던 고려인 3000여명도

다시 고려로 귀환시키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군사력에 큰 피해없이 북방 말갈족을 복종시킨 유금필은

이후 대추장이라고 불릴정도로 그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죠

 

그리고 골암진에서 그는 강력한 기병을 양성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유금필의 기병들은 훗날 후삼국시대를

끝내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러던 925년, 견훤이 신라의 조물성으로 쳐들어오자

왕건은 손수 병사를 이끌고 신라를 구원하러 갔죠

 

하지만 강력한 후백제군과 적수가 되지 못했고

전략적 요충지이던 조물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왕건의 신변까지 위험에 처해지게 된것이죠

 

그때 당시 유금필은 후백제의 연산진(현재 논산)과 임존군(현재 예산)을 공격해

후백제 장수인 길환과 3000여명의 적군을 무찌르며

승승장구하고 있던 상황에

왕건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유금필은 돌아갔다가는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해

엄청난 수를 두게 되는데 즉시 모든 병사들을 이끌고

위험을 무릅쓴채 후백제의 영토를 가로질러

순식간에 왕건이 있는 조물성에 도착했던 것이죠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군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조물성에 도착했던 덕에

적의 원군이 올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견훤은

허를 찔리게 되었고

어쩔수없이 군사들을 물릴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유금필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지를 발휘해

왕건을 구해낼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견훤은 여전히 신라를 가만히 두지 않았는데요

 

2년후인 927년에 견훤은 5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공격해 경애왕과 왕족들, 귀족들까지

죽여버리는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후백제군의 약 3~4배에 달하는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구원하러 갔죠

 

그리고 공산(현재 대구)에서 후백제군과 조우하게 됩니다

왕건은 숫적 우세를 믿고 후백제군을 공격했지만

견훤의 신들린 지휘로 인해 참패를 당하게 되었죠

 

그리고 왕건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신숭겸은 왕건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스스로 미끼가 되어 후백제군을 유인해냈고

그렇게 왕건은 일개 병사의 옷을 입고 겨우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공산전투에서 신숭겸을 비롯해 왕건의 장수 8명이 전사했다고 해서

공산의 이름이 팔공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죠

 

어쨌든 공산전투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받은 고려는

이후 후삼국의 패권을 후백제에 넘겨주고 마는 상황이 닥쳤는데요

 

그런 절망적인 고려의 상황을 타개시킨 인물이

바로 유금필이었습니다

 

928년에 유금필은 탕정군(현재 온양)에서

축성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그때 왕건이 후백제의 삼년산성을 공격했다가 패배해

후백제군에 추격을 당하는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죠

 

그러자 유금필은 즉시 병사들을 이끌고 청주로 달려가

후백제군 300여명을 도륙하고 왕건을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다음해인 929년에 왕건은 또다시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공산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후백제군은 기세를 몰아

고려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죠

 

그렇게 후백제군은 고려의 고창(현재 안동)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후백제군에 한번 크게 데였던 왕건은

그냥 고창을 포기하고 퇴각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유금필은 왕건에게

'고창을 빼앗기게 되면 이후 후백제가 순조롭게 북진을 할수 있는

관문을 열어주게 되는 셈이기도 하고

여러 호족들 마저 고려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어

이는 훗날 고려의 멸망까지 이어질수도 있다'며

백제군과 일전을 벌일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죠

 

유금필의 말을 왕건은 유금필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어

후백제군과 결전을 벌이게 되는데요

 

그때 후백제군을 두려워 하던 왕건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이

패배할 것을 대비해 도망칠 곳을 미리 확보해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때 유금필은 그런 장수들에게

"무기가 흉악한 도구이며 전쟁이 위험한 것은 자명한 것이니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겨우 승리할 판인데

어찌 적을 앞에 두고도 지는 것에 겁을 내는 겁니까?”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직접 선봉에 서서 적진을 향해 돌격했고

그런 유금필의 기세를 등에 업은 고려군이 있는 힘껏 싸워

후백제군 8천여명의 목숨을 빼앗는 대승을 거둘수 있었던 것이죠

 

이때 견훤 역시 겨우 목숨만 건져 후백제로 탈출할 수 있었으며

과거 공산전투의 패배로 인해 후삼국의 패권을 후백제에 빼앗겼던 고려는

이 고창전투의 승리로 빼앗긴 패권을 다시 쥐는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고창전투 승리의 기세를 몰아 유금필은

후백제의 성 30여개까지 빼앗았으며

고려의 기세가 완전히 되살아나는 계기를 마련했죠

 

모두가 도망치자고 할때 혼자서 결전을 벌일것을 주장했고

전황을 180도 바꿔준 고창전투를 승리로 이끈

절대적인 전공을 세운것이 바로 유금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유금필은 명실상부한 고려의 영웅이 되었으며

왕건 역시 유금필을 극찬하며 그를 가장 총애하게 되었죠

 

하지만 이런 명성과 활약을 한 사람에겐

반대로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요

 

기록에 의하면 고려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막대한 전공을 쌓은 유금필이

931년 뜬금없이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왜 유배를 당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데

많은 역사학자들은 왕건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유금필을

다른 공신이나 호족들이 그를 견제하기 위해 모함을 했고

그로인해 유배를 갔을것이다 라는 추정을 하고 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왕건 역시 유금필이 무고하다는것을 알고 있었지만

영웅으로 추앙받는 유금필을 조금 견제하는 차원에서

유배를 명했을 가능성도 없지않아 있을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왕건 역시 궁예의 부하장수 였다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던 인물이기 때문에

군사적 정치적 능력을 겸비한 유금필은

왕건에게는 최고의 신하일 뿐만아니라

최고로 경계해야할 대상이기도 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유금필은 유배생활 중에도

왕건과 나라를 걱정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충의를 보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932년 후백제의 장수 상귀와 상애가

송악 인근과 대우도를 침공했는데

그들로 인해 고려 수군이 대패를 해

막대한 타격을 입게되는 사건이 벌어졌죠

 

이때 왕건은 장수 만세를 보내 이들을 막도록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유금필은 유배중인 몸임에도 불구하고

몸소 함선과 병력을 모은뒤

대우도에 자리잡고 있던 상애를 격퇴해버렸죠

 

이에 왕건은 다른 신하들의 참소를 믿고 유금필을 유배보낸것을 후회하면서

다시 유금필을 조정으로 불러들였고

이후 933년에는 정남대장군으로 임명했습니다

 

이후로도 유금필의 활약은 믿기 어려울 정도인데요

 

933년에 견훤의 아들인 견신검이 신라를 공격하자

왕건은 유금필에게 급히 군사를 이끌고가 신라를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렸죠

 

이때 병력을 소집하는 시간도 부족했던 유금필은

대군은 나중에 따라오도록 명령한뒤

자기 수하의 기병 80명만 이끌고 신라로 달려갔습니다

 

가던 도중 후백제군과 만나게 되었지만

이때 고작 80명의 병사로 후백제의 대군을 무찔렀던 것이죠

 

당시 유금필이 부하들에게 말한 것도 굉장히 멋있는데

후백제군과 결전을 벌이기 전 유금필은 부하들에게

"이 전투에서 나는 죽음을 피할 수 없겠지만

너희들까지 희생돼선 안 된다.

각자 살 길을 도모하라" 라고 말했지만

그의 부하들은 "장군님과 같이 죽으면 죽었지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라고 하며 유금필과 함께 백제군과의 전투에 돌입했고

결국 승리하기까지 한것입니다

 

또한 유금필은 신라를 구원하는데 성공한 이후

고려로 돌아오는길에 후백제군과 또 만나게 되는데

이때 많은 적장을 사로잡고 수많은 적을 죽이는데 성공하자

왕건은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로부터 1년후인 934년 왕건과 함께 운주성을 공격했을때도

견훤이 화친을 청하자 그는 화친을 반대하며

자신만 믿고 따라오라 말한뒤

기병 수천을 이끌고 선봉에서 야습을 감행해

후백제군의 핵심전력이던 최정예 기병 3000여명을 사살하고

여러 장수들을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이 운주성 전투를 승리함으로써

웅진 북쪽의 30여개의 성마저 고려에 투항했고

후백제는 충청도 지역을 잃게 되면서

후삼국의 주도권마저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죠

 

후백제의 견훤의 입지 또한 줄어들게 되는데

이때 장남이던 견신검이 모반을 일으켜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만큼 후백제의 상황도 악화일로를 걷고있던 것이죠

 

거기다가 신라의 경순왕은 대세가 고려로 기울었음을 느끼고

신라를 고려에 바치며 항복하면서

그렇게 신라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에서도 유금필의 맹활약은 끝나지 않았는데

왕건은 후백제에게 빼앗겼었던 나주 일대를 되찾기 위해

유금필에게 출진을 명했고

유금필은 고려 수군을 이끌고 가

다시 나주 지역 일부를 되찾아오는데 성공했죠

 

거기다가 금산사에 감금 당해있던 견훤이 나주로 탈출하자

수군을 이끌고 견훤을 데리고 고려에 돌아오는 등

또 다시 막대한 전공을 세울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듬해인 936년에

후백제를 끝내기 위해 왕건은 약 10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후백제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고

후백제의 견신검 역시 65,000여명의 병력으로 맞서게 되었죠

 

그리고 양군은 일리천(현재 구미)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데

고려 중군의 선봉이 된 유금필은

자신이 직접 애지중지 양성했던 9,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후백제군을 완벽하게 격파해 버렸고

견신검 역시 도망치다가 결국 고려에 항복해

후백제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923년부터 936년까지 약 13년간 고려의 선봉장으로써 전장을 누비며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유금필은

통일이후 941년,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그런데 진짜 유금필이 없었다면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기 어려웠을것 같긴하네요

 

왕건은 유금필의 딸을 9번째 왕비로 맞이했으며

죽기직전 '유금필의 후손은 죄를 짓더라도 따지지 말고 중용하라'

라는 유언까지 남겼다고 하죠

 

그리고 유금필은 왕건의 배향공신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기까지 합니다

 

사실 유금필의 활약만으로 보면

거의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최고의 전공을 세웠던 인물이긴 하지만

현재 그의 인지도는 거의 없다시피 한데요

 

유금필의 업적이 외적의 침입을 막아낸것이 아닌

한반도 내에서 있었던 내전이었기 때문에

강감찬이나 을지문덕과 같은 인지도가 생기진 않은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려와 왕건의 절체절명의 위기를 여러번이나 막아내고

거의 매년 모든전투에서 전부 승리했던 걸 보면

정말 어쩌면 고려를 통틀어 최강의 무장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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